월간참여사회 2005년 11월 2005-11-01   1600

스리랑카, 피비린내 나는 내전과 살육의 역사

오랜 군주제의 역사, 스리랑카

인도 남부 끝자락 아래에 위치한 대륙에, 기원전 5세기 경 인도 북동부의 비자야왕의 출현으로 그 역사가 시작된 스리랑카는 오래된 군주제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이 작은 나라는 여러 시대에 걸쳐 타프로바네, 탐바파니, 싱할라 드비파 엘람, 락디브, 세렌딥, 랑카디파, 실론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고, 1972년에 스리랑카(Sri Lanka)로 더 최근에는 슈리랑카(SHRI Lanka)로 불렸다. 이웃 나라인 남부 인도 왕국에 의해 정기적으로 침략을 받았고, 지리학적 위치로 인해 포르투갈(1505년), 네덜란드(1660년), 그리고 영국(1796년)에 의해 약 450년 동안 일부 혹은 전체가 식민지배를 당했다. 초강대국의 국가적 열망과 지역강대국에 견주어 현재의 지정학적 신세계의 질서는 이 나라에 대한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고 있으며, 한때 “인도양의 진주”라고도 불렸다.

북부 실론인 자프나(LTTE : 현재 실질적 통치)지역에 소수 타밀족의 작은 왕국이 존재했으나 포르투갈의 침략 후 자프나 왕국과 서부 콧뜨 왕국은 포르투갈의 종주국이 되었다. 유일한 독립 왕국은 동부지역을 포함, 구릉지대인 캔디 왕국이었다.

실론을 통치하기 위한 마지막 서구세력이었던 영국은 동인도회사라는 관리자를 통해 통치했다. 캔디 왕국의 토착민들은 1815년 캔디안 협약으로 영국에 양도될 때까지 연해주를 관리했다. 그 후 실론은 헌법 개혁에 대한 왕립위원회에 의해 다양한 자치정부를 가진 통일된 나라로 존재했고, 1944년 실론의 헌법 검토를 위해 영국에서 파견된 소울뷰리 위원회에 의해 1947년 서구형식의 의회 및 내각제도가 설립되었다.

전체 인구 중 싱할라족이 74%, 불교도가 70%

스리랑카는 다양한 공동체와 인종그룹, 그리고 종교가 존재한다. 전체인구는 약 1,946만 명(2004년 인구조사 결과)으로 싱할라족 74%, 자프나 타밀족 12%, 무슬림 7%, 남부 인도계 타밀족 5%와 식민시대 후손들로 이루어졌다. 종교는 불교 70%, 힌두교 15%, 무슬림 7%, 기독교와 카톨릭이 8%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의 보통법이 모든 사회에 적용된 반면, 각 공동체는 고유의 특별법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연해주의 대다수 싱할라족은 로마-네덜란드 법, 자프나 타밀족은 데사발라마이, 동부 무슬림지역은 무쿠와 법, 반면 중앙 구릉지대의 캔디 싱할라족은 캔디언 법을 사법(私法)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다양한 공동체와 언어, 인종, 특별법들은 1948년 영국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평화롭게 공존했다. 영국 식민지배 당시에는 많은 수의 타밀족이 싱할라족보다 정치나 행정 등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독립 후 북부지역에 지지기반을 두고, 타밀 공동체의 상위층이자 엘리트들로 구성된 타밀의회는 50/50의 정치권력을 요구하고 나섰고, 1948년 인도-파키스탄 시민법, 1949년 의원 선거법(개정)은 인도 남부 타밀족을 무국적자로 만들었다.

타밀 공동체에 대한 차별과 함께 시작된 인종분쟁

싱할라족과 타밀족의 근본적인 차별은 1956년 SWRD 반다라나이케(현재 대통령의 부친)가 선거 공약으로 내 걸었던 ‘싱할라의 단일공식언어법안’이 통과된 후 당시 전 인구의 8%였던 자프나 타밀 공동체에 대한 차별은 점점 심화됐다. 스리랑카의 타밀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인종분쟁으로 대두되었고, 북동부지역에 거주하는 싱할라족과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정기적인 인종청소의 극악한 형태가 나타났다. 현재 타밀엘람의 분리국가를 위해 인도에서 훈련받은 무장 단체인 LTTE에 의해 스리랑카 북동부는 국제적인 분쟁지역이 되었다.

반면, 중앙·서부·남부를 싱할라족이 통치하던 중, 1969년 남부지역에서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지향하는 인민해방전선(JVP)을 탄생시켰다. 당시 26살의 JVP의 지도자는 몇차례 무장봉기로 체포 후 석방됐다. 그는 석방된 후 지하활동을 벌이다 수배 중 총격전으로 사망했다. JVP는 당시 유행하는 반군 노선에 이끌렸고 당시 성공적으로 쿠바혁명을 이끌었던 체게바라의 혁명사상을 지향했다. 1970년 7월 선거시, 반다라나이케는 사회주의정당을 이끌며 전통 맑스주의당, 트로츠키와 모스크바 공산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했고 JVP당 또한 이를 지지했으나, 선거기간 중 이 연합정부는 JVP에 대한 우려를 표출했다. 이에 반기를 든 JVP당은 국가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1일 혁명을 준비했고, 1971년 4월 5일 저녁에 예정되었던 경찰서 습격 및 무기탈취 계획은 한 그룹이 당일 새벽에 감행한 습격을 계기로 정부가 비상사태를 발령했다. 일부 지역에 70여 개의 경찰서를

공격·무장했으나 곧 포기하고 정글로 퇴각했고, 정부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전통맑스주의자와 연합정부가 JVP 무참히 억압, 수천명의 젊은이가 죽거나 실종

국가 비상사태로 봉기는 짧은 시간 안에 무력화되었으나 전통 맑스주의자와 연합정부는 무참히 억압했다. 비상사태는 정부의 합법통치기간 외 2년 더 지속되면서 수만,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죽거나 실종됐고 많은 이들이 불법 체포되어 재판 없이 감금되었다. 이러한 국가 행태에 대해 국제사면위원회가 조사단을 파견하고 증거를 수집하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 최초의 공화국 헌법이 1948년의 소울뷰리 헌법을 대체하면서 혁명 실패와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정부 개혁에 대한 늑장대응은 1977년 선거에서 통일국민당(UNP)에게 권력을 내주는 결과를 양산했다. 새로 집권한 UNP는 JVP를 풀어주었고, JVP는 다가오는 1983년 의원선거 출마를 위해 조직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1978년, 2차 공화국헌법이 제정됐으며 UNP는 1982년 선거가 아닌 조작된 국민투표를 통해 6년의 임기가 연장됐고 이는 국민투표를 격렬히 반대한 JVP가 지하활동을 재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식민지하 동남아시아에서 해군의 요충지인 스리랑카의 동부지역인 트링코말리는 스리랑카의 독립 후 그 사용이 폐기됐다. 1977년 탄생한 UNP정권은 미군에게 이 지역 대여를 통한 이익을 노렸으나 실패에 돌아갔다. 이러한 노력은 미국에 비우호적인 인도의 분노를 일으켰다. 인도는 비우호적인 주변국(스리랑카)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프나 지역의 젊은 반란자들의 재정을 지원하면서 훈련과 무장시켰다. 해결되지 않은 타밀언어 문제와 더불어 북부지역에서는 게릴라 활동이 전개되는 동안 정부는, 1979년 테러방지법 같은 매우 엄격한 법을 제정하여 경찰과 치안부대에 혐의나 재판 없이 용의자를 18개월 동안 억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검은 7월(BLACK JULY)’사태, 수천 명의 타밀족 사망

자야와르데네 정부는 북부에 불안정한 요인을 평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 거의 모든 북부 반란자들을 격퇴할 무렵 인도는 타밀족을 구하기 위한 명목으로 이 내전에 개입했고 7만 5천 명의 ‘인도평화유지군’을 파견, 북동부지역의 통치권 이전을 위한 인도-스리랑카 협정체결을 강제했다. 인도는 북부지방의 게릴라의 무력화와 평화복구를 떠맡게 되었다. LTTE도 최초 이 협정에 동의했으나 이에 반대했다. 한때 그들이 무장시킨 타밀 젊은이들을 무력화하기 위한 인도의 노력은 결국 실패했다. 현재 무장한 엘람조직 구성원 절반이 인도에서 훈련받았고 이들은 조직 간의 싸움을, 그리고 북동부지역에서 분리국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

조작된 투표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자야와르데네 정권은 국가가 지지하는 전례없는 폭력을 양산했다. 1983년 7월 북부 티나벨리에서 13명의 싱할라족 군인의 죽음은 감옥에서 타밀 수감자들의 죽음을 초래했고, 사회에서는 수많은 타밀족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인종적 유혈사태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검은 7월(BLACK JULY)’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검은 7월’은 싱할라족들의 분노에 의해 결국 수천 명의 타밀족의 목숨을 앗아갔고, 시신뿐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게와 집을 태우면서 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당시 경찰과 치안부대는 이러한 유혈사태를 막기는 커녕 방조했다. 이 ‘검은 7월’은 다시 국가비상사태를 정당화했으며 모든 정당활동금지, 헌법개정을 통해 의회 지위의 초법적인 권한 위임을 가능케 했다.

정부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수십, 수만의 젊은이들 실종 사건 집중 발생

상황은 더 악화되어 군대는 북부와 동부지역에 내전으로 싸우고 있는 동안 국가가 창설한 경찰, 준군사부대 그리고 다른 특수무장그룹은 남부에서 JVP들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1987년 대통령 자야와르데네는 “죽이고, 죽여라. 모든 야수를 죽여라.”고 공공연히 치안부대에 명령했고 그의 명령과 사형집행인으로서의 범죄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켰다. 초법적 살인, 고문, 사체유기등이 지속되었고 인신보호권리 신청자를 변론한 변호사들도 국가 암살자에게 살해되었다. 수십 명의 변호사들이 암살당했고, 40여명의 변호사들이 나라를 떠났다. 이러한 폭력에 책임이 있는 여러 살인집단이 거론되고 있으며, 국제사면위원회는 사망자수가 약 4만 여명, 유럽의회는 약 6만 5천 명으로 추정하나 그 정확한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스리랑카의 실종문제는 하나의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나지도 않았고, 그 시간적 흐름은 동일선상에 있지도 않은 문제이다. 수십, 수만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실종 사건의 본질은 물론 정부군과 북동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LTTE간의 무력분쟁으로 일어난 실종문제도 있지만, 정부군이 실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역, 특히 남부 지역에 그 문제가 집중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문정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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