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5월 2004-04-29   4335

[인터뷰] 송두율 교수 부인 정정희 씨

“싸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조국”

지난 3월 30일 송두율 교수에 대한 1심 재판 결과가 나왔다. 징역 7년. 애초 구형된 15년에 비해 형량이 낮아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에게 지워진 굴레가 너무 무겁다. 송 교수의 자발적 귀국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 송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 과정은 우리에게 국가보안법으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준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송 교수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야만적인 냉전 질서와 후진적인 한국사회에 의해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멍이 든 정정희 씨를 만나보았다.

“상상 못했어요, 이렇게 되리라곤…”

– 무겁지만 송두율 교수님에 대한 1심 선고 얘기부터 여쭤야 할 것 같습니다. 송 교수님의 오랜 지인인 서강대 박호성 교수는 이번 선고에 대해 “조국을 찾지 못하며 해외에서 보낸 37년에 7년을 덧붙인 것이니, 결국 44년 징역형을 선고한 셈이다”라고 하시던데요.

“기가 막힙니다. 40년 가까이 외국에서 살다 어렵게 조국 땅을 밟았는데 이런 일을 당하게 되다니…. 저도 오고 싶었지만 솔직히 저보다도 남편이 더 민주화된 조국을 보고 싶어했어요. 언젠가는 갈 수 있겠지 하는 희망으로 독일에서 민주화운동 하면서 힘든 걸 견뎠는데, 막상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마주하게 되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요.”

– 작년 9월22일 귀국했을 때 이런 결과를 예상하진 않았을 거 같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시지 않는지요?

“글쎄요. 일이 이렇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죠. 솔직한 심정은, 정말 조금이라도 짐작했다면 아마 공항에서 되돌아갔을 겁니다. 그동안 아이들도 무척 한국에 오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와 함께 가겠다고 계속 미루어두고 있었지요.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하려고 교장 추천서를 받는 걸 보면서 부모로서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초청이 그동안 아이들에게 진 빚을 갚는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물기 힘든 상처만 준 셈입니다.”

– 항상 아드님이 선생님 곁에서 동행하시던데요. 송 교수님의 청년시절 모습을 연상케하는 게, 어머니의 속상함을 위로할 만큼 성숙해 보이기도 하고요.

“네. 정말 아이들이 우리 곁을 지켜주고, 위로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견뎠겠는가 싶어요. 제가 4월 12일에 먼저 독일로 돌아가는데 아버지 혼자 하루 한시간, 일분도 힘든 그런 감옥에 놔두고 떠날 수 없다며 자기는 1주일이라도 더 있다 가겠다고 합니다. 얼마 전 있었던 외신 기자회견 후 신변위협도 받고 있어서 불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너무 속상해요.”

“민주화된 조국은 없었어요”

– 이번 사건은 한 개인이 어찌 해 볼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선생님 가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의 몫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시대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고통을 제대로 나눠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죠.

“우리가 유신 때부터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감옥생활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루 한 시간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송 교수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진영 일각에서는 송 교수가 노동당 입당 문제나 북한과의 연계사실들에 대해 입국 전후에 민주진영과 공유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다. 전향서를 쓰는 송 교수의 태도에 대해 아쉬워하는 지적도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송 교수가 몇몇 사실들에 대해 말을 바꾸는 등의 변수들이 생기면서 결과적으로 송 교수를 옹호해왔던 시민사회진영의 적극적 대응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정희 씨는 지면에 옮기지 못할 여러 정황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동안 쉽게 표현하지 못했던 불편한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기도 했다.

– 송 교수님의 귀국이 담고 있는 의미나 상징성이 무척 크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의 반응은 너무 시대착오적이었습니다. 방향도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요. 송 교수님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서 느끼신 점이 많으실 텐데요.

“우리 사회가 많이 민주화 됐다지만, 우리가 상상했던 민주화된 조국은 아니었어요 양심적 철학자인 제 남편을 역대에 없는 간첩이라고 낙인찍고 사회가 떠들썩하도록 난리를 치는데…. 한 인간이 설사 간첩이었다 하더라도 사람 하나로 이 사회가 전복될 정도로 그렇게 대한민국의 토대가 약한 것인지 궁금해요. 자신들이 약하고 성숙하지 못하니까 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고 짓밟는 거 아닌가요? 정말 얼마나 난리를 쳤어요?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우리가 겪은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지만, 이 고통이 정말 우리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민주화되었다고 믿고 있었던 이 사회가 정말 민주화되었는지를 반추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악몽의 연속과도 같은 이 고통을 다음 세대까지 물려줄 수는 없으니까요.”

“독일에서 또 싸워야죠”

송두율 교수 사건의 무게와 파장이 엄청난데다가, 정정희 씨 스스로 송 교수와 두 아들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어 항상 ‘우리’의 이름으로 이야기했기에, 그의 개인적인 생활과 내면을 읽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송두율 교수의 부인으로만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에 사소한 질문을 몇 가지 던져보았다.

– 송 교수를 독일에 유학 가서 만나신 거죠?

“예. 재미난 얘기 하나 하면 결혼할 때 양쪽 집안 모두가 반대했어요. 그런데 집에서 반대한다는 사실을 서로 말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야 알게 됐지요. 시아버님이 결혼에 반대하신다며 남편에게 보낸 편지를 우연히 책 속에서 발견했는데, 글쎄 결혼 반대사유를 열거하면서 자를 대고 정확히 줄까지 그어 놓으셨더라고요. 저희 집에서는 송 교수 전공이 철학인데다 사진을 보니 인상이 너무 차가워서 여자 고생시키겠다는 생각을 하셨나봐요.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반대하신 거죠.”

– 지금 대학도서관에서 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베를린예술종합대학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어요. 독일에서는 전문직인데, 한국에서는 사서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좀 낮은 것 같아요. 송 교수 면회 갔을 때 직업을 사서라고 썼더니, 같이 간 교수분이 대학교 직원이라고 쓰라고 하시더라고요. 사서가 뭔지 모른다면서요. 제가 일하는 학교가 예술대학이기 때문에 다른 종합대학에 비해 좀 특이한 분위기가 있어요. 예술이란 게 창조하는 일이다 보니까 까다롭고 힘든 사람도 있지만, 저는 그 분위기가 참 좋아요.

– 70년대에 민족사업건설협의회 건설 등 송 교수님과 민주화운동을 같이 하시다가, 나중에는 자녀와 가정 등의 문제 때문에 사회운동에는 조금 거리를 두었다고 하셨는데, 그럼 완전히 접으신 건가요?

“제가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아이들 다니는 학교 학부모대표를 했는데요. 그것도 일종의 사회활동이죠. 독일에서 학부모대표를 하면 모든 교직원회의에 참여할 수 있어요. 독일 학제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는데, 저한테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첫째 준이가 독일에서 학교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만 6살 때부터 느끼더라고요.”

– 독일로 돌아가신 이후에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나요?

“독일사회에 남편 문제에 대한 여론을 확산시키고, 석방운동 등 캠페인을 전개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선 직장문제를 해결해야죠. 학교에서 많은 배려를 해줘서 지금까지도 적을 두고 있지만, 남편이 힘들 때에 옆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악의 경우 휴직을 고민 중입니다.”

“한국사회에선 싸우지 않고선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정정희씨는 독일에서 또 다시 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투쟁은 계속 된다!(Lotta Continua!)”고 외치던 송두율 교수의 짧은 한 마디처럼 말이다. 남편 때문에 내딛게 된 걸음걸이지만,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향한 그의 행보는 이제 남편의 몫까지 넉넉히 품어 안고 있다.

<편집자주>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5월호에 실린 글로, 정정희 씨는 이 인터뷰 사흘 뒤인 4월 12일 독일로 돌아갔다.

박영선(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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