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0월 2004-10-01   821

인류의 범죄와 우매와 불행의 기록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현재 뿐 아니라 후세대에게 동일한 역사적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하는 중요한 흔적이다. 때문에 과거사청산이 시작되면 수구기득권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뒤틀려진 한국의 근.현대사 바로잡기 작업이 우선순위가 될 것이다.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우리 역사의 거짓과 왜곡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편집자주

어느 나라나 대개 국민소득 2000~5000달러 정도에 이르면 독서계에서는 전기류(傳記類)와 추리 탐정소설이 성행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예외였다. 이상하게 지금도 이 두 분야는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

왜 그럴까? 너무나 뻔한 이유가 있다. 전기물은 그 사회가 존경할만한 인물이 많아야 매력있는 읽을거리가 될 수 있으며, 추리 탐정소설은 어떤 간교한 범죄도 결국은 들통나고 만다는 정의의 승리를 기본 구조로 삼고 있기에 정의는 이긴다는 사회풍조라야 인기가 있다.

우리나라는 유명인은 많으나 존경할 인물은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연세가 높다고 원로가 되는 건 아니다. 존경할만한 인물이 적은 사회란 바로 정의감이 흐릿한 사회다. 변절과 타락이 출세의 지름길인 사회에서는 정의감을 조장시키는 추리문학이 성행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과거사 청산이란 권장할만한 전기물도, 정의감을 북돋아 줄 추리물도 변변히 없다는 허전함에서 비롯한다. 좬로마제국 쇠망사좭를 쓴 에드워드 기본은 “인류의 범죄와 우매와 불행의 기록”이 곧 역사라고 했다. 결국 그런 역사로 흘렀던 로마가 멸망의 길로 들어섰음을 그는 객관적으로 찬찬히 보여주었는데, 바로 우리 역사를 대변해 주는 듯하다.

더 끔찍한 사실은 그런 범죄와 우매와 불행의 역사를 영광과 위대성과 영웅으로 둔갑시켜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대중들에게 선전하거나, 아예 역사교과서를 통해 교육시키는 경우다. 너무나 가짜가 범람하는 시대라 그 엉터리 역사를 다 살필 겨를은 없으니 가장 카리스마가 강한 두 전직 대통령만 잠깐 되돌아보자.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리승만 정권

우리 세대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리승만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에 뒤지지 않는 위대한 ‘국부’로 세뇌 당하면서 자랐다. 그가 좬독립정신좭이란 저서에서 의병투쟁의 열기가 높았던 민족적 여론 앞에다 한일 조약의 기본 뜻을 오해한 것이라는 문구를 썼다거나, 미국 망명 중 재미 동포들을 분열시켜 자신을 반대하는 독립투사들을 빨갱이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방법으로 외교청원 노선(강대국 특히 미국이 일본에다 조선을 독립시켜 주라는 압력을 넣어달라고 미 대통령에게 외교와 청원운동을 전개하자는 주장)을 고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강경 투쟁론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은 사실 등등을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된 뒤 재야 사학자들의 글을 통해서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16년간 엄청난 돈을 갖다 바쳤지만 우리 역사를 올바로 가르쳐 준 스승은 하나도 없었다.

1945년 8.15 이후 리승만은 명망있는 해외 망명객 중 미국의 주선으로 제일 먼저 귀국해 언론을 타고 한껏 명성을 높였다. 미국은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투쟁을 했던 어떤 단체나 기구도 인정치 않는 입장(오늘의 이라크 사태와 너무나 닮았다)이었다. 이미 나라 밖에는 우리의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한국 정부의 모체인 임시정부가 있었고, 국내에서는 국민적 신망을 받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실질적인 통치기구로서 행정을 일괄해 처리하고 있었다. 임정이 귀국해 건준과 손을 잡으면 한국은 그대로 독립국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 미국은 오늘의 이라크에게 하듯이 친미 정권을 창출하고자 온갖 술수를 다 썼다. 건준을 불법단체로 지목해 탄압.해체시켰고, 김구 주석은 리승만 보다 한 달 늦게, 그나마도 임정의 주석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시켰다.

해방전후사 연구가들은 이 때 미국이 한반도 정책에 대한 일관된 시나리오나 사전 각본이 없었다고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반 통일 분단 고착화, 미국의 이익에 위배되는 민족적인 지도자가 아닌 친미 정권, 말썽 많은 민주적인 정권이 아닌 독재체제를 굳히려고 한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만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리승만 대통령 만들기 첫 단계는 관제(官製) ‘빨갱이’대량생산 작업이었다. 친일파 청산과, 범민족 통일, 독립, 민주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세력에게 ‘빨갱이’란 딱지를 붙여 투옥, 테러, 위협을 가했다. 인권이란 단어가 존재할 수 있었던가! 더 알고 싶으면 오늘의 이라크 사태에 대한 외신기사를 보면 된다. 국토와 기후 조건과 무기와 등장인물이 다를 뿐이지 그 강압통치 원리에는 변함이 없다. 이라크 국민들의 눈물겨운 저항운동을 보노라면 8.15 해방 직후 우리의 처지를 연상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쿠데타로 민주주의 뒤엎은 군사독재 정권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해 강행했던 많은 사건들을 일일이 거론할 지면은 없으니 생략하겠다. 그러나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비극은 상기하도록 하자. 바로 1946년 대구 10.1사건과 1948년의 제주 4.3사건, 그리고 같은 해의 여순사건이다. 단독정부수립 전후의 3대사건인 이 비극은 분단시대 민족사의 미래를 예견하는 풍향계였다.

대구 10.1사건은 광복 후에도 여전히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데다 미 점령군의 횡포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낸 최초의 민중적 항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했던 친형 박상희를 비롯한 많은 희생자를 냈는데, 얼마나 억울했으면 박정희가 형의 원수를 갚고자 좌익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을까. 과거사 청산이 지금 일부 목소리 큰 사건만을 다루는 데 필자는 반대한다. 다룰 대상은 앞으로 만들어질 위원회에 일임하고 일단 조사 기구만을 법률적으로 구성해야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리승만의 각종 비리와 실정과 죄악상은 비교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을 정도가 아니라 친일행위에 대해서조차도 옹호하려는 주장이 있을 정도다. 그는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할 때 조건이 안 돼 응시조차 못할 형편이어서 일본에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까지 썼다는 사실은 여러 저서에서 이미 밝혀져 있다. 일본군으로 출세하려던 꿈이 좌절된 8.15해방 후 그는 패잔병으로 귀국, 육사에 입교했는데, 생도시절에 친형을 10.1사건으로 잃고 남로당 군사부에서 적극 활약하다가 피체, 여러 이유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박정희가 리승만 독재체제 아래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그나마 일말의 모래알 같은 할말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4월혁명으로 민주정권이 들어선 상태에서, 가장 민주주의적이었던 정권을 뒤엎은 쿠데타는 용납해서는 안될 세계사적인 죄악이 될 것이다.

나는 과거사 청산 중 가장 깊히 냉혹하고 엄격하게 다뤄져야 할 대목은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반정부세력 단체를 구성해 사회혼란을 조성한 쿠데타라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범죄에 앞서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 행위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과거사 청산은 희생자의 한풀이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역사 바로 세우기이자 국가적 정체성 찾기이며, 세계화 시대의 민족적 자존심 회복의 차원에서 국민적 공감대 위에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임헌영 참여사회아카데미 원장,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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