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1월 2004-01-01   3102

[서평] ‘문화의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 한길사

과학적 객관성으로 풀어보는 인류문화


반구대 암각화의 그림은 총 290여 점이 넘는다.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을 암석에는 고래, 호랑이, 사슴, 돼지, 소, 사람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바다짐승과 뭍짐승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그 모형은 언뜻 보면 마치 만화의 밑그림 같기도 하고 또는 무슨 조립식 모형 장남감의 도면 같기도 하다. 1971년에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대략 3000년 전에서 1500년 전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연대 추정을 두고 누군가는 상상력의 부족을 들었다. 라스코 동굴의 벽화를 1만7000여 년 전의 것으로 얘기하는 유럽인들에 비해서 3000년은 너무 소박하다는 말일 터이다. 이 바위그림들은 언제 그려진 것일까? 왜 우리의 선조들은 바위에다 이런 그림들을 새겨 넣었을까?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고 그 시간의 거리가 감추고 있는 비밀에 한 뼘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손과 눈으로 감각하면서 체험하는 것은 시간과 무관한 무언가를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것은 아쉽게도 물이 마르는 가뭄 때가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 반구대 암각화는 근처의 댐 때문에 거의 일 년 내내 물에 잠겨있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나는 거의 박물관에 가지 않는다. 흐르는 시간을 애써 붙잡아 두려는 시도 같아 마음이 영 불편하기도 하고, 생활이라는 실체가 박물관이라는 유형의 공간 속에서 아무리 애써 봤자 그 원래의 진실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축에 내가 속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연출된 생활이고 해석된 문화일 뿐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결벽증이려나. 시간 속에서 저절로 마모되거나 스러진다한들 모든 유한한 존재의 당연한 운명, 애써 지킨다거나 보존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을 거스르려는 인간 욕망의 고상한 변명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몰역사적인 편견이라고 비웃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좀 다른 의미에서 기분이 상한다. 라스코 동굴의 발견보다 덜 극적인 발견 일화 때문도 아니고 상상력의 부족에서 오는 민족적 콤플렉스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물속에 잠겨서 마모되고 스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지형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인위적인 댐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조금은 서글픈 그 어떤 것 때문이라고만 해두자.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는 이즈음에 집어든 책이다. 책은 1975년에 쓰여졌고 우리나라에선 1982년에 번역되어 나왔으니 이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읽었을 법하다.

원제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 :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알 수 있듯 책은 우리에게 생소한 암소숭배와 돼지숭배 및 혐오 그리고 부족간 전쟁의 원인과 결과, 메시아니즘과 마녀사냥이 함축하고 있는 생태학적, 역사적 제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각각의 문화가 표면에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진실을 그 속에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삶의 진실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사회단위가 신성시하는 것과 금기시하는 것, 전설과 신화 등의 문화 현상을 문화생태학적인 측면에서부터 경제,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통합적으로 고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세 때 휘몰아쳤던 마녀사냥을 예로 들어보자. 마녀가 실제 존재했든 그렇지 않았든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타락과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그것은 유효적절한 방패 구실을 했다. 가뭄이 들거나 병이 들거나 빵값이 올라도 마녀가 술수를 부린 것으로 하면 되었다. 공포와 고립을 통해 교회와 지배자들은 위협적인 메시아니즘의 발흥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힌두교도들의 암소 숭배는 어떤가? 인도 농부들이 굶주리면서도 암소를 잡아먹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자연환경뿐 아니라 경제구조, 인구분포 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는 암소숭배가 인간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낭비나 나태가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는 저에너지 생태계 속에서 인간이 지속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에너지 소비량과 에너지 산출량을 연구한 결과 인도는 미국보다 더 효과적으로 소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용하면서 산업화된 국가에서 누리고 있는 높은 생활수준은 높은 생산효율성의 결과가 아니고 1인당 사용가능한 에너지량이 급격히 증가된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진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단순한 수치의 장난이거나 유한한 자원을 축으로 벌이는 제로섬 게임의 일측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직면하게 된다.

최근의 반문화운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근저에서 과학문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불평등과 착취를 심화시키지 않고 완화시키려면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를 대중들이 더욱 알 수 없게 만들 뿐이라고 단언한다. 저자는 흔히 우리가 ‘원시적이다’ 혹은 ‘야만적이다’라고 하는 전쟁, 남녀차별, 고문, 억압 등이 실은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좀더 고도로 은폐되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는다. 마빈 해리스가 간파하는 진실이란, 전역사에 걸쳐 혹은 전 인류에 걸쳐 존재하는 문화양식이란 더 낫고 덜한 것이라는 이분법적이고 단순한 도식으로가 아니라 다양한 영역의 과학적인 객관성에 기초하여 설명하고 이해해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궁극으로 바라는 것은 일상의 의식을 ‘비신화하려 애씀으로써 평화와 정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전망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 대해 건강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야노마모족 부락에서 끊이지 않는 분열과 전쟁을 단순히 그들이 호전적인 부족이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만다면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여전히 불가항력적이고 통제불능한 것이라는 절망적 인식에 도달하고 말 것이며 더 나은 세상이란 있을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더욱 울림이 크다.

흔히 서구인들에 의해 기술된 역사가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씌여진 것이라 기술 대상인 문화 향유자들의 본질에서 벗어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그 점에서는 다행이 이 책은 최대한 객관적인(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시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생각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화적 불가지론에 빠질 위험을 과학적 객관성으로 방어할 것을 역설하고 있기까지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이란, 과학 기술이라는 물질적 측면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것쯤은 현명한 독자들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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