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11월 2003-11-01   1771

그래도 결국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세상의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배우 권해효

어린 시절, 최루탄이 꽃가루처럼 흩날리는 교정에서 눈물을 삼키며 읽었던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그로부터 근 이십 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기나긴 항소이유서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네크라소프의 싯귀로 끝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이라던 표현도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배우 권해효는 노여움이 많은 사람이다. 인사동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말했다. “술 한 잔 해야죠.” 바로 그날 정부의 파병결정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파병을 결정한 것은 바로 권해효가 공인으로서 자신을 내걸고 지지했던 노무현 정부였다. 그래서 그의 술맛은 더욱 씁쓸했을 것이다. “역사는 반성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60년대 베트남 파병을 겪어놓고 반성도 없이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게 정말 속상합니다.” 한국전과 월남전에 참여한 그의 아버지는 각별히 사랑했던 둘째 아들 권해효가 육사에 가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길 정도로 철저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정치군인’의 기질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버지는 10월유신과 10·26사태을 거치며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반군으로 몰려 권해효가 중학교 2년생 때 예편했다. 어릴 때 꿈이 군인이었던 그가 고등학교 시절 문예부에 들어가고 배우가 된 것 또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단순히 군인이어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절망이 군인의 꿈을 접게 한 것이다.

화곡동에서 우이동까지, 변두리 떠도는 인생

권해효는 화곡동에서 삼십 년 가까이 살았다. 언덕을 중심으로 단독주택들이 늘어선 화곡동은 그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실질적인 고향이다. 결혼한 후에도 부모님 댁의 옥탑방에 기거하던 그는 대학로의 아파트에서 6개월을 살았다. 그리고 우이동 빌라로 옮겨 현재까지 살고 있다. 화곡동에서 대학로, 그리고 우이동으로 이어지는 삶의 궤적은 인간 권해효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아파트에서 산 게 평생 6개월입니다. 말하자면 고층 아파트나 강남의 편리함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죠. 변두리를 떠돈 인생인 셈인데, 몰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저는 화곡동이나 우이동이 좋습니다.” 우이동에 산다 하면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가, 교통 불편한 데서 어떻게 사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도심의 꽉 막힌 도로를 보면 숨이 막힌다고 한다. “대학로에서 6개월 전세 살다가 피해를 보는 바람에 우이동 집을 사기는 했지만, 저나 아내나 집을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집을 소유하게 되는 순간, 인생의 많은 자유가 사라진다고 생각했거든요. 비싼 집 살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가족과 함께 여행 다니고, 오늘을 자유롭게 누리자는 게 우리 가족의 생각입니다.”

처음 이사 와서 몇 년 간 우이동은 권해효 가족의 천국이었다. 아침에는 새 소리에 잠을 깨고, 집 너머로는 푸른 솔숲이 펼쳐져 있고, 때로는 청솔모가 베란다까지 진출했단다. 그러나 요즘에는 미아리고 삼양동이고 가릴 것 없이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는 바람에 그의 기쁨이 하나씩 줄어들고 있다. 우이동 골짜기까지도 고층 아파트를 짓느라 아침저녁 뚝딱거리는 소리가 숨가쁘다. 주변에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면 덩달아 집값이 오를 테니 좋아할 만도 하련만 그는 북한산의 전망을 팔아서 재산권을 지키려는 태도에 화가 치민다고 한다.

“돈보다 우선시해야 되는 가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가치를 지켜주는 것도 국가의 존재 이유죠.”

그는 그렇게 세상의 가치를 거슬러 오르는 사람이다. 단독주택이나 빌라보다 고층 아파트를 선호하고, 어떻게든 강남으로 옮겨가고 싶어 하며, 이도저도 안 되는 사람이라면 ‘로또’라도 당첨돼 돈벼락을 맞고 싶어 하는 21세기 한국에서, 돈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무엇인가를 꿈꾸는 권해효, 그가 그리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그가 꿈꾸는 세상은?

안티조선운동, 호주제 폐지, 평등가족만들기 홍보대사, 의약품지원본부 홍보대사, 양심수 석방운동, 학원 자주화, 사학비리 척결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가 참여하는 활동은 종횡무진 숨가쁘다. 대체 그가 원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의 대답 역시 간단했다.

“차별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따지고 보면 배우가 아닌 자연인 권해효로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든 일들은 차별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자라는,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돈이 없다는, 장애자라는, 못 배웠다는, 혹은 성적 정체성이 다르다는, 별의별 이유로 차별이 행해지고 있다. 그 모든 차별에 권해효는 분노한다. 그런데 왜? 원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기득권층의 여유를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이고, 배우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 속에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권해효는 이 질문에 이미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므로, 그리고 배우이기 이전에 생활인이고 시민이므로.”

그가 민주주의의 상식으로 통하는 다수결의 원칙에 대해 딴죽 거는 일 역시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그의 신념과 맞닿아 있다. 다수결의 원칙에는 다수에 속하지 않은 자에 대한 배타적 의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수가 아닌 사람들도 소외받지 않는, 아니 조금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무조건 소수를 반영하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차별의식이란 생활 속에서 은연중에 스며드는 것임을 아는 까닭에 그는 아이들 교육에도 민감하다.

어느 날 함께 미국 프로 야구를 보던 큰 아이가 소리쳤다. “야. 검둥이다!” 검둥이는 나쁜 말이고, 그런 말을 쓰면 나쁜 사람이라고 하자 아이의 입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것은, “그럼 할머니도 나쁜 사람이야”라는 것이었다. 권해효는 아이들 앞에서 가급적이면 좋다, 나쁘다는 이분법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재밌다, 멋있다고 말한다. 그는 최근, 9년 동안 타던 무쏘 자동차를 버리고 랜드로바를 구입했다. 새 차를 사서 그런지 아이는 몇 번이나 다른 차가 우리 차보다 싼지, 비싼지를 물었다. ‘내가 좋으면 최고의 차’라는 게 권해효의 대답이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좋고 나쁜 것, 주류와 비주류가 아니라 단지 ‘다름’을 알려주고 싶다. 이 세상은 그 모든 ‘다른 사람’과 ‘다른 것’들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것임을.

1%의 나눔

한 사람의 사고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권해효는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96년 민가협에서 주최한 ‘일일 감옥 체험 행사’를 통해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변영주 감독과의 인연으로 그는 그날 0.75평짜리 감옥에서 하루를 보냈다. 연극무대도 아니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민가협 어머니들이 그의 손을 붙잡고 “내 새끼, 내 새끼”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날의 그 막막하고 답답하고 어색한 느낌에서 모든 것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사건은 다만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뿐일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를테면 그날의 사건은 비등점 같은 게 아니었을까? 같은 시대를 보낸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대학시절이 궁금했다. 그가 대학시절 남 앞에 나서는 게 싫은 수줍은 성격이라 돌 한 번 던져보지 못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묻고 싶었다. 80년대에 어떻게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겠냐는 말끝에 그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매판자본에 흥분하던 선배가 술사겠다며 싸구려 술집에 데려가 놓고는 술값 낼 때쯤 슬그머니 사라져버리고. 그런 것에 실망하고 뭐 그랬죠. 그리고 그냥 마음의 지지나 보낸 정도라고 할까?”

무엇이 배우 권해효를 사회운동으로 뛰어들게 했는지 나는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대학시절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역사와 정의에 대한 고민을 나름대로 했을 것이고, 그때의 고민들 역시 오늘의 그를 만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깊은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운동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배우라는 것 때문에 더 두드러지게 느껴질 뿐이지 이런 정도의 사회참여는 누구라도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난 척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성질이 급하니까 열 받는 게 많을 뿐이죠.”

그리고 권해효는 이만큼이라도 하는 것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1%의 나눔이라고 믿는다.

“호주제 폐지운동은 통일운동이다”

권해효는 호주제 폐지 문제 위주로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문에 인터뷰에 응한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을 한국 사회 보통의 남자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아들이 61개월, 딸이 16개월 되었다고 밝혔을 때,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는 큰 아이의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다고 했을 때, 그가 페미니스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보통 남자들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이렇게 예쁜 딸애가 얼굴도 모르는 시아버지 호적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참 우스운 일”이라고 말했다.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그에게는 호주제 폐지운동이 통일운동으로 연결된다. 통일은 남북한의 차별을 없애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통일비용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야박함에도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북한에 지원한 돈은 국민 1인당 3,400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독이 동독에 지원한 액수의 고작 3.4%에 불과하죠.”

배우인 그는 늘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직업적 활동가가 아닌 이상 그는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원칙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다고 한다. 첫째는 스스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 둘째는 어떤 일정이든 배우로서의 일을 우선시한다는 것. 그는 자신의 연기를 통해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힘든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배우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대중적인 배우로 산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며 사는 배우도 있고, 생활인, 직업인으로 고민하고 살아가는 배우도 있죠. 또 내가 이 따위 연기하려고 살았나, 늘 자괴감을 느끼며 사는 배우도 있습니다.”

권해효는 세 번째 부류의 배우였다고 스스로 털어놓는다. 트렌디 드라마에 흥행영화 일색인 한국 풍토에서 그런 고민에 휩싸일 법도 하다. 그러나 그는 얼마 전부터 그게 과연 옳은 일인가 고민하기 시작했고,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려 노력하고 있다. 경력이 쌓인 덕분에 현장에서 조금은 자기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그의 말대로 한국에서 변화라는 건 그렇게 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편안한 연기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그의 진지한 성찰과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는 연기도 언젠가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말이죠. 권해효 씨의 이러한 사회적 실천들이 현실화 될 것으로 믿으십니까?”

“아니오.”

“그런데 왜 발 아프게 목 아프게 외치고 다니십니까?”

“그래도 결국 우리는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이 마지막 대답으로 권해효는 내 마음의 친구가 되었다.

정 지 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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