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7월 2003-07-01   2117

박쾌서 오마도 간척사업 당시 건설대원

‘땅을 뺏긴 게 아니라 희망을 뺏겼어’


1962년 7월에 시작된 오마도 간척사업은 소록도 한센병 치유자들의 사회복귀 노력과 정부의 농토확보 정책이 맞아떨어져 이뤄진 대규모 간척사업이었다. 국가 지원은 거의 없이 소록도병원장과 원생들이 재정착을 바라며 착수했던 거대한 모험은 결국 좌초됐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음하던 한 주인공이 입을 열었다. 편집자 주

뻘이 깊었다.

흙이고 돌이고 다 빨아들였다. 끝없이, 뻘은 원생들을 빨아들였다. 원생들의 땀을, 눈물을, 손가락을 삼켰다. 희망, 원생들의 손이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던 두 글자 단어도 결국 묻혀 버리고 말았다. 깊은 뻘, 먼 시간 아래로.

“참말로 기가 찬 이야기요”

“그 일 생각하믄 참말로 기가 차요. 우리가 명이 징께 아직 안 죽고 사는 거지. 그 이야기 다 할라믄 끝도 없어요.”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한꺼번에 워낙 여러 사람이 말을 해서 내용 파악이 쉽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할 말이 많았고, 들어 줄 사람은 없었다. 지독한 한(恨)이었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저지하기 위한 성직자들의 삼보일배가 한 달을 훌쩍 넘긴 5월 중순, 전북 익산의 금오농장을 찾았다. 이미 40여 년 전에 있었던 또 하나의 간척사업에 대해 듣기 위해서였다. 만약, 이 간척사업이 오늘날 추진된다면 어떻게 대응 혹은 반응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해 보면서.

1962년 7월에 시작된 오마도 간척사업은 소록도 한센병 치유자들의 사회복귀 노력과 정부의 농토확보 정책이 맞아떨어져 이루어진 대규모 간척사업이었다. 정부 정책이었다지만 국가 지원은 거의 없이 소록도병원장과 원생들이 재정착을 바라며 독자적으로 구상하고 착수했던 거대한 모험으로, 공사가 마무리 된 건 88년 12월 30일이었다.

하지만 소록도 원생들의 참여는 64년 7월이 마지막이었다. 끊겨 버린 시간은 원생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잊어버릴만 하믄 드문드문 물으러 오는데, 우린 40년 동안 말만 하다가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한테 다 가고 이제 없어요, 없어.”

한센병력자들의 집단 정착촌인 금오농장에도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올해 86세인 박쾌서 할아버지도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열 살도 안 돼 한센병에 걸린 그는 병원에서 병원으로, 섬에서 정착촌으로 옮겨 다니며 평생을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살았다. 그런 그의 삶에 오마도 간척사업은 짙은 흉터로 남아 있다. 병이 몸 이곳저곳에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우릴 사람으로 안 보는 거지”

경남 밀양이 고향인 박쾌서 할아버지가 소록도에 들어간 건 그가 18세 되던 해였다. 그땐 이미 잘못된 치료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였다. 지금은 감기 정도밖에 안 되는 병이라지만, 그 시절 한센병은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기 어려운 중병이었다.

“열 살 안 돼서 병들었어. 어떻게 걸린 건지는 나도 모르지. 병에 걸리면 첫째는 눈썹이 확 가 버리고 피부에 감각이 없어지거든. 그때는 돌팔이 의사들이 댕기면서 치료한다고 침으로 막 꽂고 그랬어요. 독한 약을 쓰고. 일단 발이 아프다 카면 발에다 독한 약을 넣는데 나스면 카지마는 점점 더 안 좋아지지. 손발이 막 오그라들어. 양잿물도 집어넣으니까 나중에 발을 모두 절단하고. 지금 손발이 약한 사람들은 전부 그때 그 돌팔이 의사들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가 소록도에 들어간 해인 1934년부터 45년 해방되기까지 11년은 가혹한 시간이었다. 섬이었지만 소록도 역시 식민지였고, 환자였지만 그는 식민지 백성이었다. 강제노역은 한 마디로 살인적이었다.

“소록도에서 안 한 것이 없어. 벽돌 구워야지. 가마니 짜야지, 또 금산 가서 나무 해 와야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말이지. 소록도에 있으면 눈 없는 봉사도 가마니를 짜야 돼요. 짜다가 보면 눈이 안 보이니까 손이 훌떡 까지고 피가 벌겋게 나고. 참 이 이야기 다 할라고 하면…. 소록도 6부락에다가 숯공장을 맨들어 놓고 숯을 구워서 내보내고. 지방에서 송탄, 그러니까 관솔가지에서 송진 많이 흐르는 거 그거를 개다가 송탄유 그놈을 냈지(공출했지), 또 피마자 지름 짜 가지고 냈지. 토끼도 잡아다가 냈어요. 껍데기 갖다가 군인들 옷 속에다가 넣는다고. 일이 힘들다고 안 나가면 작업시키는 일본놈들이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댕겨요. 쾅쾅 뚜디리면서. 그래 나가면 웃통을 홀라당 뱃겨요. 뱃겨다가 고갯만대이에 딱 꿇어 앉혀 놔요. 일 끝날 때까지. 그럼 나중에 일어나지도 못해요. 얼어 가꼬. 안 죽을 수가 없어요.”

도주하다 잡힌 원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 가해졌다.

“제일로 중한 범죄는 도주요. 도주자는 잽히면 적게 가야 한 달 이상이고, 많이 가면 사십일 이상 감금이요. 그땐 꺼끌꺼끌한 다 떨어진 노란 요떼기를 세 장 줬어요, 덮으라고. 근데 일본놈들이 와서 거기다 찬물을 찌끄리요. 물을 찌끄리 버리면 겨울엔 얼잖아요. 시멘트 바닥인데, 어떻게 되겠어요. 땡땡 얼고 부어가지고 죽지. 그래가 죽으면 그냥 꼬실러가지고 납골당에 뼈가지 갔다 옇고 끝내. 우릴 사람으로 안 보는 거지.”

그의 말처럼 일본인들에게 원생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생체실험 재료’였고, 단종수술로 대를 끊어야 할 ‘전염병 동물’이었다. 단종수술은 해방 이후 한국 정부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참여사회』 2002년 10월호 참고). 해방 조국 역시 환자들의 ‘번식’을 허락지 않았다.

“이왕 나갈 거면 간척한 땅으로 나가고 싶었지”

박쾌서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금오농장 양로원 반장인 박만수 할아버지(78)와 농장 사무소 서기 신극연(64) 씨가 박쾌서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왔다. 역시 간척사업에 참가했던 사람들로 오마도 간척사업에 대한 그들의 한 또한 박쾌서 할아버지 못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61년 8월 24일 조창원 당시 소록도병원장의 부임으로부터 시작됐다. 육군대령 계급의 군의관이었던 조 원장은 병원에 부임하자마자 환자들의 인권신장을 목표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오마도 간척사업도 그 중 하나였다. 이때의 이야기는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요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60년대 초반은 한센병 치료제의 보급으로 치유환자들이 급속하게 증가하던 시기로, 소록도 또한 그랬다. 원생수가 약 5000여 명에 이르던 병원으로서도 치유된 환자들을 계속 수용하는 것은 부담이었다. 완치가 됐어도 갈 곳이 없어 섬에 머무르고 있는 환자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갈 데가 없었어. 고향으로 갈 수도 없었고. 까딱 잘못하면 바가지 들고 어디 가서 문전걸식해야 하는데 절대로 그런 짓은 다시 하고 싶지 않으니까 섬에서 안 나갔지. 나가면 뭘 할 거야. 소록도 아니면 죽는 줄 알았지.”

문제는 음성 병력자들이 자활을 모색할 수 있는 정착지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였다. 이때 조창원 원장이 생각해 낸 것이 바다를 메우는 것이었다. 고흥군 도양면 봉암반도와 풍양반도, 그 중간에 있는 오마도와 오동도를 잇는, 길이 3753m의 제방을 쌓아 약 330만 평의 농토를 만들고, 여기에 음성환자와 일반 영세농가를 각각 1500세대씩 입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조 원장은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원생들을 집요하게 설득했고, “속임수라면 문둥이 손에 맞아죽어도 좋다”는 서약까지 하고 원생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어쨌든 건강한 사람들은 다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왕 나가야 한다면 우리가 간척한 땅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

농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당시는 5·16 군사쿠데타 직후로 군정 상황)도 조 원장의 계획을 쉽게 수용했다. 62년 6월 8일, 조 원장이 현장에 선발대를 파견함으로써 마침내 간척사업이 시작됐다. 조 원장은 오마도 개척단을 조직, 자신이 단장이 되기도 했다.

“선발대가 가서 작업 지휘본부와 개척단이 묵을 막사를 지었어요. 군용 막사 맹쿠로 양쪽에 침상이 있고 가운데 복도가 있는 모양으로. 요때기 하고 밥그릇은 외국에서 소록도에 봉사하러 온 캠프단들이 쓰고 놓고 간 거를 가지고 와서 썼고.”

7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 보사부장관, 전남도지사 등이 참여해 기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박정희도 그때 헬리콥터 타고 온다 그래서 비행기 앉는 자리 만든다고 보리밭을 다 까뭉갰지. 삽으로 밭을 홀딱 밀어가지고 반반하게 했는데, 아, 안 와 버렸어. 보리밭만 조져 불고.”

“메워도 메워도 끝이 없어”

공사가 시작됐다. 일할 여력이 있는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모두 참가했다. 5000여 명의 원생들 중 2000∼3000여 명이 세 개의 방조제 건설 현장에 나눠 투입됐다. 박쾌서·박만수 할아버지는 건설대로, 소록도병원생번호 6091번으로 간호조무사였던 신극연 씨는 교대조로 작업을 했다.

“건설단에 있는 분들은 현장에서 상주하면서 일을 했고, 나 같은 간호조무사들은 교대로 한 주에 사흘이면 사흘, 한 달이면 열흘을 하고 온다든지, 보름을 하고 온다든지, 이렇게 했어요. 학생들도 그랬고.”(신극연)

작업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물때를 봐서 물이 빠지면 밤이라도 전깃불을 켜 놓고 일했다. 그렇다고 쓸만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삽이나 곡괭이였다. 국가의 지원은 전혀 없었다. 원생들의 팔다리가 작업도구인 상황에서 공사는 하루하루 험난했다. 특히 메워도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바다는 원생들의 애를 태웠다. 섬에 있는 산을 깎아다 바다에 들이부어도 턱없이 모자랐다.

“물이 빠진 뻘이 얼마나 깊은지 22자, 23자짜리 철근을 가지고 찔러보면 이게 다 들어가요. 돌을 실어 날라 던져 넣어도 끝이 없어. 그러다가 물이 들면 다 쓸려 내려가 버리고(박쾌서). 소록도 나무도 뻘 속으로 다 들어갔어요.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서 배에 싣고 가서 막 쳐 넣는 거요. 뻘에다가. 그렇게 돌, 흙 갖다가 퍼부어 놓으면 낮에는 둑이 이렇게 좍 만들어져 있어요. 근데 자고 일어나면 그 둑이 팍싹 내려앉아 버려, 뻘이 너무 깊어서. 둑은 어디로 가 버리고 없고, 저 건너편에 섬 같은 게 하나 생겨 있어요. 이쪽에서 무거운 게 가라앉으면 저쪽에서는 또 올라오더라고요. 신기하대요. 그래가지고 안 되니까 나중에는 배 있잖아요, 낡은 배를 막 쳐 넣고 그랬다고요(신극연).”

돌이 부족하니까 돌을 파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근방에서 고기잡는 쪼마끔한 배들이 있어요. 한 0.2톤 정도 하는 거. 어민들이 고런 데다가 돌을 싣고 와요. 벌어 묵고 살라고. 그러면 그걸 요리 재고 조리 재고 해서 가격을 매겨서 사요. 그렇게라도 해서 돌을 쳐 넣어도 원체 뻘이 깊으니까, 넣어도 넣어도 바닥이 꿀렁꿀렁 해 가지고 위에다 또 부으면 또 그 모냥이고. 그걸 수없이 반복하다 보니까 점점 단단해 지더구만.”(박쾌서)

뻘을 메우는 것만 힘든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의식주가 너무 열악했다.

“아, 반찬이 없어 가지고 깻물(바닷물)에다 된장을 찌지(끓여) 가지고 묵었어요. 말도 못해요. 뭐 말린 것하고 콩하고 큰 도라무통에 넣어서 끓여 가지고 휘휘 저어서 군인들 묵는 거라 카믄서 주는데, 몇 번 묵고 나니까 도저히 못 묵겠어. 그래가 깻물에 갖다 어끄러 버렸어요. 근데 그게 난중에 도로 밀리 와요. 그럼 그놈을 다시 건져다가 또 묵어요. 물도 귀한데다가 장도 안 갖다 주지 그렁께. 말이 그렇제 기가 차요. 자는 것도 말도 못해요. 인자 요때기가 그전에 군인들이 깔던 긴데 더러워 가지고, 기냥 똥도 막 묻어 있고, 피 묻어 있는 것도 있고. 그런데도 그걸 빨 수가 있어야지.”

“얼마나 원통한지 말할 수가 없어”

이런 상황에서도 공사는 조금씩 진척됐다. 그만큼 예상치 못한 문제도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오마도 인근 주민들이 공사장을 습격해 기계를 파손하는가 하면, 주민들과 원생들간의 크고 작은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간척공사 자체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지만,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편견 또한 큰 원인이었다. 63년 1월엔 제3방조제에서 원생 한 명이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에 압사해 원생들이 파업을 벌인 일도 있었다.

같은 해 12월엔 연사흘 동안 불어닥친 돌풍으로 완성되어 가던 둑이 대파되고 각 방조제들이 내려앉는, 공사 시작 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한다. 작업 공정률은 급강하했고, 원생들은 조창원 원장에게 원성을 퍼부었다. 매우 지쳐 있던 조 원장이 권총을 원생들에게 내어 주고 자신을 믿지 못하면 쏴도 좋다고 하는 상황까지 가서야 원생들을 진정시키고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 후 공정률도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환자들이니까 그만큼 했지, 성한 사람들 같으면 하지도 못해요. 누가 할 것이요. 인력이 그만큼 있기나 해, 돈이 있기나 해.”

그러던 중이었다. 63년 11월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군부가 민정이양을 하면서 치르는 총선거로, 당시 고흥군 공화당 후보는 신형식이었다. 당시 오마도 간척사업은 고흥군의 핵심 선거쟁점이 되어 있었고, 고흥군민 절대 다수가 간척사업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를 신형식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선 후 오마도에 나환자 정착 반대’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나선 것이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진행되자 조 원장은 신형식에게 오마도 문제에 관해 질의, “다른 후보가 선수를 치면 안 되니까 내가 먼저 공약을 하고, 당선이 되면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조 원장은 이를 믿고 원생들이 신형식을 지지하도록 유도했고, 결국 신형식은 당선됐다.

문제는 그 후였다. 국회의원이 된 신형식은 조 원장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원장 교체를 추진하기까지 했다. 결국 조 원장은 64년 3월 7일부로 전임 발령을 받게 된다. 개척단도 공사를 중단하고 귀원할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는 정착해서 나갈 사람들을 추려내고 있을 때였다.

“인자 조창원 원장이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면서 느그들 이 오마도 죽어도 뺏기지 말아라, 이 말을 한 거요. 그 양반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 땅 뺏길라믄 차라리 목에다가 돌 매달고 바다에 빠져 죽어라’ 그랬겠어요.”(박만서)

“우리 억울한 일 좀 알려 주시오”

몇 달 뒤인 7월 25일엔 간척사업 주체가 오마도 개척단에서 전라남도 관장 하에 한국정착사업개발흥업회로 변경되기에 이른다. 토지 분배권 또한 도 당국이 갖게 되면서, 원생들은 간척지와 관련된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만다. 공사 후반기의 체불 임금도 함께 날아갔다. 원생들이 공화당 고흥지구당 위원장에게 청원서를 보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진짜 좃 빠지게 했는디 뺏기고 난께 얼마나 원통한지 말할 수가 없어. 우리를 산 사람으로 여겼으면 그리 못했제(박만수). 섭섭하고 원통하지만 어쩔 것이요. 감히 그때 군사혁명 때는 부락민들이고 누구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 큰일 날라고(박쾌서). 환자들은 워낙 고생을 많이 하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다 보니까 어지간한 일은 그냥 다 넘어가 버려요. 자기 형제간한테 배척받고 나온 사람이 뭘 바라겠어요(신극연).”

사업주체는 바뀌었지만 공사는 계속 됐다. 68년 8월에 외곽방조제를 준공했고, 89년 4월엔 오마도 간척공사 준공인가를 농림수산부장관이 승인, 93년 4월엔 토지 매각계획 승인이 났다. 그리고 현재 고흥반도라 불리는 이 땅엔 원생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살고 있다. 가끔, 마음 한 구석이 시릴 때면 당시 공사 참가자들 몇몇은 고흥반도를 찾아 보리밭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돌아오기도 한다.

정착지를 잃은 원생들은 현재 전국 곳곳의 정착촌으로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박쾌서 할아버지도 73년에 소록도를 나와 금오농장으로 왔다. 할아버지도 대부분의 정착촌 주민들처럼 집과 땅을 담보로 빚을 얻어 한동안 돼지와 닭을 키우며 생활했다. 하지만 기업형 축산업자들과의 경쟁에서 지고 오폐수 처리 문제 등이 해결 안 돼 그만둔 후 지금은 오직 정부지원금으로만 생활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처럼.

“한 달에 기본적으로 24만 8000원 정도가 나오고, 80세 넘는 사람들한테 주는 노인수당 4만5000원 하고 장애비가 5만 원 나와요. 또 교통비가 하루에 500원 나오나, 석 달에 2만7000원인가 나오니까. 돈 생길 게 없으니까 지원금 손꼽아서 기다리다가 받아서 쓰고 그래요.”

취미 삼아 텃밭에 마늘을 키우고, 벌레가 슬어 베어내고 싶지만 다 허물어진 집 틈으로 들이치는 바람이라도 막아 볼까 내 버려 두는 감나무, 엄나무를 돌보며 요즘 할아버지는 소일하고 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10여 년 전부터 줄곧 혼자서.

인터뷰를 마치고 ‘당신들만의 천국’으로 되돌아가는 기자에게 할아버지는 마지막 바람이라며 조심스런 인사를 건넸다.

“무슨 보상을 해 달라는 게 아니오. 그냥 좀 알려주시오, 우리가 억울한 일 당했다고. 고흥반도 사람들도 우리를 색안경 끼고 보지말고 좀 따뜻하게 봐 달라고. 우리 많이 고생했다고 말이오. 그럼, 잘 댕겨 가시오.”

이문영 본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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