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9월 2003-09-01   1727

70∼80년대 해외민주화운동의 상징, 박상증 목사

‘해외민주화운동인사 왜 망명객 취급합니까?”


지난 7월 29일 한국기독자민주동지회는 ‘T·K생’의 비밀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T·K생’은 1973년 5월부터 1988년 3월까지 일본의 진보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연재한 칼럼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필명이다. 그 시기가 말해 주듯,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박정희정권부터 전두환,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진 한국 군부독재에 대한 실상의 고발이자 역사의 증언이었다. 압제적인 상황 때문에 국내에서 불가능한 역사의 기록을 해외운동을 통해 실현한 것이다. 바로 그 주인공 ‘T·K생’은 지금까지 가명으로 남아 있었는데,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특이할 만한 것은, ‘T·K생’의 배후 또는 그 한가운데 참여연대 공동대표 박상증 목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와의 만남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역사의 증언에 대한 증언으로, ‘T·K생’을 중심으로 한 70∼80년대 해외 민주화운동의 일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리고 참여연대 박상증 대표의 인간적이고 민주투사적 면을 엿보는 일이 그 두 번째다. 나아가 아직 해외에 체류중인 민주 인사들의 명예회복과 귀국 문제를 논의하면서,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현재의 민주화 과제가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유와 합리성을 향한 반골과 저항의 기질을 타고났다. 그의 선친은 함경도 농부의 6남매 중 막내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향학열만은 대단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교회엘 다니기 시작하셨는데, 그만 그게 발각 나서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어요.”

그는 그런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모양이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짐작됐다. 자신의 인생역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께선 서울에 와서 목사가 된 뒤, 도쿄의 조선인 학생과 노동자를 위한 선교사로 파견되셨어요. 저는 그때 도쿄에서 태어나 여섯 살 되던 해 서울로 왔습니다.”

그는 도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학사경력도 파란만장하긴 마찬가지다.

‘1946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했는데, 졸업은 서울대 예과 마지막 회가 되었지요. 그리고 서울대 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 사학과도 채 졸업을 못하고, 2학년 때 미국 켄터키로 유학을 갔어요. 거기선 다시 아버지의 권유로 성결교파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그가 서울대 사학과를 중도에 그만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좌파라고 자처했는데, 목사의 아들로 성분이 좋지 않게 분류돼 원만한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사학과의 분위기 때문에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49년 후반 로스앤젤레스에서 헤어질 때였다. 이듬해 8월 아버지는 납북됐기 때문이다. 6·25를 맞은 것도 물론 미국에서였다.

그러면 서울에는 언제 다시 돌아오셨나요?

“미국에서 8년을 보내고 난 뒤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썩 내키진 않았지만, 어머니의 원대로 아버지께서 가르치던 서울신학교에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2년만에 파면되고 말았지요. 이유는 병역 미필이었습니다.”

물론 단순한 병역 기피는 아니었다. 그가 미국으로 갔을 땐 징병제도가 없었다. 귀국한 뒤 신체검사에서 병종으로 면제를 받았다. 그러나 학교에선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파면했다. 젊은 전임강사가 교단이 금지한 에큐메니컬(Ecumenical : 1949년에 창설된 국제 개혁교회 연합단체) 운동을 하며 자기 주장을 펴는 것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는 그 후에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침없이 드러냈으나, 교단에서는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선친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는 예수재림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그게 일본 천황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해산된 교단은 광복 뒤에 재건됐다. 그리고 한국전쟁 직전 납북되고 말았다. 이런 아버지의 행적이 교단에는 순교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생전에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후에도 그 음덕을 계속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박 대표가 해외 민주화 운동을 펼치던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지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일을 맡아 제네바로 가게 된 건 아무래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때문이었겠지요?

“KNCC는 1926년 창설되었다가 1938년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광복 후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의 세 교단이 모여 재조직한 것입니다. 서울신학교에서 쫓겨난 뒤 KNCC에서 일했는데, 해외활동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WCC 제3차 총회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KNCC 청년 대표로 갔는데, 거기서 WCC 청년위원의 권유로 WCC에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제가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간 때는 1967년 1월입니다. 그런데 바로 몇 개월 뒤에 동베를린 사건이 터졌어요. 가자마자 가장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맞은 셈이지요. 중앙정보부에 의해 치밀히 계획된 그 사건은 해외교포 사회를 경직되게 만들었습니다. 잘 모르는 유럽 사람들은 그 사건 이후 우리를 슬슬 피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동베를린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한국정부에 대한 위기감, 바로 그것 때문에 해외의 민주 인사들은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그 인식은 이미 60년대부터 시작됐지만, 구체적 행동을 계획하고 실천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서서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 아시아는 UN의 제2차 개발연대의 시작으로 고조돼 있었다. 비록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경제성장 없이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서서히 지배적 이념으로 굳어 갔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란 명분 아래 UN의 개발계획이 발표됐고, 국제 금융자본들이 아시아로 몰려들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시아 각국의 정부는 해외 자본의 안전 보장을 위해 독재의 논리를 폈다.

박정희정권도 그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그리하여 1971년, 민주화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3선 개헌을 해내고야 말았다. 박정희의 장기집권 획책은 각계각층의 저항에 부딪혔다. 개신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러자 군사 독재 정권은 언론을 극도로 통제하고, 집회를 금지했으며, 범부들의 사사로운 대화까지 유언비어라 이름붙여 단속했다.

“그런 억압의 상황에서 이런저런 정보가 모였고, 그것들을 나라 밖으로 옮겨서라도 알리고 보관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T·K생’의 탄생 배경이다. 당시 서울에는 KNCC 총무였던 김관석 목사와 도시산업선교회의 중심이었던 박형규 목사가 있었다. 그리고 유럽과 미주 각 국에 동지들이 포진되어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그리고 미국에 이승만, 김인식, 함성국, 손명걸, 김상호 목사와 구춘회, 임순만 선생, 캐나다에 김재준, 이상철 목사, 독일에 장성환 목사와 이삼열 박사, 스웨덴에 신필균 선생, 영국에 김준영 목사, 그리고 스위스에 제가 있었지요. 일본에는 이인하 목사와 강문규 선생 외에, 오재식 선생이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부 간사로 도쿄에 사무실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성장한 인간관계가 국제적으로 절묘하게 배치되었지요. 서로 자주 연락하였으며, 도쿄에서 몇 차례 비밀 회의도 했습니다. 마침 오재식 선생이 공부하러 간 지명관 교수를 붙들고 일본에 남아 운동에 동참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지요. 그래서 결국 지 교수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집필하게 된 겁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세카이』 1973년 5월호에 첫 회가 연재된 뒤, 1988년 3월호까지 16년에 걸쳐 176회 동안 단 한 차례도 중단 없이 계속됐다. 매회 원고지 100매 내외로 모두 1만8000매의 분량에 달한다. 따라서 그 기간 동안의 암울했던 한국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기록된 셈이다.

그 역사 기록으로서의 칼럼을 『세카이』에 연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죠?

“우연한 기회에 선우휘가 지 교수를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에게 소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필명 ‘T·K생’은 야스에가 지었는데, 의미는 없다고 합니다.

지 교수는 매달 수집된 정보 조각을 놓고 앉은 자리에서 100매 원고를 다 썼다고 합니다. 중단했을 때 원고가 새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그 육필 원고를 야스에에게 전하면, 야스에는 다시 다른 종이에 모두 베낀 다음 원본은 없애버렸다고 해요.”

선우휘가 매개됐다는 게 묘하다. 불현듯 1978년에 읽은 선우휘의 장편소설 『쓸쓸한 사람』이 스스로를 위한 변명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보수우익의 대표격인 조선일보 주필로 현실을 지키면서, 뒤로는 해외 민주화 운동을 도왔다는 얘기다.

선우휘 씨를 만난 적은 있습니까?

“전혀 만난 적 없습니다. 제네바에 있을 땐 그저 나쁘게 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훗날 지 교수 말로는, 선우휘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정보기관에다 ‘T·K생’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명이라고 했다더군요.”

사실 ‘T·K생’은 지 교수가 마지막 집필을 맡았을 뿐, 결코 한 사람이 아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T·K생’이었다. 서울에서 수집한 정보는 종이 조각에 깨알처럼 새겨졌다. 그리고 그것을 담배로 말거나 심지어 여자 속옷에 감추어 도쿄로 날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른 메모와 사진 등의 자료는 줄잡아 30만 조각이 넘는다.

“한국으로부터 전해진 긴박한 뉴스와 지원 요청은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던 민주 인사들의 심금을 울리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점점 감동의 물결이 되었습니다.

광주 학살과 관련한 사진을 숨겨가던 사람들이 김포공항에서 적발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대부분 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처벌받진 않았습니다. 그 격동의 시절을 생각하면 우리를 도운 수많은 외국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외국인들 중 메달을 목에 걸어야 할 사람들 정말 많습니다.”

30년만에 ‘T·K생’의 비밀을 털어놓는 이유

『세카이』에 ‘T·K생’의 칼럼이 연재되는 동안 박 목사께서는 특히 뒤에서 큰 역할을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가장 큰 문제는 ‘T·K생’이 일본에 머무를 수 있는 합법적 지위와 그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들 돈 많은 기관에 있는 저더러 해결하라고 떠밀었지요. 그때 전 WCC 간사였습니다.

우선 WCC에 간청해서 지 교수를 특수선교자문위원으로 파견하는 형식을 갖추어 도쿄여자대학에 근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형식상 교수였기 때문에 학교에서 월급을 받진 못했지요. 그래서 WCC 세계선교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던 우루과이 출신의 에밀리오 카스트로에게 졸랐지요. 처음엔 돈이 어디 있느냐면서 곤란해했지만, 곧 만들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저의 선임자였던 카리브 해안 출신의 필립 포터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두 사람의 이름을 어디엔가 새겨두고 싶습니다.”

WCC의 재정 지원은 지 교수가 도쿄여대의 전임 교수가 될 때까지 무려 12년간 계속됐다. ‘T·K생’이 탄생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지금에야 그 비밀을 털어놓게 된 데도 사정은 있다. 우선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 모아 둔 민주화 운동 자료를 서울로 가져오고, 또 그것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김영삼정부 말기에 안기부에 간접적으로 확인도 해보았으나, 확신이 서지 않아 보류했다. 김대중정부 때 본격적인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원래 내년쯤 정리한 모든 자료를 공개하면서 기독자민주동지회를 공식 해체하는 것으로 종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최근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이 드러나 북일관계가 극도로 나빠졌을 뿐 아니라,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거세어졌지요. 그 와중에 “‘T·K생’이 북한 간첩이란 소문이 일기 시작했어요. 난처해진 『세카이』측에서 진실을 밝혀달라고 요청했고, 지 교수가 개인적으로 승낙하고 말았어요.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한 잡지사나 지 교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으로 가려던 지 교수를 만류했지요. 결국 1년을 앞당겨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해외민주화운동 인사들의 명예회복 서둘러야

원래 기자회견은 7월 29일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25일과 26일 각 일간지에 일제히 지 교수 인터뷰 기사가 실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지요?

’29일 회견장에 기자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대강의 보도자료를 미리 배포하고 엠바고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한겨레신문이 약속을 어기고 먼저 보도해 버렸어요. 그러자 문화일보가 지 교수에게 전화해 모든 사실이 알려졌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지 교수가 확인하지 않은 채 거기 넘어가고 말았지요. 이어서 다음날 조선, 동아, 중앙에 비슷한 인터뷰 기사들이 실린 것입니다. 그래도 29일 회견장에 많은 기자들이 왔습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연재가 시작되자 그들은 스스로를 좀더 긴밀히 할 조직이 필요했다. 1975년 말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릴 WCC 총회를 앞두고, 박상증 목사는 세계 각처의 동지들을 제네바에 불러모아 한국민주화를 위한 세계협의회(World Council for Democracy in Korea)를 결성했다. 그후로 몇년 뒤 한국기독자민주동지회(International Christian Network for Democracy in Korea)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난 7월의 기자회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획의 하나였던 기독자민주동지회 해산은 없었다. 조만간 이번에 공개하지 않은 자료까지 모두 정리해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전시와 아울러, 이제 이름만 남은 그 단체의 해체를 선언할 예정이다.

민주화를 부르짖은 지도 몇 십 년 지났을 뿐 아니라, 민주화가 됐다고 생각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 전두환정권까지가 민주화운동의 대상이었다면, 노태우정권부터 민주화의 가능성을 봤다고 할 수 있고, 김영삼정부에선 형식적 민주화가 시작됐다고 하겠습니다. 실질적 민주화를 위해 노무현정부에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참여정부라고 하던데, 실질적인 참여가 무엇이냐는 점에서 따져보면 현재까진 결코 희망적이지 못합니다.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지난 정부까지의 성과를 보완하고 발전시켜야 할 터인데, 아직 적극성이 없고 그냥 방치하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듭니다.

구체적 얘기를 하나 하자면, 해외 민주인사들의 명예로운 귀국이 이 정부에서 반드시 이뤄져야 합니다. 생전의 윤이상 씨를 세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아직도 그가 입국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국내에서 운동했던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정치적으로 입지와 입신을 이루었는데, 해외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을 망명객처럼 내버려두는 것은 곤란합니다.”

차병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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