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11월 2003-11-01   1292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K 기자,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어느새 올해 가을도 고비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 캠퍼스에도 만추의 빛이 완연합니다. 백양로를 노랗게 물들인 은행나무잎과 청송대를 붉게 물들인 벚나무, 참나무잎들이 더 없이 아름답습니다. 하루하루는 매양 더디게 흐르는 것 같은데 계절은 어느새 한 해의 막바지에 다가서 있습니다. 한 해 한 해의 시간구분이라는 게 인위적인 것임에도 연말에 가까워오면 지난 시간에 대한 어떤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갖게 됩니다.

요즘 나라 안팎을 살펴보면 그렇게 마음이 편치는 않습니다. 재신임 정국도 그러하고 파병 결정도 그러하고 많은 난제들이 쌓여 있습니다. 어느 해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어 왔지만 올해는 그렇게 즐거운 기억들이 많은 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작년만 하더라도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촛불 시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사회를 예감케 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지난 20세기 격동의 현대사를 이제는 정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21세기를 열어 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이가 저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올해 초 노무현정부가 출범했을 때 ‘3김 정치’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를 내심 적잖이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연이어 터진 사회갈등들은 정부를 단숨에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으며, 그 결과들 또한 그렇게 소망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사회갈등을 원만히 처리하지 못한 것의 일차적인 원인은 물론 정부에게 있겠지만, 정부와 함께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를 실종시킨 정당들의 책임 또한 작지 않았습니다. 이런 정치의 실종은 초유의 재신임 정국을 불러왔으며,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에는 현재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선생의 시비를 찾아

다소 울적한 마음에 오늘은 산에 오릅니다. 지하철과 전철을 갈아타고 도봉산역까지 가서 도봉산에 오릅니다. 여기 도봉산에도 붉게 물든 단풍이 서서히 낙엽으로 바뀌어져가는 만추가 절정입니다. 매표소를 지나서 서서히 올라가다 보면 한 시인의 시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김수영 선생은 1920년대부터 지난 20세기 우리의 현대사를 열렬하게 살아가다 1960년 후반 돌연 세상을 떠난 시인입니다.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시 ‘풀’이 선생의 친필 글씨체로 시비에 적혀 있습니다. K 기자도 알고 있듯이 김수영 선생은 4·19 정신을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그는 노래합니다. 선생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낭만주의를 넘어서서 그것을 척박한 우리 현실에 뿌리박기 위해서 고투해 왔습니다.

잠시 벤치에 걸터앉아 선생이 남긴 시들을 떠올리며 한 해를 돌아봅니다. 정치적 선호를 떠나서 올해가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해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난 15년간의 ‘3김 정치’를 마감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열어 가기를 많은 사람들은 소망해 왔습니다.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가 시작됐지만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1993년과 1998년 두 차례에 걸쳐 민간정부가 출범했으며, 두 정부는 민주화를 공고히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정치사회에 군부 세력의 영향력을 차단한 것이 김영삼정부의 공로라면,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남북화해 정책을 추진한 것은 김대중정부의 업적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영원하다

K 기자, 하지만 이 두 정부가 민주주의 원리를 사회 전영역으로 확장하고 이를 심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지역주의가 완강하고 정치개혁 또한 미완의 과제이며, 시장과 시민사회에도 크고 작은 개혁 과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전체 사회의 수준에서 본다면 ‘성장 없는 분배의 양극화와 시민사회의 다원화’가 지난 10년 동안 우리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1990년대 중반의 수준은 회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는 오히려 커지고 시민사회의 요구는 다양해졌습니다. 노무현정부가 출범한 조건이 이와 같았기에 그 기대 또한 남달랐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지난 한 해가 주는 교훈이 있다면,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분출하는 사회 갈등과 한미관계·남북관계를 포함한 대외관계로부터의 압력에 정부는 정부대로 작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 기대했던 바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난관을 헤쳐 가기 위해서는 실종된 개혁의 드라이브를 새롭게 모색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일관된 개혁을 통해 분열된 사회의 통합을 성취하고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달성하는 것만이 우리사회가 진정한 21세기에 들어서는 길일 것입니다.

산에 오르면서 제법 쌀쌀한 바람이 어느새 훈풍으로 느껴집니다. 중턱에 오르니 멀리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다시 선생의 시를 떠올립니다. 돌연 세상을 달리했지만 선생은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그러나 동시에 지극히 순수하고 당당한 인식에 도달합니다. 순간 인간과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믿음이 있다면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K 기자가 제게 말했듯이 희망은 원래 이런 것임을, 그것을 잃지 않으려면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내내 건강하길 바랍니다. 그럼 다시 소식드리지요.

김 호 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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