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9월 2003-09-01   869

나는 ‘이중 잣대’에서 자유로운가?

“무엇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만난 한 후배가 말했다. “한 때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현대자동차 노조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관철시킨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위도 문제도 그렇고. 어딘가 핵폐기장은 지어야 하는 거잖아요. 부안 사람들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긴 나라고 그저 빈 술잔에 성실하게 술을 따라주는 성의를 보이는 것 이외에 뾰족한 답을 줄 재간은 없었다.

나는 주변에서 현대자동차 노조의 ‘집단이기주의’에 대해 핏대를 세우며 비판하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그 자신 월급쟁이인 한 지인은 대기업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뛰어넘는 임금을 챙겨간다며 ‘강도짓’이라고까지 언성을 높였다. 협력업체를 ‘머슴’ 취급하면서 ‘노동해방’을 외친다며 비웃기까지 했다.

개인이 모이면 집단인데, 왜 집단이기주의는 비난받나

나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노조의 집단이기주의를 질타하는 많은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인간 본성은 ‘이기주의’이고, 자본주의는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했었다. 기업이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 기업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지 ‘사회를 책임지는 집단’이 아니라고 했다. 이들은 또 경쟁은 이 사회의 최고의 가치가 되어야 하며, 경쟁이야말로 이익과 효율을 수행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었다. 노조의 ‘이익추구’가 비난받는 이유는 이익이 최고의 가치인 사회에서 ‘개인적 이익’은 용인될 수 있되, ‘집단의 이익’은 비난받아야 한다는 의미일까?

에너지대안센터의 이필렬 대표는 한 신문의 칼럼에서 “진정으로 환경과 생명을 생각한다면 핵폐기물의 근원인 원자력발전 반대운동도 대대적으로 벌여야 하는 것”같은데 전북지역 밖의 많은 사람들이 새만금간척사업은 반대하면서 핵폐기장이 전북 위도에 세워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원자력발전이야말로 새만금보다 더 전국적이고 지구적인 문제이며, 새만금보다 더 미래세대의 삶과 연관된 문제”라며 이것을 지역문제가 아니라 절절한 환경 문제로 접근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중적 가치기준은 사회적 합의 방해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개인적인 삶의 태도에서부터 사회적 문제에 이르는 일관된 판단 기준을 설정하고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볍게 여기게 된 듯 싶다. 다원적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가 일관된 가치를 가지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제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양성의 존중이 이중적 태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에 대해서는 엄격한 이중적 가치 기준은 시민사회의 단일 규범을 만들어 내는 데에 치명적인 방해물이다. 특히 사회적 이슈에 대해 단일 기준을 마련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대화와 토론을 통한 사회적 합의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이중 잣대를 없애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책임이고, 다른 이들의 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탐욕이라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책임이고 무엇이 탐욕인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간디는 이중 기준을 리더십의 적으로 규정하고, 자기 자신을 체크하고 권력이나 특권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위해 매일 ‘자기와의 무언재판’을 실천했다고 한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위해 노력하고 되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소통과 통합을 첫걸음일 것이다.

이왕재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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