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9월 2003-09-01   1226

‘대책없이 시작해 현자가 되는길”

30년차 아줌마의 결혼이야기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는 결혼. 눈에 콩깍지 벗어지기 전에, 멋모르고 결혼해야 잘 산다는 세간의 말처럼, 다들 연애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며 결혼을 한다. 30년차 아줌마가 돌아본 결혼생활은 어떨까. 편집자 주

‘멋모르고 결혼하기’라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은 건, 대책 없는 결혼보다 더 대책 없는 일이었다. 피서지에서 원고청탁을 받은 것이 화요일 밤이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것은 목요일이니 마감시한까지는 사흘뿐이었다. 그나마 금요일 아침 7시에 MT를 떠나 토요일 밤에 돌아오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니 더욱 가슴을 졸일 수밖에…. 결국 목요일 밤을 꼬박 새워 탈고한다. 하루 밤을 새우는 일이야 그리 어려울 것도 없지만 대책 없이 결혼한 그 아픈(?) 과거를 돌이키는 일은 아무리 지나온 세월이라 해도 하루로는 턱없이 부족할 터였다.

내가 감히 인륜대사인 결혼에 대해 말하다니. 뭐라고 쓸 것인가 고민하느라 휴가를 망친 건 말할 것도 없고, 결혼하던 그때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이나 인정에 끌리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한심스러웠다. 왜 이렇게 서론을 길게 늘어놓는가 하면 당시에는 최상이고 최선이라고 믿었던 결혼이 참으로 대책없는 것이었음을 고백하기가 영 내키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최소한 친구들과 자못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고 졸업 30주년 기념으로 친구들과 여행할 때였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마음이 들뜨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니 모두들 어느새 학창시절로 돌아가 깔깔대고 조잘거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처음에는 여고시절의 선생님과 친구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더니 다음날엔 자식자랑에다 남편들 이야기가 화제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로서로 어느 동창회에서 누구와 누구의 부인으로 만났다거나 학회에서 누구와 함께 어울렸다거나 자기 남편이 누구 남편보다 몇 살 많다는 둥 하였다.

흔히 여자 나이가 그 정도면 미모가 평준화된 시기라 하였다. 그 말은 잘 생겼거나 못 입었거나 이미 그 차림이 별로 돋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라는데 친구들은 훌륭하고 출세한 남편 덕분에 유복하게 살아서인지 오륙 년은 족히 젊어 보였다. 남편들의 직업은 대체로 판검사나 의사, 혹은 교수였고 나이는 소띠나 개띠 내지는 토끼띠였다. 나와는 하나도 해당사항 없는 친구들 얘기를 들으니 마치 남의 잔치에 잘못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나무꾼처럼 크고 투박한 손이 마음에 들어

나는 신체 건장하고 배우 뺨치게 잘 생겼으며 마음이 너그러운 데다 친구가 많으며 직업이 확실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었다. 눈에 콩깍지가 끼었던 때이니 어딘들 미웠으랴마는 특히 나무꾼처럼 크고 투박한 손이 마음에 들었다. 그 손이면 어떤 경우에도 나를 고생시키지 않을 것이란 확신마저 들어 서둘러 결혼했다.

결혼생활은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때론 행복하고 때론 불행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시댁과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대가족제도 아래서 밥하고 빨래하며 아이들 키우는 일로 만족해야하는 자신을 묵인하는 것이었다. 언젠가 써놓은 글에서 나는 그 시절을 이렇게 뒤돌아보았다.

결혼이 뭔지 모르고 용감하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에 걱정없이 잘 살터이니 두고 보시라고 속으로 큰소리쳤다. 결혼이 연애의 연장이라고만 믿을 정도로 나는 철부지였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비친 나처럼 작아져서 그의 손안에 또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항상 그와 함께 있고 싶었던 나는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결혼생활은 행복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귀동냥도 없이 무작정 시작한 결혼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손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눈을 뜨면 시부모님의 식사준비부터 서둘어야 했다.

남편을 오지의 건설 현장에 두고 돌도 안 지난 조카와 둘이 살던 동서는 아침마다 우리 집에 와서 애국가가 끝나는 시간까지 종일 놀다 갔고 내 또래의 막 제대한 시동생과 한 집에 사는 동갑내기 질녀는 은근슬쩍 시기와 질투로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시누이와 돌 바기 생질은 사나흘에 한번씩 올 때마다 집을 뒤집어 놓듯 수선을 떨었다. 자연히 집에는 늘 친척들로 북적거렸다.

둘만의 오붓한 신혼생활은 꿈도 못 꾸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집에 노는 손이 많은 걸 아는지 아이는 병치레가 잦았고 낮밤마저 바꿔 노는 통에 두 아이가 대 여섯 살이 되도록 밤잠 한번 편히 잘 수 없다. 게다가 사람 좋아하는 남편 탓에 1년이면 수백 명의 손님을 치러야 했고 아들을 낳으려는 시도까지 합쳐 내 이십대의 모습은 꼬챙이처럼 마른 사진 속에나 남아 있다. 돌이켜 보면 살아온 날이 아득하고 헤쳐온 삶이 스스로도 대견하다. 만약 다시 이 길을 가라 한다면 나는 차라리 두 손 들고 말 것이다. 제 사람 하나 갖기 위한 결혼이 얼마나 많은 수고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다면 그 숱한 반대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결혼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앞에 놓인 인생의 무게를 모르고 마냥 행복에 겨운 나를 보는 친정어머니의 상심을 못 본체 외면한 대가는 길고도 혹독했다.

또 다른 결혼이 시작되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엔 이렇게 그날을 기록해 두었다.

‘최근에 만난 그는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또렷하여 첫눈에 깔끔한 인상을 풍겼다. 쌍꺼풀이 없는 큰 눈동자에는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었고 말을 할 때 스마일 마크처럼 되는 입술은 상큼함을 느끼게 하였다. 어쩌다 웃으면 그 입이 가운데로 오그라들고 큰 눈은 오히려 실눈이 되곤 하였다. 이목구비가 얼굴 한 가운데로 모여든 듯 귀여운 느낌마저 들었다. 조금 야윈 듯하나 어깨가 넓고 다리가 길어 보이는 걸로 봐서 180cm는 넘어 보였다.

큰 키 때문인지 어깨를 약간 구부리고 걷는 모습은 겸손함이 엿보였고 대화 중에는 부모의 노고를 헤아리는 마음과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는 의지가 보여 믿음이 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 차림표를 보는 둥 마는 둥하고 내가 주문한 것과 같은 것으로 하겠다고 하는데 목소리에 윤기마저 흘렀다. 그는 여자를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와 함께 있는 여자를 보았다. 얼굴에는 빛이 나고 향기가 나며 세상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그 여자는 나의 딸이다. 최근에 제 남자 친구를 나에게 소개했다.

엄마는 키 크고 잘 생긴 남자를 사윗감 0순위로 꼽는 사람이니까 아마 자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2년 후에나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예비 사위는 복무중인 군대를 제대하고, 그 사이에 내 딸은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30여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키 크고 잘 생긴 사윗감을 놓칠까봐 딸의 결혼을 서둘렀다. 그런 걸 보면 대책 없이 시작한 내 결혼생활이 그리 괴롭고 힘든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네온사인 휘황한 도심 한 복판에서 활개치던 딸을 제주도 모슬포에 내려보내 놓고, 희뿌연 군인아파트 건물만 보이면 눈물짓기도 했지만 결혼의 조건을 요모조모 따지지 않은 걸 후회하지는 않았다.

앞날이란 누구나 예측할 수 없는 일, 조건을 따졌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결혼은 다 대책 없이 시작하고 순간순간 닥치는 기쁨과 슬픔을 슬기롭게 대처하며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해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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