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1월 2002-12-30   454

새해, 새 휴머니즘

소위 ‘막가파’의 원조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작정 상경파’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사회사는 무작정 상경파에서 막가파로의 발전사라 요약할 수 있다. 이를테면 먹고살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서울로만 치닫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제는 뭐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목숨을 이어가기 힘든 시절로 접어들었다는 말이다.

“부자는 ‘맨션’에 살고, 가난뱅이는 ‘맨손’으로 산다. 부유한 사람은 ‘개소주’를 마시고, 가난한 사람은 ‘깡소주’를 마신다. 돈 많은 사람은 매일 ‘소고기 조림’을 먹고, 빈털터리는 ‘소고기 라면’을 먹는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어쨌거나 부유하다는 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사람을 더욱 목마르게 하는 소금물과도 같은 것이다. 지폐로 중무장한 백전 불굴의 ‘총력 전진파’들 사이에서 기합 든 자세로 낮은 포복의 미덕만 숨가쁘게 배워온 사람들이 있다. 유일하게 강력한 것을 갖고 있다면 무기력밖에 없고, 하다 못해 내세울 게 있다면 질박한 몸가짐과 투박한 말투밖에 없는 사람들, 보살펴줄 사람이 없는 탓에 스스로 보살필 수밖에 없는 ‘허드레 인간들’, 이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실 낙타들이다. 이를테면 항상 무릎 꿇고 무거운 짐을 싣고서는 먼 사막 길을 헤쳐갈 채비를 언제나 차리고 있어야 하는 ‘인간 낙타’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 ‘허드레 사람’들이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입을 것, 먹을 것을 장만해주기 위해 묵묵히 땀흘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거드름 피우지 않고 공장에서건 들판에서건 과묵한 소처럼 자신의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 바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이끌어 가는 원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부자의 쾌락은 이 허드레 사람의 눈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닐까.

국방예산의 공룡화 복지예산의 개미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신자유주의 및 IMF 사태로 인하여 사회적 불평등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복지 수준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복지수준은 선진 8개국을 100점 기준으로 할 때 40점 정도에 불과하다. 소위 ‘문민정부’가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기려온 경제개발협력기구 소속 선진국의 절반 이하임은 물론이다. 예산 중 복지분야는 가령 YS가 대통령이 된 후에 오히려 1.1% 줄어들었다. 이른바 ‘문민정부’ 아래서 자행된 국민들의 삶의 질 악화는 묻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족적 낭비라 할 수 있는 방위비는 거의 50% 가량이나 늘어났다. ‘방위비 증가에 복지비 감소’,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의 솔직한 현실이었다.

1998년 경우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복지비용 비율을 보면, 예컨대 스웨덴은 34.14%, 독일 29.24%, ‘심지어’ 구공산권 나라인 폴란드조차 22.83% 인데 반해, 우리는 고작 11.09 %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분단 상황이 정부의 사회복지 예산을 구조적으로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어느 전문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예산 구조는 “국방 예산의 공룡화와 사회복지 예산의 개미화”로 특징지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하는 민속가요에 너무나 오랫동안 정겹게 길들여져 왔다. 우리는 왜 ‘일하세, 일하세, 젊어 일하세! 늙어지면 일 못 하나니’ 하는 노래를 사랑하지 못했던가. 우리의 나태한 신명이 우리를 허드레로 몰아치는데 한몫 거들지는 않았을까. 그러하니 “내일 할 일은 모두 오늘 하자. 그리고 오늘 즐길 일은 모두 내일 즐기자!”, 나아가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 당장, 그리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우선” 하는 자세가 우리의 다짐이라도 된다면 어떨까.

황금을 쓰레기 대하듯 하는 사람은 인간 쓰레기가 되고 쓰레기를 황금 보듯 하는 사람은 인간 황금이 될 터이니, 허드레 벗들이여! 어떤 길을 함께 걸어야 하겠는가? 우리네 낙타에게는 과연 언제나 사막의 오아시스가 나타날까?

공동체적 휴머니즘을 위하여

유럽과는 달리 우리 민족은 별도의 ‘휴머니즘 시대’를 체험한 적이 없다.

그런 민족에게 ‘인연’이란 것은 지극한 인간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지 않았던가. 과연 이보다 더 지독한 인간사랑이 또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서양인들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살벌하게 가르쳤다면, 우리 선조는 “이웃 사촌”이라 일렀다. 얼마나 정답고 훈훈한 인정이었겠는가. 우리들에게는 바로 이 ‘이웃 사촌’이라는 따스한 삶의 정서가 곧 종교의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인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것에만 전념해왔다. 이를테면 우리는 서로 돕고 아껴야 할 이웃을 관리의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참담한 ‘경영학적’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역사적 휴머니즘은 신(神)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을 지향했다. 요컨대 그것은 자율적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인간적 몸부림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新) 휴머니즘’은 이처럼 형식적으로 선포되기만 한 인간 존엄성을 진정으로 재탈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우리의 이 ‘공동체적 휴머니즘’은, 특수한 한국적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모순인 계급문제 및 민족문제에 의해 가장 직접적으로 고통 당하는 사회집단의 해방을 우선적으로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오늘날 ‘독주’의 자유만 있지, ‘공생’의 연대의식은 찾기 힘들다.

더구나 전 세계를 단일 시장화 하는 ‘세계화’의 확산과 더불어 물신주의가 동시에 세계화하고 있다. 한마디로 국제적인 차원으로까지 비약하여 ‘거인’의 독주만 옹호되고 권장되는 실정인 것이다. 그리하여 도처에 자신만의 발가벗은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시장 형 인간’만이 활개치고 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주의는 ‘거인주의’다. 곧 ‘힘센 놈이 최고’라는 말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나는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이 자유주의적 ‘거인주의’가 횡행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거 봉건 사회나 구 공산권을 지배하던 공동체적 인간 연대의 혼을 다시 불러내는 ‘역설’을 창조해낼 수는 없을까 하고.

한 사람만이 ‘역설’에 대해 꿈꾸면 이는 꿈일 뿐이지만, 만일 많은 사람들이 ‘역설’을 꿈꾼다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밝아오는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두 손을 움켜잡고 이 역설을 함께 꿈꾸어나갈 수 있게 되길 빌어본다.

박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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