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1월 2002-12-30   665

“여중생압사사건” 무퇴평결의 문제점

초동수사 방해하는 독소조항 폐지해야


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압사사건의 무죄평결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정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일부 사람들은 미국 법에 비춰볼 때 여중생 사건의 무죄평결은 타당하며, 이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시위는 국가안보에 위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항의시위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며 순수하고 자발적인 평화시위를 음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촛불시위는 미국법과 대륙법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일반 국민들의 지나친 감정적 대응이며,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 SOFA)은 다른 나라 SOFA와 대동소이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한미관계를 정립해 달라는 우리 국민의 순수한 바람을 폄훼하는 것이다. 사실과 보편적 논리를 무시한 것은 우리 국민 여론이 아니라 미군 법정이다.

우리 수사당국, 실체적 진실에 접근 불가

한마디로 말해 법은 상식이다. 재판 판결이 국민 절대적 다수의 법감정에 매우 어긋날 때에는 법 자체이든, 적용이든 어딘가에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선, 우리 국민이 미국법 절차에 충실한 재판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영미법에 의한 재판이라도 그것이 과연 성실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둘째는, 실체적 진실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초동수사의 미흡함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여론이 아니라, 무죄평결의 전제가 되는 ‘사실’과 이에 적용되는 ‘보편적 논리’이다. 우선 ‘사실’ 측면에서 보면 재판의 전제가 되는 통신장비의 이상 유무에 대한 미군 검찰과 한국 검찰의 견해가 판이하다. 그러나 보수적 시각은 이를 객관적으로 합의한 실체적 진실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논리’에서 미국법도 아니고 한국법도 아닌 미국과 한국이 합의한 국제조약이 ‘SOFA’인데, 이것에 명백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에 대한 접근이 어렵고, 이것이 이번 사건의 단초가 된 것이다. 보수적 시각은 미군법정의 재판진행 과정이 공정했으며, 재판의 대전제가 되는 실체적 진실을 옳은 것으로 당연시하는 전제 아래 논리를 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수사당국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접근을 구조적으로 어렵게 만드는 SOFA의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

여중생 사망사고는 지휘관 책임

이번 재판은 배심원 구성의 공정성, 한국 측 증인의 완전 배제, 미군 검찰의 과실치사죄 공소유지에 대한 소극성으로 인해 숱한 의혹을 남긴 채 결과적으로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없는 재판이 되어버렸다. 영미법에 따르더라도 미군 법정이 증인 채택을 공정하게 하였는지, 검찰이 공소유지에 적극성을 성실하게 보였는지를 포함해 재판 진행 전체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사고 차량 바로 앞에서 다른 장갑차를 운전했던 미군병사 조슈아 레이 상병이 지난 11월 22일 미군 소식지 『성조지(Stars and Stripes)』에 기고한 “여중생 사망사고는 지휘관 책임”이라는 글에서도 입증된다.

둘째로, 이번 재판의 쟁점인 ‘통신장비의 장애 유무’라는 실체적 진실 확정에 미군 증인 사이에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군 측은 관제병과 운전병이 최선을 다했지만 통신장비의 장애 때문에 사고는 불가항력이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국 검찰과 일부 미군 측 증인은 통신장비에는 문제가 없으며 관제병과 운전병이 상당한 주의의무를 다했더라면 압사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견차이는 초동수사 미흡으로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데 큰 이유가 있다.

그러나 초동수사 강화는 현행 SOFA의 틀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행 SOFA는 한국 수사당국의 초동수사를 방해하는 독소 조항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SOFA는 형사관할권 분야에서 피의자 신병 인도 시기를 종전의 최종판결 후에서 기소시점으로 앞당긴 것을 큰 성과로 꼽았다. 그러나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난 경우 검사가 항소할 수 없도록 한 점, 미군 관리가 수사 및 재판 과정에 불참할 경우에 이뤄진 피의자 진술의 증거능력 부인, 기소 후 한국 수사당국의 신문(訊問) 금지, 형사관할권의 핵심적 판단 기준인 공무증명서 발급 주체를 한국 법원이 아닌 미군 장성급으로 한정해 자의로 심판을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 미군 차량의 보험가입 의무 조항 부재 등과 같은 부속협정의 독소 규정에는 전혀 손대지 않음으로써 미군 피의자의 인권보호에 두터운 영미법적 보호막을 쳤다. 여중생 사망사건을 통해 개정 SOFA가 한국의 형사사법주권을 과거 SOFA보다 더 침해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런 독소조항은 독일 SOFA나 일본 SOFA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상식적인 법감정 따라 공정 처리해야

초동수사 미흡으로 발생한 불공정한 재판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SOFA 국제조약(본협정, 합의의사록, 합의양해 사항)을 조속히 개정해야 한다. 따라서 정부 당국이 내놓은 정치성 짙고 법적 구속력이 약한, 한미합동위원회 합의를 통한 개선으로는 SOFA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더구나 지금까지 경험으로 볼 때 미군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SOFA 조약도 준수하지 않았다. 하물며 법적 구속력이 희박한 합동위원회 합의를 통해 초동수사 강화와 군사훈련 통보가 과연 지켜지겠는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가 진심어린 것이라면 미국은 SOFA의 개선이 아닌, 개정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무죄 평결에 대한 국민의 항의는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이 국민의 상식적인 법감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되도록 재발 방지책을 근본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왜곡된 사실(통신장비 이상)과 불평등한 보편적 논리(SOFA)가 불러온 부당한 판결에 항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동안 우리 당국과 미국은 너무나 소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처해왔다. 평화적 촛불시위는 미군 철수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당국은 평화적 촛불시위를 통해 일구어낸 국민적 에너지를 겸손하게 수렴하여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한미관계를 자연스럽게 정립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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