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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09월
  • 2003.09.01
  • 1322

외할머니가 전해준 위대한 유산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가족 간에 여러 가지 호칭을 경험한다. 나는 부모님에게는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손자, 형제들 사이에서는 형과 동생, 이제는 남편과 아버지라는 이름도 가졌다. 그리고 언젠가는 할아버지라는 소리도 듣겠지. 생각해 보면 어느 관계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느 정도의 시점까지는 인간관계가 넓어지면서 내가 듣는 호칭 또한 늘어나지만, 때가 되면 서서히 줄어들고, 죽음이라는 문 앞에 서는 날에는 이러한 모든 호칭과도, 나를 부르는 이들과도 이별을 준비해야 하리라. 때로는 갑작스런 질병과 사고로 가족과 이별하며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떠나간 사람이 살아간 삶의 흔적은 우리 삶 속에 그대로 남아 많은 영향을 준다.

오늘은 2003년 8월14일. 광복절 하루 전날이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되기 바로 전날이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이 겪은 많은 고통이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고통은 가족간의 생이별이 아니었을까. 강제로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총알받이로, 힘든 노동자로 끌려간 나의 형, 나의 아들, 나의 손자, 나의 오빠, 나의 아버지, 일본군의 성 노예로 끌려간 수많은 나의 딸, 나의 누나, 나의 손녀….

올해는 특별히 광복절의 의미가 내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작년엔 9월 평양에서 열린 <2002 MBC 평양 특별공연>을 통해, 올해는 6월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6·15공동선언 3주년 기념, 윤도현 밴드와 금강산가극단 ‘향’의 <오! 통일코리아>공연을 통해, 눈으로 귀로 몸으로 아니 영으로 민족의 갈기갈기 찢겨진 상처를, 지금도 살아 흐르는 민족의 억울한 선혈을 보고, 듣고, 느끼고, 울었기 때문이다.

광복절 하루 전 당시의 피해자이며 증언자이기도 한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상임이사 이희자(61세) 씨를 만나며 일제식민지 시절의 많은 피해자들에게 너무나 무관심했고 무지했던 그간의 내 삶이 낯뜨거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 또한 같은 피해자면서도 말이다.

청량리에 있는 이희자 씨의 사무실을 찾았다. 내일이 광복절이라 그런지 수많은 전화통화로 아주 분주하셨지만 시원한 냉커피로 더위부터 해결해 주셨다. 그리곤 조용한 방에서 마치 나의 질문에 미리 준비라도 하신 것처럼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말씀을 해주셨다. 입을 열기 전 잠시 눈을 감으시는 모습에 나와 황지희 기자는 1940년대 그 시절로 이끌렸다.

징병으로 끌려가신 아버지

이희자 씨의 아버지는 강화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를 지었다. 딸의 첫돌이 막 지난 1944년 2월 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던 날 아버지는 이희자 씨와 어머니를 외갓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이 없는 곳에서 어머니가 혼자 겪을 지도 모를 시집살이가 걱정되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두 통의 편지를 보내 왔다. 당시에는 문맹이 많아서인지 가족들은 아버지가 북해도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걸로 알았다. 해방을 맞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았다.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기록도 찾지 못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베와 인조를 짜면서 생활고를 해결하셨다(이야기를 하시다가 잠시 멈춘다. 눈을 감으셨다. 눈가의 흔들림이 보인다. 다시 말씀을 하기 시작하신다). 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나중에 어느 기록을 통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지내는 가운데 외할머니께서는 아버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외할머니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정확하게 해 주셨어요. 외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어요. 외할머니는 식사를 하다가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곤 하셨어요. ‘이 반찬은 네 아버지가 참 좋아하는 거였지. 참 잘 먹었는데…’라는 식으로요. 외할머니가 아버지 이야기를 하실 때의 모습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고, 사위인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서 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며 살았죠.”

그러면서 6·25를 만났다. 강화도에서 날아다니는 포탄과 총소리, 군복을 입은 군인을 보면서 이희자 씨는 태평양전쟁에 끌려간 아버지를 상상으로 만나게 된다. 해방이 됐는데도 아버지가 못 오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가족 모두는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상처

“계집애 하나 길러서 시집보내고 나면 뭐하겠어요? 저 계집애 믿지 말고 좋은데 있으니까 재혼하세요.”

시간이 흘렀다. 화롯가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머니들의 말에 이희자 씨는 잊지 못할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지금 그림으로 그려도 그릴 수 있을 정도의 생생한 상처였다. 어머니는 재혼하기 전 아버지 이야기를 전혀 안 했다. 대신 어머니는 가끔 이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니가 딸이 아니고 아들이면 그냥 힘들어도 살겠다. 안정된 가족을 만들어 너하고 같이 살기 위해서라도 재혼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가 재혼을 결정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는 친할머니의 냉대였다. 며느리가 복이 없어서 아들이 죽었다면서 할머니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힘들게만 했다. 어머니는 이것을 평생 원망스럽게 생각하셨다.

어머니가 재혼을 결심하던 날 밤의 이야기다. 그녀가 열 살 되던 해였다. 어머니는 이희자 씨를 아버지가 떠나시던 들판에 데리고 가시더니 갑자기 다 큰 딸을 업고 조용히 걸으셨다고 한다. 갓난아이 때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업히던 날, 이희자 씨는 그것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기억했다. 어머니의 사랑…, 옆에서 듣고 있던 황지희 기자가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가 재혼해 옮겨간 집은 같은 강화도에 있었다. 외할머니댁에서 찾아가려면 징용간 친아버지 고향을 지나야만 했다. 새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힘들었지만 이희자 씨는 그대로 어머니를 따랐다. 어머니가 속상해 하실 일은 전혀 하고 싶지 않았다. 울고 싶거나 생각하고 싶을 땐 마당에 있는 화장실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당시 강화도는 교육수준이 낮았다. 주위 어른들의 이야기가 아직도 가슴에 박혀 있다.

“남자면 억지로 가르치겠는데 계집애를 가르쳐 놓으면 연애질이나 하고….”

이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했다. 성적도 충분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지만 새아버지는 중학교를 보내주지 않았다.

아버지를 되찾아 준 할머니

자! 이제 2003년 8월로 돌아와서.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라나는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어했다. 얼마나 가정이 소중한지, 부모 밑에서 공부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말이다. 또한 일본을 상대로 자신의 과거와 아픔을 누구 때문인지 생생하게 증거하고 싶었다.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에게 들은 친아버지 이야기가 지금 60살이 넘은 제 삶에 큰 재산이에요. 돈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지만, 마음 속 재산은 누구도 가져갈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외할머니가 해주신 아버지 이야기나, 사랑하는 사위에 대한 할머니의 진심어린 표현들이 제가 커서 가정을 갖고, 자식을 키우고, 이런 운동을 하다 보니까 얼마나 따뜻했는지 새삼 느껴요. 열 살 어린 시절에 들었던 그 말들이 내 삶에서 소뼈다귀 우려내듯 우리고 우려도 끝이 없고, 샘을 파고 또 파도 샘솟는 그런 교훈이었던 거에요.”

아버지를 본 적도, 같이 살아본 적도 없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가슴 가득 채우고 사는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애절한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는 많지 않을 듯하다. 역설적인 축복이랄까. 불운한 시대, 불운한 나라에서 태어나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함을 체험한 딸이 외할머니의 넓은 사랑으로 올바른 아버지상을 가슴에 품게 되고, 그 아버지에게 받은 힘으로 웅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준 외할머니. 그분의 사랑 앞에 경이로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외할머니의 큰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 하는 딸의 인생에 지금도 밝은 불빛이 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다

“만약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나를 딸이라고 해서 그렇게 차별하셨을까? 그럼 딸이라서 자식 노릇도 제대로 못 한다는 말인가? 아들 못지 않은 자식 노릇을 해야겠다고 여러 번 다짐을 했는데 생활여건상 마음 먹은대로 안 되더라고요.”

어머니의 재혼으로 받은 상처는 이희자 씨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게 1989년부터 2003년까지 약 15년 간 아버지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어느 곳에서, 왜 돌아가셨을까? 돌아가실 때는 어떤 모습이셨을까? 그것을 알고 싶었고, 그 때문에 이희자 씨는 지금까지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92년쯤에 아버지의 사망기록을 찾았다. ‘1945년 6월 11일 중국 광사성에서 사망. 본적 경기 강화면 송해면. 호주 이삼봉’ 이것이 전부였다. 그 후 계속 아버지의 죽음을 좇으면서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와 시민단체와 교류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일장기가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일본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고, 나부끼는 일장기만 봐도 핏덩어리가 퍼덕이는 것처럼 느껴졌을 정도로 분노했다. 그러나 일본 사람 모두가 잘못한 것은 아니고, 침략전쟁은 그 나라 정치인들과 소수의 나쁜 사람들이 일으킨 것이며 침략 당한 나라의 민중뿐 아니라 침략자들 또한 많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렸다. 일본 방위청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정확하게 기록한 자료를 찾은 것도 일본인의 도움 덕택이었다. 아버지가 배치됐던 부대명과 부대의 배치도며, 집에서 출발해 용산을 거쳐 부대에 배치되기까지, 그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록들 속에는 정말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도저히 용서 못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의 생사를 알 수 없어 겪어야 했던 가족들의 고통과 아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재혼하기까지 어머니를 괴롭혔던 여러 힘든 일들, 그것만 생각해도 화가 나는데, 아버지의 명부를 가족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멋대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해 놓은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곳인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자들의 위패가 모여 있는 군국주의 얼굴이 아닌가! 왜 끌려갔는가는 따지지 않더라도 왜 가족에게 안 알렸는가! 합사된 일본인가족들에게는 안내장도 보내고 참배통보도 하면서 이국 땅에서 죽은 것도 억울한 조선사람의 가족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일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야스쿠니에 합사해 놓고 천황을 위해 성스럽게 충성하다가 죽었다고? 억울하게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의 발목을 잡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

이희자 씨는 아버지의 명부가 합사된 것을 알고부터 소송준비를 하고 있다. 야스쿠니를 건드리는 건 일본 천황의 심장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법정투쟁을 준비하는 그녀의 눈빛에서 살아있는 독립투사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우리민족의 독립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3년 4월8일, 아버지의 마지막 기록을 찾았다. 1993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전해 받은 기록이다. 1944년 2월 15일 징병되던 날로부터, 1945년 6월 11일 중국 광서성에서 총상을 당해 병원에서 치료 중 파상풍으로 죽기까지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가 기록을 넘겨 받은 지 거의 10년 만에 찾은 내용이다. 한국정부가 기록을 처박아 놓고 찾아줄 생각도 안 한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 동안의 남모르는 투쟁의 결과였다.

지금 남한에만 존재하는 일제 징병이나 징용 피해자 수는 약 70∼80만 명 정도라고 한다. 남북한을 합치면 대략 120만 명 정도. 그러나 상황은 피해자 단체끼리만 운동하기에 너무나 열악하다. 당시에 공부를 하지 못해 글을 읽지 못 하는 분들이 많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고, 오랜 시간이 흘러 그 때의 아픔도 망각 속으로 묻히고 있다. 누군가 도와야 한다며 이희자 씨는 다른 시민단체들과의 연대를 강조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후련하다. 여장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61세는 아직 한참 젊다는 느낌을 똑똑히 받았다. 이희자 씨는 첫 째로 책을 내고 싶다고 한다. 말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시대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며. 두 번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중국 광사성에 가서 아버지를 위해 정말 원 없이 추모제를 올리고 싶다고 했다. 세 번째는 1994년 6월 12일에 공비석을 만들어 놨는데 야스쿠니 명부에서 철폐되는 날, 그곳에 아버지 이름 석자 달아드리는 것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보상받는 데만 눈을 돌리지 말았으면 해요. 보상이라는 게 여러 가지 형태가 있거든요. 명예를 회복하는 것도 보상이요, 가족을 찾는 것도 명예회복의 일환이고. 내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만으로 행복할 수 있듯이, 내게 어떤 가치가 있느냐에 따라 보상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거든요. 꼭 현찰을 손에 쥐는 것만이 보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순수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운동이나 예술은 순수함에 그 생명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돈은 쫓아오는 것이지, 결코 쫓을 대상이 아니다.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 밖에 없단다. 오히려 내게 묻는다. “아버지 곁으로 가야 할 날이 다가오는 데 어떡하나요?”

현실

어제는 태평양전쟁 때 강제징병과 강제노동으로,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일본으로부터 사죄와 보상을 받아내기 위해 정부의 무성의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국적포기서를 제출하려 했다. 물론 실패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상황이 얼마나 처절하고 간절했으면 국적 포기까지 갔을까.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일본에서는 강제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간 재일동포들의 손녀딸들이 테러와 폭력에 떨고 있다.

역사의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당하고 살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서두에 말했다. 나는 갈기갈기 찢긴 민족의 상처와 마르지 않은 선혈을 보고, 듣고, 만지고 왔다고. 일본 사회에서도 이러한 일들에 가슴아파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연대해서 싸워야 한다. 일본의 매스미디어들은 거짓을 말하고 진실을 외면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많은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서는 아직도 태평양전쟁시대의 일본 앞잡이가 판을 친다. 조금만 자세히 살펴 보라. 보인다. 이희자 씨의 외할머니가 들려준 아버지의 이야기는 한 여인의 인생을 통해 이 땅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아버지들의 한을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살아서 전해주는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욱 큰사랑을 경험한 것은 외할머니가 전해준 위대한 사랑이자 유산이었다.

이제 내가 그 유산을 물려받는다. 나는 독립군이다. 2003년 8월 15일.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태평양전쟁시대의 전범자들을 물리쳐라.

내 안에 숨어있는 일제의 잔재부터 청산하자. 우리 한민족의 하나됨과 이 땅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

박태희 윤도현 밴드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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