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8월 2003-08-01   1212

추억을 파는 가게

누군가가 말했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고 귀를 막으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생각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미래를 발목 잡는 것은 현재가 아니라 때론 과거다. 우리는 항상 현재에 있지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미래 때문에 가슴을 졸인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른다.

한용운이 말했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색이다. 60억 명의 사람이 있으면 60억 개의 생각이 있듯, 첫 키스 하나에도 60억 개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 추억을 떨쳐버리고 싶을 때 내놓으면 당장이라도 팔아버릴 수 있는 가게, 대신 그 공간을 다른 사람의 추억과 바꿀 수 있는 가게가 있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물론 추억을 사고파는 가게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1년이 지난 기억만 버릴 수 있고, 어떤 추억을 버렸는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남지 않아야 한다. 돈을 주고받아서도 안 된다. 대신 추억을 하나 내놓을 때마다 반드시 가게에 진열된 다른 사람의 추억을 하나 받아야 할 것!

추억을 파는 사람들과 추억을 고르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람들은 주로 어떤 추억을 버리려고 하고 어떤 추억을 담아가려고 할까? 추억을 파는 가게를 한번 훔쳐보자.

수험생이라면 합격의 기쁨을 여기 저기 전하는 누군가의 추억을 얻으려고 매일 가게를 들락거릴지 모른다. 반대로 일부러 실패로 고통받는 사람의 추억을 얻어 공부가 힘들 때마다 자극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지난 사랑의 추억을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신혼부부들도 생길 수 있겠다. 취직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스무 살 초입의 청년들이 가졌던 열정들을 하나라도 더 모으고 싶을 것이다. 삶이 너무나 지루하고 답답한 사람들은 새로운 자극을 찾기 위해 이 가게를 찾을 것이다.

타인에게 준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때의 기억을 당장 가게에 가서 팔도록 하자.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자신만 갉아먹을 뿐이다. 깔끔하게 잊고 새 출발 하는 거다. 반대로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를 준 사람의 기억을 받아보는 게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단지 실수였을 뿐이라는 걸 알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질 테니까.

아, 가게 한 편에 있는 ‘추억자랑 코너’도 볼거리가 쏠쏠할 것이다. 해가 어둑어둑 질 때까지 골목에서 뛰놀던 기억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알콩달콩한 문자메시지, 사춘기 시절 친구 집에 몰려가 밤새도록 수다떨며 우정을 다지던 밤, 모든 것을 잊게 해주었던 낯선 여행지에 대한 기억…. 버리기는커녕 가슴속에 묻어 두고 언제나 꺼내보고 싶은 즐거운 추억들이 우리들 가슴엔 무궁무진하다.

가게를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홀가분해 보일 것 같다. 버린 추억에 미련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새로 산 추억에 대한 기대가 더 클 테니까.

원주에 살고 있는 황건평(28세) 씨는‘첫사랑 납치 버스’를 운전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신이 만나고 싶은 첫사랑을 등록하면 그들을 모두 납치해 관광버스에 싣고 다니면서 한 사람씩 신청한 사람의 눈앞에 내려주고 싶다고 한다. 우리 모두 몸조심해야겠다.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첫사랑일 수 있으니까. 추억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나 보다.

황지희(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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