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1월 2002-10-30   523

한국의 룰라를 기다리며 – 브라질 대선 노동당 활동 참가기

브라질 대통령선거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이 대단하다. 국토, 인구, 경제규모 등에서 남미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국일 뿐만 아니라 미국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다고 분류하는 이 나라에서 좌파정당인 브라질 노동자당(PT, 뻬떼)의 룰라 후보가 1차 선거에서 5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PT의 룰라 후보는 지난 10월 6일 치러진 1차 선거에서 46.4%의 지지를 얻었다. 과반수의 지지를 얻어 1차 선거에서 당선을 결정짓겠다던 PT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선거 직후 3위를 차지한 가로딩뇨와 4위인 고메스가 2차 선거에서 룰라를 지지하기로 선언해 당선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룰라를 절대 찍지 않겠다는 유권자도 38%로 역대 어느 선거 때보다 낮다. 10월 5일자 『이코노미스트』는 룰라의 당선을 예상하면서, 룰라의 승리는 브라질 민주주의의 승리가 될 것이고, 변화를 상징하는 노동자당의 집권은 건강한 정권교체를 상징한다고 전했다.

PT는 이밖에도 이번 총선에서 2명이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8명이 주지사 2차 선거에 진출해 주지사 3명인 현재보다 나은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상원 선거에서도 10명을 당선시켜 기존의 4명을 포함해 두번째로 많은 상원의원을 거느린 정당이 되었다. 하원에는 91명이 진출해 제1당이 되었다. 이쯤 되면 PT가 브라질의 수권정당이 되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국내에서도 대선 논의가 한창이던 9월 초순 브라질 연수단을 구성했다. 짧은 기간에, 그것도 선거 막바지라 더욱 더 경황이 없을 그곳에 가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따랐지만 PT에 대한 연수단원들의 관심은 매우 높고, 다양했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노골적 위협에 대한 PT와 룰라 후보의 대응방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브라질의 선거제도와 정치상황, 대선 전략, 다양한 당내 정치세력과 PT의 운영원리, PT와 노동조합의 관계, 지방자치와 참여예산제, 노동유연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PT의 전략도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연수단의 이러한 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PT가 창당 22년 만에 대권도전 4수째인 룰라를 내세워 집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역사적 상황이다. PT의 도전과 현재진행형 실험은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미래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브라질 연수단은 역사의 현장을 향해 27시간의 비행을 시작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도시 상파울로

꼬박 하루하고도 세시간의 비행 끝에 연수단은 상파울로의 과룰로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CUT(Cental Unica De Trabalhadores 노동자단일연맹)의 국제담당비서인 켈트 야콥슨 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야콥슨 비서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한 인상이었지만 알고 보니 CUT직무대행까지 맡았던 고위인사였다. 숙소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차창으로 상파울로 거리를 볼 수 있었다. 낡았지만 모든 육교가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어져 있었고, 스쳐 지나가는 시내버스 중에는 휠체어 표시를 붙인 장애인용 저상버스도 섞여 있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상파울로는 ‘성장을 멈춘 메트로폴리탄’처럼 보였다. 중심가의 많은 고층건물 외벽은 차가운 콘크리트 그대로였고 군데군데 비어 있는 건물도 눈에 띄었다.

브라질은 지금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70년대 중반까지는 7∼8%의 고도성장을 이뤘으나 지난 10년 간은 성장률이 평균 2∼3%에 머물렀으며 현재는 불황 속에서도 물가는 계속 뛰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에 있다. 종속이론가로도 유명한 카르도조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은 심각한 재정적자와 국내산업의 몰락, 실업률 상승을 몰고왔다. 2000년도 실업률이 15%에 이르렀으며 지난 5년 간 국민의 실질소득은 계속 줄어들었다. 상, 하위 20%의 소득격차가 26배에 이르고 빈곤선 이하의 인구가 5300만 명, 그 중 기아선상에 있는 국민이 2300만 명이다. 비공식부문 노동자 문제 또한 심각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전체 노동자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이들의 평균임금은 노동자 평균임금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브라질 국민의 75%는 정부 정책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으며, 이번 대선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다. 2500억 달러에 이르는 공공부채는 외국투자가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그 중 약 50%는 달러와 연동되는 빚이어서 환율인상과 함께 공공부채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1차 선거 직후 환율이 급등하는 등 경제 불안정은 계속되고 있다.

룰라의 경제정책자문관인 안토니오 프라도 씨는 “새로운 경제개발모델을 통해 고용창출, 소득증가, 경제성장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경제정책이며, 성장 회복 자체가 새로운 도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집권하는 첫해 수출 촉진과 수입 대체에 힘써 외국은행의 신세를 지지 않고 국제수지 흑자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곤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연수단의 여러 가지 질문에 끝까지 신중하면서도 솔직한 대답을 해준 그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민주노동당을 찾았던 바깥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고 돌아갔을까.

민주주의와 투명성으로 얻은 PT의 정치적 신뢰

결국 브라질 유권자의 50% 가까이가 현재의 경제난국을 타개할 세력으로 PT와 룰라를 선택했다. 왜일까.

브라질 민주화운동의 성지인 세(SE) 광장 옆에 있는 PT 당사 로비는 붉은 색을 주색으로 단장되어 있고 층마다 부서별 방이 배치되어 있다. 컴퓨터와 서류들, 각종 자료, 홍보물품으로 가득 찬 사무실 풍경이야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전국민의 평균교육 년수가 4년인 브라질에서 대학을 나온 유능한 활동가들이 PT에 몰려들고 있다. 집권이 가까워옴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PT 국제국에 소속돼 우리 연수단을 맡았던 스물세 살의 청년 장(Jean)도 그들 중 하나다.

한국의 노동자 정치세력화과정을 논의할 때 비교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이 PT의 창당과정이다. 1978년 브라질 노동자대투쟁이 PT의 창당으로 이어진 반면 한국의 87년 노동자대투쟁은 그렇지 못했음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룰라는 노동자 계급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주도하며 정치적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우리는 어떤가? 유럽의 사회당과 사민당, 노동당의 집권 소식을 새로울 것이 없는 뉴스로 받아들이면서도 정작 안으로 눈을 돌리면 계급적, 이념적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아직도 개인의 개혁을 말하는 소위 비판적 지지가 횡행하고 있다.

이미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마당에 굳이 지난 역사를 들먹이며 한숨쉬고 있을 까닭은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PT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정치적 신뢰를 쌓아왔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PT의 노동위원장이자 CUT 금속노조위원장인 헤이퀴베르트 귀바 씨는 “지방정부 운영의 민주주의와 투명성 확보, 반부패 정책 연구가 PT 성장의 요인”이라고 말한다.

PT에는 이번 선거전까지 주지사 3명을 포함해 지방자치단체장 187명이 소속되어 있으며, 이들 자치단체에 속하는 인구가 약 5000만 명이다. 지난 82년 처음으로 지자체장을 낸 이래 지자체 운영에 대해 고민을 거듭한 결과이다. 돌이켜 보면 90년대 초 한국에서도 PT의 ‘민주주의와 함께 실현되는 사회주의’ 이념모델과 유사한 것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그것을 안정적이고 구체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PT는 창당 때부터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다양한 사회운동과 가톨릭교회운동이 함께 해오고 있다. 이것이 PT의 정치적 강점이다. 83년 PT를 창당한 주도세력에 의해 결성된 CUT는 1지역 1산업노조와 산업별 전국노조만을 인정하는 브라질 노동법 체계에서 법적으로는 임의조직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정부로부터 국제노동기구(ILO) 대표 파견을 제의 받을 정도로 역량이 강하다.

브라질의 노동조합은 1930년대 이탈리아 노동법을 모델로 88년까지 지속된 국가조합주의의 흔적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연수단이 묵었던 숙소에서 세광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1920년대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상파울로 최초의 고층빌딩이 있다. 이곳에는 지금 CUT소속의 금융노조연합이 들어 있다. 매일 오전 6시면 금융노조연합이 제공하는 300개의 일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한 줄로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현행 브라질 선거법은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노조가 PT를 재정, 조직적으로 지원할 수 없게 돼 있는 것이다. 야콥슨 씨는 “PT를 지원할 때는 조합원이 아니라 당원 신분으로 한다”며 그러나 “이 법은 곧 개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CUT의 지도부는 정치적 자율성(다양한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다. 다수가 PT를 지지하지만, 약 15%는 공산당 지지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11월 400명 가량이 모인 가운데 열린 준조합원 총회(Small Congress)에서 CUT는 처음으로 PT에 대한 공개지지를 천명했다.

한편, PT는 주거권 투쟁, 교육운동, 장애인 운동, 보건운동, 체육운동, 교통운동, 동성애 운동, 원주민 운동, 미디어 운동을 담당하는 ‘전국사회운동부서’를 당의 기관으로 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분야별 연구와 정보 수집, 캠페인을 담당하고 있다. 연수단 일행으로 참가한 위덕대 오삼교 교수는 이들이 PT를 함께 창당하면서 소속 부서가 되었다고 설명해주었다.

룰라를 지지하는 기업가 모임

우리의 통념으로 볼 때 낯선 풍경을 발견하는 순간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일도 있다. 브라질의 정치상황도 그렇다. 룰라를 지지하는 기업가 모임(CIVES)이 대표적이다. 브라질의 금융부문은 생산부문에 적대적이다. 일반국민에 대한 대출 금리가 40∼60%며, 신용카드 이자율은 250%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업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실제 룰라가 부통령으로 지명한 조제 알렌카는 “이윤을 추구하지만 부정한 방법과는 거리가 먼 좋은 기업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은 PT의 좌파동맹 세력의 하나인 브라질 공산당(PC do B)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분위기다. PC do B를 방문했을 때 자신을 사회정책운동담당이라고 소개한 간부는 “룰라의 경제정책은 브라질 민중의 삶을 개선시킬 것이며, 이번 대선은 기업가들이 민중에게 기여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견 낯설어 보이는 이 정치동맹은 브라질 정치역학 구도에서 30%의 우익진영을 고립시키고, 룰라의 고정지지층 30%뿐만 아니라 부동층 40%의 일부로부터 지지를 끌어낸 성공적인 전략임이 1차 선거에서 확인되었다.

룰라와 PT의 앞길에는 2차 선거에서의 승리 이후에도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브라질의 현 상황은 현실에 발 딛고 한발씩 앞서가는 사회개혁을 원하고 있다. 밖으로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통해 브라질 시장을 넘보는 미국과 초국적 금융자본의 위협으로부터 경제안정의 연착륙을 시도해야 한다. 89년 첫 대선에서 룰라는 ‘국가채무의 이자지급 중지’를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13년이 지난 지금 룰라는 변화된 현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안으로는 빈곤층에게 식량과 주택을 성공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중장기 경제성장을 위한 투자도 병행해야 한다. 대표적인 분야가 교육이다. PT는 1500만 명에 이르는 문맹자의 해소, 최저임금과 연동한 교육기회의 제공, 정규교육기회를 놓친 사람들에 대한 별도의 교육시스템 마련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적자원의 질을 시급히 향상시켜 잠재성장력을 키우고자 하는 PT의 현실적 고민을 보는 느낌이다.

민주주의와 참여를 바탕으로 한 PT의 이러한 실험은 한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경제분야 대선 공약의 기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PT와 민주노동당의 실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고민에 그치지 않고, 중단 없이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박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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