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1월 2001-11-29   938

반테러 전쟁과 미국독주의 세계질서

결국 미국 테러사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테러 이후 평화와 반전을 주장하는 신중한 이성적 움직임도 있었지만, 국민의 90%가 철저한 보복과 응징을 원하는 상황에서 ‘반테러 전쟁’을 막기에는 이것 역시 역부족이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의 현실과 할리우드 영화는 점점 서로 닮아가고 있다. 테러를 소재로 한 그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역은 아랍인들이 도맡아 했다. 그들은 비행기를 납치하고(<델타 포스>, <화이날 디씨전>), 고층건물을 점거하거나(<트루 라이즈>), 버스와 초등학교를 날려 버린다(<비상계엄>). 할리우드 영화의 관객들은 미국인의 편견이 담긴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은연중에 ‘아랍인=폭력의 화신’이라는 관점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왔다. 지금 무차별적 응징이라는 또 다른 폭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데는 할리우드 영화, CNN 등 미국매체들의 상징적 폭력이 한몫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테러사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결과의 비참함보다도 그러한 상황을 몰고온 원인과 배경이다. 궁지에 몰린 쥐가 죽음을 무릅쓰고 고양이에게 달려드는 상황에 비유되는 테러는 강자들이 취하는 방법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 몰린 약자들의 마지막 수단이다. 이슬람 전문가 이희수 교수는 “테러라는 현상에만 주목한다면 오히려 본질을 놓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그는 문명충돌론을 내세우는 헌팅턴의 시각과는 달리 “중동에서 벌어지는 폭력사태는 종교나 문명의 갈등이 아니라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의 생존권 투쟁”이라고 강조한다. 이번 테러도 궁극적으로는 그 뿌리가 오랜 중동분쟁과 미국의 편파적인 중동정책에 있는 만큼, 이스라엘-미국-아랍권의 삼각 갈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태의 본질조차 파악할 수 없다.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의 생존권 투쟁

테러의 근본적인 원인을 미국의 중동정책으로 보는 입장을 미국측 주장과 함께 균형 있게 경청하지 않는다면 평화의 실마리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강한 자, 칼 쥔 자의 편이다. 일찍이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 경이 갈파했듯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는 국제정치”의 현실은 더욱더 냉엄하다. 이슬람 형제국인 파키스탄마저 국민들의 반미시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는 대가로 탈레반 공격을 위한 기지를 제공했다.

비행기가 마천루를 들이받고 세계최강국의 주요건물이 무너지는, 그야말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은 테러 발발 후 TV를 통해 수없이 방송되었다. 수십 번 반복된 이 장면은 시청자들의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시켜 버렸고, 온종일 미국 언론에 노출된 지구촌은 미국인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그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분노하는 공동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CNN 등 미국 언론을 통해 연일 여과 없이 전해지는 이런 시각은 결국 미국인의 시각이며, 반쪽의 진실에 불과하다. 미국이 당하면 인류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고 이라크나 아프간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은 정의로운 십자군전쟁이란 시각은 냉전시대 매카시즘의 논리만큼이나 위험한 발상이다. “이슬람=테러옹호세력, 반미=자유에 대한 위협”이라는 오만하고 일방적인 미국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방적인 폭력만으로는 분쟁이 일어날 수 없다. 모든 분쟁에는 상반되는 두 관점과 적대적인 두 당사자가 존재한다. 특히 종교분쟁이나 민족분쟁같이 근본적이고 역사적인 분쟁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 하는 상대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정의와 불의, 우리편과 적, 자유와 폭력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은 문제의 본질을 밝히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는 상징적 조작에 불과하다.

미국은 자유와 인권이 아닌 국익만 추구

이번 테러사건에 이어 벌어진 무자비한 보복전쟁은 냉전 후 세계질서의 은폐된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이 시점에서 인류가 탈냉전 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하지 않는다면, 21세기는 20세기보다 더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광적인 세기가 될 수 있다. 미국이 비도덕적인 테러를 당한 것도 사실이고, 이런 식의 테러가 비난받아 마땅한 추악한 범죄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미국 역시 요인암살, 무차별공습, 대규모 인명살상, 반정부 무장세력 지원 등 그간 비도덕적인 폭력과 무고한 희생을 무수히 저질러온 나라였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 앞에서 우리는 좀더 이성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정부도 미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임을 분명히 했지만, 미국 편에 서는 것이 반드시 자유와 정의의 편에 서는 것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적어도 그런 가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미국의 정책은 항상 정의로워야 하며 미국이 보편적인 자유와 인권을 지키는 국가임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냉전 이후 그간 미국의 행보와 대외정책을 살펴보면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미국이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나 이라크의 후세인은 사실상 미국 자신이 키운 세력이다. 불과 10여 년 전만하더라도 미국은 이들에 대해 대대적인 정치적·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사회주의정권인 나지불라 정권을 붕괴시키고자 탈레반 세력을 노골적으로 지원했고, 호메이니 주도의 이슬람혁명으로 들어선 반미 회교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라크의 후세인을 전격 지원해 이란-이라크 전쟁을 부추겼던 장본인은 다름 아니라 미국이었다. 어제는 이라크나 탈레반을 혈맹처럼 지원하다가 오늘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반인륜국가로 몰아세우는 것은 ‘정의’의 논리가 아니라 ‘미국의 국익’만을 앞세운 논리이다. 테러공격에 직면한 부시 행정부는 도덕과 인권을 운운하던 모습은 저버린 채, 오로지 오사마 빈 라덴과 그를 비호하는 반미 탈레반 정권만 응징하면 된다는 막무가내식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세계를 향해 ‘미국 편과 테러 편 중 하나를 택하라’는 식으로 위협하며 편가르기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자신이 테러국으로 지명한 시리아, 수단, 리비아에게까지 협조를 구하고 있다.

공포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테러전쟁 이후의 세계질서는 이제 자명해졌다. 더 이상 미국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의한 질서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자유와 민주, 기독교와 이슬람, 인권과 독재 등 다원적인 갈등 구도는 점점 무색해지고, 결국은 종교, 문명,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반미-친미라는 유일한 갈등구도로 세계가 이분될 수밖에 없다. 냉전시기 세계질서는 잠재적인 분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이라는 서로 견제가능한 두 초강국의 역동적인 균형으로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만이 유일강대국으로 남은 현재의 세계질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는 공포의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이다. 미국의 힘 앞에서는 국제연합이건 나토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며,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이제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되면서 국제사회에는 친미와 반미만 있을 뿐이며, 친미 국가는 우방과 맹방으로 나뉘어진다. 영국의 경우는 미국보다 더 미국의 이익을 적극 챙겨주는 소위 맹방이며 적극·절대 지지라는 성명만 내고 실제로 나서지는 않는 프랑스와 독일은 실속파 친미우방이다. 그 외에도 미국 눈치만 살피는 소극적 친미,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친미 등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결국 국제사회의 유일한 척도는 친미인가 반미인가이다. 테러와의 전쟁도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반미 이슬람근본주의와의 전쟁이다. 자살테러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곪아터진 국제분쟁의 근본 원인은 미국의 오만과 극단적인 패권주의이기에, 반테러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빈 라덴을 제거한다고 해도 문제의 본질은 여전히 남을 수밖에 없다.

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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