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2월 2002-12-01   1443

우리들의 “님” 이 안 보인다

이야기 하나, 쌀은 한국의 하늘이다.

광주시 변두리 연꽃마을 저수지 둑. 일흔을 넘긴 한 할아버지가, 묵묵히 그러나 바지런히 벼 말리기 작업을 한다. 벼 낟알들이 햇살을 받아 참 곱고 예쁘다.

“할아버지, 올해 농사는 정말 풍년이군요. 벼 낟알 하나 하나가 튼실하게 여물지 않은 것이 없군요. 이런 나락으로 밥을 하면 기름이 좌르르 흐르겠습니다.” 나 또한 신이 나서 당그래(벼 말리는 도구)를 잡는다. 나락을 비닐멍석 위에 고르는 작업을 한다. 이래서 농부들은 농사일을 ‘자식농사’에 비유했는지 모른다.

30여 분 흘렀을까. 까만 승용차 한 대가 가까이 와서 멈춘다. 30대 중반의 남자가 내린다. 할아버지께서는 첫째 아들이라고 말한다. 아들은 현재 광주에서 H투자신탁회사를 다니고 있단다. 아들은 농사에서 ‘손 놓지 못하는’ 자신의 아버지가 답답하고 서글프다는 표정이다.

“농사지어 봤자, 결과는 ‘흉년’입니다. 정부의 ‘쌀정책’은 정말 실망입니다. 언제는 식량안보를 위해 새만금간척사업을 꼭 밀어붙어야 한다더니, 이젠 쌀이 남아돌아 증산위주에서 품질위주로 정책을 바꾸고 수매값도 동결한답니다. 2004년부터는 현행 약정수매제 대신, 시가로 매입·방출하는 공공비축제를 시행할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근시안적인 정책입니까.”

할아버지 아들의 말을 듣던 나는 한국의 식량사정이 안심할 수준이 아님을 상기한다. 콩·밀 등과 같이 계산해 2000년 현재 한국의 식량자급도가 겨우 28.5%뿐이라지 않은가. 90년도의 43.1%에 비하면 엄청난 수치로 하락한 셈이다. 국내 곡물시장에서 미국 ‘카킬’의 점유율이 60%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고 한국은 미국의 곡물수입 4대 국가가 돼버린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미국은 심지어 향후 10년 후에까지 세계 각 나라의 기상이변을 관측하는 ‘기상정보 위성’을 띄우고 있으며 그것을 극비로 하고 있다. 이유는 가뭄·홍수 등 기상정보야말로 미국 농산물 수출과 가격변동에 ‘무지무지한 무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황하의 범람처럼 한반도 남쪽을 휩쓰는 중국농산물의 파고 속에서 한국농업은 안개 속 배다.

따라서 ‘쌀’마저 무너지면 한국농업은 완전히 무너진다. 쌀은 식량안보만 아니라 종국엔 ‘국가안보’마저 무너뜨리는 계기를 만든다. 쌀 문제는 이젠 농민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쌀은 우리의 마지막 하늘이다. 때문에 ‘쌀정책’을 제대로 펴야 한다는 것은 온 국민의 희망이다.

이야기 둘, 한국인은 유목민이 아니다.

유목민(遊牧民·nomads)이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가? 『이희승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유목민은 ‘목축을 업으로 삼아 일정한 거처 없이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풀이된다. 이 말 속엔 방랑자, 방황하는 사람들, 떠돌이족, 집시족, 보헤미안, 낯선 사람들, 혹은 나그네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한 군데에 거처를 잡지 못하고 집도 없이 언제나 떠다니는 사람들―그래서 한때 우리나라 감상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시인들은 가을날의 귀뚜라미를 두고 ‘에트랑제’라고 불렀는지 모른다. 문학적으로 그렇더라도, 요즘 들어와 부쩍 우리 사회에 ‘유목민’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 특히 도시의 뒷골목에 대거 출몰하고 있는 모습이어서 걱정이다. 지금까지 농경민처럼 안정을 누리며 살던 직장인들이, 그야말로 ‘철밥통’을 끄떡없이 지키며 살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막과 같은 길바닥으로 쫓겨나 유목민처럼 배회하고 있는 게 눈에 자주 띈다.

약육강식의 시장경제논리에 발목이 잡혀 구조조정을 당한 사람들, 실직자들, 노숙자들―아마 지금도 러시아의 소설가 투르게네프가 살아있다면, 그는 분명 그의 위대한 산문시 ‘거지”를 또다시 쓰고 싶을 것이다. 특히 제조업, 건설업, 유통업, 금융업 등에 계속 불어닥치고 있는 ‘실직의 바람’은 더욱 매섭게 느껴진다.

로마교황 바오르의 말씀이 떠오른다.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자인 사람들한테도 궁극적으로 환영할 만한 것이 못 된다”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설파했듯이, 결국 모두를 위하여 “우리는 지금 주위를 한번쯤 둘러보는 사랑과 배려의 자세가 필요한 그 시점”에 도달했다.

미국 중심의 알량한 세계주의, 그러니까 세계화다, 국제화다 따위의 국적 없는 신자유주의 속에서 끝없이 추락해가는 ‘한국판 유목민’들을 정부는 정녕코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 정책이 이런 식으로만 가다가는 그 누구도 떠돌이 유목민이 아니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 셋, 님을 찾아 나서자.

만해 한용운은 시 ‘님의 침묵’에서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노래했다. 그 암울한 일본 제국주의 시대―만해 선생은 ‘님이 없는 세상’을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떠나간, 혹은 떠나가려는 님을 끝끝내 불러들이려는 몸부림을 보여주었다.

시대가 다르고 내용이 다르지만 요즘 사람들도 님을 잃고, 아니 님을 찾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는 것 같다. 정치가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경제가 뒤틀리고, 마음을 다스릴 문화의 혼마저 해체주의 상황에 놓여 있어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님(혹은 희망)의 옷자락을 잡지 못해 밤낮으로 비틀거린다. 사회 각 현장에 있어야 할 님이 도무지 보이지 않아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갈팡질팡하는 모습들이다.

예컨대 우리의 ‘하늘’인 쌀이 무너지고 있는데 그 쌀을 지켜줄 님이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아버지들이 구조조정이란 미명 아래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는데도 그 아버지들을 지켜줄 님이 보이지 않는다. 남북대화를 응원하기 위하여 세계의 양심과 지성은 한국에 ‘노벨평화상’을 주었는데도 남북문제 전망은 그야말로 첩첩산중 오리무중이다. 남남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그러나 정치가(정객)들은 잿밥에 눈이 어두워 현단계 ‘민족의 위기상황’에 속수무책이다. 정작 책임져야 할 그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한 채 일상인들처럼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한때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려서 세운 ‘문민 정부, 국민의 정부’가 일반 민중 혹은 대중과 너무 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선 노동현장에서 사람들은 ‘님의 행처’를 찾기 위해 오매불망 목을 길게 뽑고서 방황하고 있는데 이른바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사적으로도 거대한 폭풍우가 밀려오고 있는데 우리 민족을 이끌어갈 ‘님’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님의 가슴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님을 찾아가야 한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 삶의 현장에 님을 불러들여야 한다. 만해 선생이 그 암울한 시대에서도 님을 놓치지 않았듯이 우리는 님을 찾아나서야 한다. 위기의 상황이 몰아닥칠 때마다 어쩌면 더욱 가까이 찾아왔을 그 님을 기꺼이 맞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허상이 아닌 확실한 님과의 신방(新房)을 창건해야 하리라. 역사는 샤머니즘적 운명이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하고 몸부림치는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엄숙한 교훈을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 시점에 오늘의 우리는 고독하게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 모두 떠나보내서는 결코 아니 될 님을 찾아나서자.

김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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