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2월 2002-12-01   998

귀공자가 부르는 발라드는 황홀하다?

찬바람이 불면서 댄스가요가 주춤하는 사이에 차분한 선율의 발라드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다. ‘여름 댄스, 가을 발라드’는 새로울 것이 없는 주류 가요계의 흥행 경향이지만 최근 몇 달 간의 흐름은 여느 때와 달리 심상치 않아 보인다. 올초 등장한 신인 성시경은 TV와 라디오, CF를 오가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고, 조성모의 신보는 단숨에 정상에 올랐다. 뒤이은 김동률의 신보도 나오자마자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두고 ‘댄스가요의 위기’까지 들먹이고 있다. 발라드의 눈부신 선전은 단순히 계절의 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가창력이 떨어지고 걸핏하면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댄스가요를 팬들이 외면하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댄스가요 위기설과 발라드 열풍

최근 미디어와 기획사의 움직임도 이러한 진단이 성급한 예단만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초부터 문화연대를 중심으로 펼쳐진 ‘가요 순위프로그램 폐지운동’이 여론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다. 한 방송사는 마침내 자사의 순위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가수들 모두에게 녹음된 음악 대신 현장에서 육성으로 노래하도록 했다. 이런 움직임이 노래 실력보다는 시각적인 효과와 춤에 의존해온 댄스가요에 얼마만큼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댄스그룹인 HOT 출신의 강타가 리듬앤블루스로 전환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출시되는 댄스그룹의 앨범에 ‘생방송에서 그윽하게 노래하기 적합한’ 리듬앤블루스나 발라드 곡을 몇 곡 끼워 넣는 것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발라드의 호조’를 댄스가요의 위축에 따른 반사이익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올초 발라드 중심의 편집음반이 음반시장을 휩쓴 것에서 알 수 있듯, 시장을 움직이는 발라드의 잠재력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발라드는 대개 인간적인 것의 연약함에 호소한다. 노래에 등장하는 개인은 한결같이 상처받기 쉬운 감성의 소유자이고, 상실감을 마치 숙명처럼 지니고 있는 가녀린 영혼들이다. 이들은 자기 감정의 밑바닥까지 파헤쳐 그 안의 자기 연민과 상실감을 드러내 보인다. ‘벌거벗은 감정’은 그 자체가 강렬한 울림이 되어 고스란히 듣는 이에게 전해진다. 노래를 들으며 “아, 이건 바로 내 얘기”라고 공감하는 순간부터 자기 연민과 상실감은 ‘그의 것’의 아니라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노래를 부르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는 어느새 내밀한 소통이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발라드 역시 다른 가요들과 마찬가지로 미디어와 음반산업의 손에 고도로 통제되고, 매개되어 나타난다. 하지만 부르는 이와 듣는 이 사이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즉각적이고 사적이다. 이것이 발라드가 지닌 강력한 호소력의 비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발라드가 꾸준히 쌓아온 전통이고, 나아가 장르의 관습으로 굳어진 것이므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지만 서두에서 필자는 분명 최근 발라드가 주도하는 가요계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이야기했다. 왜? 결론부터 말하면, 발라드의 관습은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발라드는 대단한 혁신을 꾀하기 어려운 (또한 거부하는) 보수적인 음악이다.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발라드 자체가 아니라 이를 이끄는 면면들이다. 조성모가 자기를 노출시키지 않는 신비화 전략,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와 다름없는 뮤직 비디오, 해사한 미소년의 이미지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자작곡이라는 장치를 더해 고급스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몸에 꼭 맞는 의상은 ‘어린 왕자’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음악을 통한 상상적 합일

성시경과 김동률은 조성모가 밟아간 치밀한 이미지 전략 없이 귀공자란 칭호를 가뿐하게 거머쥐었다. 둘을 둘러싼 배경, 예컨대 8학군, 명문대, 유학생 등의 레테르는 음악에 앞서 그들만의 인상을 만들어낸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둘을 보면 그리 특별해 보일 것도 없다. 키가 훌쩍 큰 것을 제외하면, 성시경은 오다가다 만날 수 있는 참한 대학생의 모습이다. 김동률 역시 수줍음 많고 다소 예민한 청년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서양 음악(클래식이라 불리는)에 대한 조예를 느낄 수 있는 김동률의 음악은 ‘토이’나 ‘전람회’의 음악이 그렇듯 상당한 격조를 보여준다.

나직한 울림으로 이루어진 성시경의 노래는 ‘조성모 표(실은 이경섭 표) 마이너 발라드’에 비해 한결 쿨하게 들린다. 춤을 추어도 ‘학삐리’ 냄새가 폴폴 나는 성시경이나, 피아노를 치며 듣기 좋은 저음으로 노래하는 김동률을 보면 마치 이런 말이 들리는 듯하다. “너희가 진짜 귀공자를 아느냐?”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 하나. 이 둘이 다른 가수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상당히 고급스런 음악을 들려주고 있지만 발라드의 관습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한 게 그리 죄가 된다면, 몹쓸 병이라면 더 이상 나 가망 없는 삶이라오” (김동률 ‘레퀴엠’)

이 이상의 자기 연민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는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려주어야 노래하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 약한 모습이 아낌없이 드러나 있다.

성시경과 김동률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은 바야흐로 소녀에서 여성으로 옮겨가고 있는 스물 안팎의 여대생들이다. 이들은 둘의 음악을 들으며 ‘성인식’을 치르는 셈이다. 10대 소녀들의 음악이라던 발라드는 이렇게 해서 여피(yuppie·도시 근교에 사는 젊은 화이트칼라 엘리트층)여성들의 감성의 소통로가 된다. 성인의 관문을 통과한 여성들은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내밀한 소통을 한다(혹은 한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사려 깊고 명민한 남성이 나약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그 방식이 때로는 상투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결코 천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감정을 남김 없이 쏟아붓는 듯 하지만 어느 순간 절제할 줄도 안다.

이제 남은 것은 귀공자의 고독과 좌절에 동참하고, 자신들에게 환상을 덮어씌우는 일이다. 그 사이 노래하는 이는 어느 새 이상적인 이성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그와 나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감정의 끈이 이어져 있다. 이미 그의 좌절과 고독에 충분히 공감했으니까…. 음악을 통한 상상적 합일,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냉혹한 현실을 살짝 감춘 당의정, 발라드

그러나 낭만을 겹겹이 에워싼 껍질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지독한 현실의 속살이 드러난다. 노래가 끝난 뒤 남는 것은 이 귀공자풍의 가수들을 규정하는 ‘배경’이다. 이것들은 냉혹할 정도로 사람과 사람을 구별짓는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노래를 하던 이는 어느 새 오만한 귀공자의 자리로 돌아와 있고, 노래를 듣던 이는 호박으로 변해버린 마차를 고통스럽게 확인한다. 그들에게 쏟아부었던 환상은 끊임없이 구별짓기를 시도하는 이 냉혹한 현실을 살짝 감춘 당의정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환상은 현실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현실을 규정하는 강력한 기호들은 환상의 가장 유력한 재료가 된다는 것, 귀공자와 발라드가 만나는 풍경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박애경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