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1055

미안해요 베트남, 내일이면 늦으리

미안해요 베트남, 내일이면 늦으리

지난 9월 5일부터 7일까지 서울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에서는 평화포럼이 주최한 ‘동아시아 평화와 화해’라는 제목의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캐나다, 유럽연합과 한국 대표들이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참가자들은 “동북아 평화는 세계평화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정착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참석자 중에는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 재임시 동방정책 실천장관이었던 에곤 바(Egon Bahr)박사도 있었는데, 그의 말은 필자의 가슴 한 구석에 큰 울림을 남겼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은 남과 북 지도자는 물론, 국민들이 진정으로 과거사를 반성하고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베를린에 있는 리차드 폰 바이츠체커 전 서독 대통령의 사무실에 모여 옛 동·서독 국민들이 진정 회개에 기초한 화해를 이루고 있는지 얘기한다. 그리고 서독 출신의 지도자들은 동서독 국민에게 어떻게 해야 서로 마음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지 독일이 통일된 지 12년이 지난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바이츠체커 대통령은 재임시 전후 세대인 독일국민도 과거 독일민족이 저지른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전후 세대들은 그들이 비록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선조들이 유태인들에게 저지른 죄를 사죄하는 데 참여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우리나라를 떠올렸다. 그리고 일본과 독일을 비교하게 되었다. 우리는 최근 일본에게 전쟁중과 식민통치 36년 동안 저지른 죄를 사죄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은 전쟁을 정당화하고 제2차 대전 당시 공을 세운 군인들의 영령을 모셔놓은 야스쿠니 신사를 수상이 참배하고 있다. 그러니 제2차 세계대전을 함께 일으켰지만 독일과 일본의 전후(戰後) 태도는 여간 다른 게 아닌 것이다.

‘동아시아 평화와 화해’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인류가 지난 20세기에 무력과 전쟁으로 평화를 얻으려고 했지만, 전쟁의 한계를 깨달은 21세기에 진정한 평화는 대화를 통해 달성될 것이라고 결의했다. 그러나 우리가 벌인 전쟁은 정당한 것이고, 남이 저지른 전쟁은 부당하다는 자가당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베트남과 화해하려면

필자는 1982년 3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의 아시아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 이듬해 11월, 필자는 베트남으로 출장을 갔다. 5개월이 넘는 기나긴 비자 심사를 거쳐 어렵게 입국 허가를 받았는데 베트남 도착 첫날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둑(Thuc) 박사의 집무실을 예방했다. “한국인인 당신에게 비자를 줄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고심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나라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WCC는 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기관이기에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나는 우리가 정당하다고 여겨온 전쟁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나는 전쟁은 평화를 가져오는 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아로새겼다.

베트남전을 사실상 주도했던 미국에서도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만든 ‘베트남 평화위원회’가 전쟁의 참상과 비리를 폭로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 국민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우리 역시 우리가 참전한 베트남 전쟁의 비극을 인정하고 잘못을 사과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평화의 주춧돌을 놓는 길이며 인권 선진국의 면모를 갖춰나가는 길이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번 국빈 방문한 베트남의 천득령 국가주석에게 3년 전의 유감 발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김 대통령은 또 베트남 중부 5개 성(省)에 병원을 지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물론 이로써 우리가 과거의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왜냐하면 300만 달러의 병원 5곳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화해여야 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명예와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질병 문제는 별개로 다뤄져야 하며 그것 또한 숭고하게 승화되어 우리에게 평화의 길로 가는 소중한 발자국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사회통합 그리고 부패추방의 과제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자. 베트남은 한 세기 가까이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이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가 완전히 철수한 것은 1954년 비엔푸 전쟁에서 패퇴하면서였다. 이어 제네바 협정에 의해 베트남은 북의 공산국가와 남의 자본주의 국가로 분단되었다. 그 후 9년 동안 옛 소련, 중국이 미는 북쪽과 미국이 미는 남쪽은 내전을 치르게 된다. 1965년 미국은 군대를 보내 남 베트남을 도우며 전쟁에 참가하였고 한국군도 이에 동참하게 된다. 1973년에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미군은 전쟁에 가담하지만 베트남전은 1975년 4월 30일 호치민 군대가 사이공을 점령하면서 끝이 난다. 1978년 중국이 미는 크메르루즈가 베트남국경을 두 번에 걸쳐 침범한 것을 계기로 캄보디아를 점령하고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점령함으로써 그 힘을 확산하게 된다.

미국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1975년 경제 제재를 가하고 서방 강대국들이 미국에 동조하면서 베트남은 고난에 처한다. 베트남은 이후 국제적으로도 완전히 고립당해 WCC와 로마 교황청, 그 밖의 NGO가 주는 인도주의적 원조에 의해 연명을 하게 된다. 1980년 말 베트남은 시장경제 도입을 천명하고 1993년부터는 중국과 관계를 개선해 매년 번갈아 국가주석이 서로 방문하고 있다. 1994년 미국은 19년 동안 지속했던 베트남에 대한 경제제재를 풀고 1995년 7월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베트남은 같은 해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 일곱번째 국가로 가입하면서 고립에서 벗어났다. 이러한 베트남의 현대사는 북한의 앞날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은 여전히 빈곤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시장경제의 도입은 공산당의 경직된 관료주의에 막혀 속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기간산업의 더딘 민영화는 선진국들로 하여금 투자를 머뭇거리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국민으로부터 깊은 불신을 받고 있다. 뿌리깊은 남북 간의 불신은 그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으며 민주화를 지지하는 종교지도자, 지식인들은 감옥에 갇혀 있다. 베트남이 당면한 가장 절실한 과제는 사회통합이다. 남과 북의 불신 극복, 종교 간의 화합, 당과 행정부의 매끄러운 협력, 간부들의 부정부패 척결이 시급하다 할 수 있겠다.

1983년부터 매년 평균 두 번꼴로 베트남을 방문해온 필자는 베트남과 한국의 거리는 멀다고 여겨왔지만 1999년 1월 방문 길에서 이런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관광객들, 사업가, 학생 등 많은 한국인 방문객들을 보면서 이제는 베트남과의 과거사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느꼈다.

박경서 인권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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