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12월 2000-12-01   1627

쓰레기 주워 애국하세!

탤런트 임현식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찌뿌드드한 날씨지만 비까지 오랴 싶어 그냥 집을 나선 날은 영락없이 콧등에 빗물을 맞게 되고, 지각을 각오하고 헤어드라이를 한 날도 가끔은 우산을 깜빡하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후줄근하게 적시고 만다. 탤런트 임현식 씨(55세)를 만나러 가는 날도 그런 날이었다. 약속시간보다 딱 5분 늦게 도착한 KBS 별관 A스튜디오, 그는 없었다. 간발의 차로 그는 식사하러 나갔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를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신세가 됐다. 단골식당을 뒤지며 그를 찾기 위해 부산을 떨었지만 행방은 묘연했다. 분명히 올 기자를 기다리지 않고 나가버린 그가 막 얄미워지기 시작할 무렵, 반쯤 포기하고 근처 식당에서 한술 뜨려던 찰나, 옆구리가 부르르 떨린다.

“아, 장 기자님? 기다릴테니 천천히 먹고 와! 큭큭큭.”

순간 그가 어떤 표정일까 머리속 그림이 그려진다. 드라마 <허준>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눈을 가늘게 뜬 다음 얼굴에 주름을 잔뜩 잡고 멋쩍게 웃던 임오군. 홍춘이의 손을 잡을 때나 허준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슬쩍 눈감아줄 것을 요청할 때 웃는 그런 표정이 떠올라 수화기에 대고 너털웃음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시트콤 <멋진 사람들> 오후 촬영을 준비중인 A스튜디오 분장실은 몹시 붐볐다. 차분히 앉아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에게 좀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요청했다. 임현식 씨는 “그럼 어디 조용한 곳으로 한번 가볼까?” 하며 눈을 부릅뜬다. 마치 어느 CF의 한 장면에서 ‘돈 벌어 애국하세!’ 할 때 짓는 그 표정으로 말이다.

트럭 몰고 다니며 쓰레기 줍고 싶다

겨울을 재촉하는 늦가을 비가 더욱 을씨년스런 정취를 만들던 오후, 습도 높은 KBS 별관 1층 A스튜디오 앞 의자에 앉자마자 그는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나, 어제 명동성당 아래 찻집에서 최열 씨 만났는데….”

왜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그는 환경연합 회원활동에 대한 불만을 쏟아놓았다.

“회원들이 뭔가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게 있어야지. 그린피스 회원들처럼 우리 환경연합 회원들도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트럭이라도 몰고 나가서 쓰레기라도 줍게 하든가 말이야. 회원활동이라곤 20∼30만 원 돈 낸 것말고는 한 게 없어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대한민국에서 바쁘기로 따지면 둘째로 쳤다간 서러울 사람일진대 그는 시민단체 회원으로서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며 투덜거렸다. 단순히 회비 내는 회원이 아닌 활동하는 회원이고 싶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나는 환경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가 환경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보통 많은 게 아니야. 전 물을 참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여름에 만족스런 계곡을 만나지 못했어요. 개천 밑 쓰레기는 말할 것도 없고, 비 한번 오면 떠내려오는 폐자재들…, 엄청나잖아요? 요즘엔 너무 바빠서 못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저는 트럭 한 대를 몰고 다니면서 활용 가능한 쓰레기들을 모았어요. 조그마한 나무토막부터 종이조각까지 그걸 모으면 얼마나 쓸 데가 많은데….”

그는 쓰레기매립장에 가볼 때마다 좋은 팔도강산을 이렇게 쓰레기산으로 만드는구나, 생각돼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머리를 맞대면 지금보다 쓰레기양을 줄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좀더 작은 부지에 매립장을 만들어도 될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는 것이다.

“내가 더 늙어 연기자를 못하게 되면 면장갑 딱 끼고, 귀까지 덮는 모자 하나 푹 눌러 쓰고, 쓰레기 주우러 다니려고…. 너무 지저분한 데를 보면 그런 생각만 들어.”

임현식 씨가 환경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 갖게 된 결정적 이유가 있다. 바로 음주운전 단속에 걸려 사회봉사명령으로 80시간 동안 천변 쓰레기줍기 활동을 했던 것. 이 대목에서 그는 계면쩍게 웃으며 인생에서 정말 보람된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3년 전인가 음주운전사고를 냈어요. 그때 제가 사회봉사명령을 받고 천변에서 쓰레기를 주웠답니다. 비닐, 천조각, 병뚜껑, 빈병, 유리조각… 말할 수도 없이 쓰레기가 나와요. 그때, 야, 이거 썩어도 너무 썩었구나, 우리가 옛날에 멱감던 그런 냇가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저는 그 일을 대충하지 않았어요. 상당히 보람 있게 청소했습니다.”

지천명의 나이에 숨기고 싶은 과거일 텐데 그는 스스럼없이 사회봉사명령 이력을 소상히 말해준다. 사실상 그 사건을 계기로 환경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전남 광주에서 나고 자라 생명의 활력이 되는 자연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임현식 씨. 자연은 실종된 지 이미 오래고, 그 자리에 골프연습장, 술집, 게임장이 빽빽이 들어서는 현실이 때로는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단다.

“어떤 때는 말이에요, 이거 강제적으로 좀 하면 안 되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가구당 몇 그루씩 나무심기, 길가에 꽃심기…. 그런 거 안 되나? 그런 것 좀 했으면 좋겠어.”

“김혜자, 최불암보다 출연작 더 많을걸?”

한양대 연극영화과 64학번인 그는 어릴 때부터 장기가 많은 사람이었다고 자평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줄줄 외던 유행가가 100곡이 넘었다니 가히 짐작할 만한 수준이다. 특히 샬레시오고등학교 시절 성극을 매해 4편씩 무대에 올림으로써 극에 대한 매력에 빠지게 됐다고. 1969년 MBC 공채 탤런트 1기로 입사한 그는 지난 32년간 단 한번도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연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아마 내가 김혜자, 최불암 씨보다 출연작품이 많을 거야. 돈도… 아마 내가 더 많이 가져갔을걸? <한지붕 세가족> 6년, 칼라TV 기념작품 <암행어사> 4년 도합 10년간 MBC에서 드라마를 했네. 사람들은 자꾸 날더러 ‘빛나는 조연’ ‘약방의 감초’ 이렇게 말하는데, 그건 아니야. 카메라가 돌고 내가 그 앞에 서 있으면 그 장면에선 내가 주연이지.”

임현식 씨 연기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리바이벌은 없다는 것. 한 장면에서 독특한 동작과 대사로 사람들을 웃겼더라도 다시 한번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법이 없다.

“나? 언제나 새 걸로 하지, 새 걸로. 아깝더라도 과감히 버리고 새 것을 연구해야 뭔가 또 새로운 게 나오는 법이거든요.”

이런 원칙으로 32년간 한우물을 파온 연기자, 임현식. 그가 생각하는 시민운동은 이런 거다.

“4·19도 겪고, 5·18도 다 겪은 사람이에요. 학교 때도 엄청나게 데모한 사람이죠. 내가 평생에 단 한번도 여당을 지지해보지 않았으니까. 요즘엔 와, 이제 세상이 바뀌어 총선연대처럼 시민단체가 정치활동도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켠으로는 왜 좀더 ‘확실하게’ 못하나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어떤 때는 내가 직접 나서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죠. 그리고 참여연대도 말이야, 회원에게 돈만 내게 하지 말고, 활동을 주라고, 활동을 응? 김종학 PD 알죠? 그 사람은 연기자의 장점을 쏙쏙 빼먹을 줄 아는 ‘스트로우 같은 인간’이야. 참여연대도 회원들의 장점을 잘 활용할 수 있는 활동을 했으면 해요.”

마음 착한 동네 아저씨 같은 임현식 씨. 언제나 브라운관에서 유머러스한 이미지로만 그를 기억해왔지만 직접 만나본 그는 한국사회와 환경문제에 대해 불똥 튀게 고민하는 또 하나의 지성이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맑은 계곡을 보전해야 하는 것처럼 시민운동이 우리 사회를 맑고 투명하게 지켜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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