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2월 1999-12-01   1441

영화로 보는 20세기의 거짓과 진실

4년만에 불법 딱지 땐 인권영화제

중무장한 경찰이 상영장을 포위한 채 전기도 물도 끊고, 영화제를 연 집행위원장을 잡아 가두던 때에 비하면 사정이 나아진 듯 싶다.

하지만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급분류제나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인권영화제는 여전히 현실과 긴장상태다.

분명한 자기 색깔을 내세운 작은 영화제가 앞다퉈 열렸다. 11월 초 열린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에 이어 18일부터 사이버영화제, 노동영화제, 한국독립단편영화제가 한꺼번에 열렸으며 26일부터는 제4회 인권영화제가 열린다. 이밖에 격년으로 열리는 동성애를 주제로 한 퀴어영화제, 독립·단편영화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영화를 상영하는 인디포럼 등 ‘비주류’ 또는 ‘마이너’로 불리는 영화제가 여럿 열린다. 이중에서도 올해로 네 번째 열리는 인권영화제는 사람과 세상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를 주로 상영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몇몇 화제작을 골라 상영장을 찾는다면 그 여진이 새 천년을 맞는데 적지 않은 에너지로 옮겨지리라 확신한다.

중무장한 경찰이 상영장을 포위한 채 전기도 물도 끊고, 영화제를 연 집행위원장을 잡아 가두던 때에 비하면 요즘은 격세지감을 느낄만 하다. 하지만 인권, 좀 폭을 좁혀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는 창으로 이런저런 세상사를 살펴보면 인권영화제가 계속 열려야 하는 까닭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나라의 인권 상황이 이전과 비교해 ‘답보’ 상태라고들 하지만 이대로라면 새 세기에는 오히려 뒷걸음칠지도 모른다는 불행한 전망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새정부가 목청을 높여가며 생색 냈던,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도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음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불구가 된 등급분류제는 물론이고, 아직도 기세등등한 국가보안법도 ‘확신범’들이다. 하지만 인권영화제도 만만치 않은 고집불통이다.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절차는 모두 거부한다. 따라서 검열의 소지가 있는 현행 등급심의는 거부하고, 영화제 상영 영화에 대해 면제 추천을 해주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추천 절차도 당연히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인권영화제는 비린내까지 묻어나는 풋과일 마냥 풋풋하다.

제4회 인권영화제는 11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동국대 학술문화회관 예술극장에서 총 44편을 상영한다. 상영작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상영작 목록에 넣을 한국 작품이 가뭄에 콩나듯 했으나 올해는 무려 14편으로 한국영화 섹션을 따로 만들 정도라고. 이는 인권을 주요 소재로 삼는 작가가 많아졌고 이들이 속속 작품을 내놓기 시작한 탓이다. 게다가 상영작은 모두 한국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영화를 골랐는데, 올해부터 한국작품에는 빗장을 좀 풀었다. 새 작품보다는 인권을 소재로 한 영화를 두루 볼 수 있게 하는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 것이다.

그래도 외국 작품은 첫 상영작으로 제한하고 한국 작품도 인권영화제 특유의 깐깐함을 포기하지 않고 영화제 관계자들이 엄선해 상영작을 결정한다. 또 이렇게 고른 한국 작품 중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영화를 뽑아 ‘올해의 인권영화상’을 주기로 했다. 한국 작품은 상영작으로 결정되면 올해의 인권영화상 후보가 된다. 수상작은 폐막작으로 상영하며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의 후원으로 소정의 상금도 부상으로 준다. 상영할 한국 작품은 의문사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중인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를 필름에 담아 올해 영화제 2관왕으로 호평받고 있는 <민들레>를 비롯 <먼지의 집> <탈북소년들 중국에 가다> <또하나의 세상> 등 14편이다. 아쉬운 것은 올해부터 관객들이 직접 찍은 작품을 상영하는 ‘카메라인권지기’ 부문을 신설했으나 상영작을 내지 못했다는 것. 카메라인권지기는 주로 인권침해 현장을 관객들이 기동성 있게 담은 뉴스릴을 공모했으나 주제에 맞는 작품이 없었던 것.

뭐라고해도 영화제의 가장 큰 관심사는 상영영화다. 흔히 인권영화제 상영작은 건조하고 무거운 영화가 많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말랑말랑’한 작품도 적지 않다. 호주, 영국, 인도, 캐나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은 대표적인 사례다. ‘표현의 자유’가 가지는 가치를 유쾌하게 그려낸 <독방의 활력>과 남아공 광부들의 파업을 강렬할 꿈틀거림으로 표현한 <이골리> 등 6편이다. 상영시간 4시간 20분짜리 <슬픔과 연민>은 제2회 때 상영해 화제가 됐던 <쇼아>에 비길만한 대작으로 꼽힌다. 올해 인권영화제는 두 가지 사건에 주목한다.

첫째는 한 세기가 저물어가는 11월 30일은 미국 시애틀에서 ‘WTO(세계무역기구) 뉴라운드’ 협상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사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투자협정과 WTO 뉴라운드가 각 나라의 민중들에겐 족쇄가 되고 결국은 인권 문제로 직결된다는 문제의식이다. 이날은 각 나라 민중운동 진영이 ‘민중행동’을 벌이기로 한 날이다. 영화제쪽에서도 ‘WTO 뉴라운드 반대 민중행동 특별부문’을 마련했다. 자본의 횡포를 벌거벗은 임금님 우화에 비유한 <황제의 새 옷> 등 영화를 상영하며 ‘투자협정·WTO 뉴라운드 반대 민중행동’에서 준비한 만화상영과 뉴라운드에 대응하는 민중행동 설명회, 퀴즈대회 등도 연다.

또 하나는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미국 흑인민권운동가 무미아 아부자말의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미아 아부자말과 그가 활동했던 흑표범당의 진실을 밝히는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All power to the people)는 인권영화제의 지향을 단박에 일러주는 작품이다.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가 개막작으로 상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 영화상영과 함께 미국 정부에 무미아 아부자말의 사형 철회와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엽서를 관객들에게 배포하고 그 엽서에 관객들의 글을 받아 주한 미국대사관에 전달하는 행사도 연다.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는 <슬픔과 연민>은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로 꼽히는 작품이다. 무려 상영시간이 4시간 20분이라는 점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역사적 진실과 거짓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인터뷰 자료로 보여주며 고통스런 참회의 순간을 자아내는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또 유엔이 세계인권선언 50주년을 맞아 만든 교육용 다큐멘터리 <세계인권선언의 역사>, 러시아 변방 우랄 지역을 무대로 농장 노동자들이 체제 변화 속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코믹하게 그린 <변방>, 매카시즘에 희생당한 흑인 배우들을 소재로 한 <모략 당한 나의 이름>, 월드컵에서 자살골을 넣은 선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 폭력과 마약의 커넥션이 축구에까지 연계되어 있는 실상을 폭로하는 <에스코바의 자살골> 등도 눈여겨 볼만한 영화들이다.

한국 작품중에는 인권유린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농아학교 에바다 학생들의 인권과 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싸우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그린 <끝나지 않은 싸움 에바다>, 1988년 탈북한 김용화 씨가 남한 정부가 그를 탈북자로 인정하지 않아 11년째 아시아 각국을 떠돌고 있는 기구한 사연을 담은 <조국은 없다>, 여성장애인이라는 이중고를 극복하며 밝게 살아가는 40살의 뇌성마비 장애인 김진옥 씨의 일상을 담은 <장애인 김진옥 씨의 결혼이야기>,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과정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꼼꼼히 기록한 다큐멘터리 <열대야>, 매향리 미군 비행기 사격훈련장으로 인한 인권피해를 극화한 단편 영화 <소리>, 97년 <레드헌트>에 이른 4? 항쟁의 진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레드헌트2> 등이 주요 상영작이다.

한편 배우이자 영화 제작자인 명계남 씨의 사회로 26일 오후 7시에 여는 개막식에는 주요 상영작 하이라이트가 상영되고 가수 김원중과 이정렬의 공연도 펼쳐진다. 빠뜨릴 수 없는 인권영화제의 자랑은 비록 빔프로젝트로 상영하는 작품이 많긴 하지만 모든 영화를 무료상영한다는 것이다. 대신 영화제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관객들의 후원회비로 충당한다. 회원은 1만 원을 내면 상영작 해설책자와 기념품을 증정하는 일반후원회원과 회비 10만원을 내면 해설책자와 <쇼아> <칠레전투1,2,3> <제4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등 한가지 비디오 테이프를 증정한다. 후원회원에 대해서나 상영작 문의는 02-741-2407로 하면 된다.

조종국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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