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9월 1999-09-01   1064

고 백

여름휴가가 끝난 어느날 아침. 한 민원인의 가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 기억에 참여연대를 가장 많이 찾은 민원인 중의 한 분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군(軍)의 토지수용 과정에서 약속을 믿었다가 땅만 잃고 근 이십여 년 지루한 법정싸움에 매달려온 분. 사건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이 된 남편과 생활의욕을 상실한 사십대의 미혼 아들과 월셋방에 살고 있던 분. 딱하고 억울하지만 도울 수 없었던, 다소간의 냉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곧 찾아와 하소연하던 그 분.

국방부에서 기물을 파손하고 난동을 피워 연행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꼭 만나고 싶으니 면회를 왔으면 한다는 전갈이었다. 놀랐지만, “제가 가서 무슨 도움이 될까요?”라는 불확실한 말만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며칠동안 그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찾아 왔을 때 ‘그동안 고마웠다’ 했던 말, ‘좀 더 따뜻하게 맞을걸’ 하는 생각, ‘꼭 그렇게 해야 했나’ 하는 생각 그리고 그날 아침의 전화 통화.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결국 면회도 가지 않았다.

참여연대에서 3D 업종으로 꼽히는 부서에 있는 덕택(?)에 꽤 많은 보통 사람들과 그들이 가져온 문제들과 씨름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 제도와 구조의 잘못, 피해의식이 지나친 사람, 권리와 이기심을 분간 못하는 사람,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 그러다 보니 어느덧 ‘통박’이 구른다고 할까?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의 분별이 어렵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을 설득하여 돌려보내는 기술도 슬슬 늘어간다.

그런데 갈수록 정작 어려워지는 것은 듣는 일이다. 문제를 파악하려고 하기에 앞서 들어주는 마음과 여유가 없다. 언젠가 ‘공무원 같다’는 섬뜩한 말에 가슴을 날카롭게 베이고도 좀체 그 조급함이란 고쳐지지 않는다. 이것이 꼭 상담 기술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친절의 기술만도 아닌 것 같다. 다듬어지지 않은 그래서 불편한 보통 사람들인 그들의 말, 행동, 요구, 의욕 같은 것들과 부딪칠 때면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진 나를 종종 발견하곤 한다. 혹 그들과 함께 하기엔 내 어깨가 너무 높은 것은 아닐까? 계몽적 편견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나만의 고백이라면 정말 다행일 것이다.

지난 5년을 돌이켜 볼 때 한 사람의 상근자의 입장을 떠나 객관의 눈으로 참여연대 활동을 돌아보면 실로 속 시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랬다. 정말 눈부신 싸움이었다. 마땅한 지도(地圖)도 없었지만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을 파라’는 말처럼 ‘무대뽀’ 정신으로 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훌륭한 대리전이었다고 본다. 숙명처럼 되뇌이고 있는 ‘시민있는 시민운동’ ‘시민참여의 실질화’ ‘시민이 중심이 된 운동’은 아직 먼 고민거리고 과제이다. 어쩌면 빠른 행보에 방해가 될까 우려하여 먼저 다가서려는 노력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디서 뭘 시작할지 모르는 지도 모르겠다. 빠르고, 효율적이고, 규모있고, 세련되게 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익숙하다. 그러나 이제 그 익숙함 만으로는, ‘공감’과 ‘갈채’만으로는 부족하다. 먼저 어깨를 낮추어 이 시대의 낮은 곳에 위치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자. 그들을 끌어들이고 크게 한편이 될 하나될 궁리를 해보자. 이 또한 조급함과 딱딱함에 익숙했던 나의 부끄러운 고백일 뿐 이지만, 참여연대를 아끼는 사람들 모두의 몫은 아닐까.

내일은, 아니 늦어도 모레는 구치소로 그 분의 면회를 갈 생각이다. 크게 도움 될 일이야 없겠지만 그래야 내가 편할 것 같다.

박원석 참여연대 시민권리국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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