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2월 1999-12-01   514

성명서나 달랑 내는 시민운동 그것도 문제 아닙니까?

김성재 청와대 민정수석

김대중정부로부터 더 이상의 개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시민단체들은 김대중정부 집권 초기에 걸었던 개혁에 대한 기대를 차츰 접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공동정권이라는 한계를 인정하기 보다 개혁적이라고 생각했던 한 축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에서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들이 우려하는 총체적 개혁 후퇴 현상. ‘청와대의 체감 기온’을 재기 위해 김성재 민정수석을 만났다. 청와대 분수대 앞길은 노오란 은행잎으로 물들어 있었다. 추상의 계절. 하지만 IMF를 몰고온 온갖 것들이 무성한 한국사회는 아직 추상할줄을 모른다. 시민단체들이 김대중정부에 걸었던 기대는 바로 ‘추상’같은 개혁이었다.

개혁의 전도사로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바닥 민심을 전하기 위해 청와대로 들어간 김성재 민정수석. 그를 만나려고 청와대 55번 면회실 앞 횡단보도 앞에 이르렀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민정수석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김형준 비서관은 차마 인터뷰 시간을 변경할 수 없느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만큼 김 수석이 시간을 가름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반증이다. 김 수석은 비서관들이 건네준 서류를 들고 서둘러 수석실을 나간 뒤 김대중 대통령과 1시간 20여분간의 독대를 마치고 돌아왔다.

대통령과의 독대가 항상 이렇듯 길어집니까.

“항상 그런 건 아닙니다. 사안에 따라 다르죠. 특별한 정규보고 없이 수시로 보고하기 때문에 대부분 짧게 끝납니다.”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어 민심을 파악한 지 5개월이 돼가는 데 감회는 어떻습니까.

“글쎄요. 뭐라고 얘기할지 모르겠네요.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개혁 후퇴 현상을 우려하는데요.

“개혁에는 두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대통령의 개혁 의지는 분명합니다. 개혁 원칙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문제는 국민의 정부가 자민련과의 연립정부라는 데 있습니다. 개혁입법을 하는 데 있어서 자민련과의 조율을 거쳐 공동의 목소리를 내야하고, 또 한나라당과도 협의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혼자 개혁을 끌고 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왜 개혁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지만, 정부의 의지와 이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을 분리해서 봐야하지 않을까요. 시민단체들은 개혁을 가로막는 특정 정파에 비판적 자세를 견지해서 정부와 협력해 개혁을 이끌어가야 하는 겁니다. 대통령의 개혁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개혁이 추진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 뿐입니까.

“아니죠. 50년만에 정권이 교체됐지만 관료사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장관만 바뀌었을 뿐이죠. 공직자들은 지금까지 있어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의식이 개혁되지 않으면 추진되지 않습니다. 이게 순식간에 되는 건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한 거죠. 시민단체들은 집권초기가 아니면 개혁이 물 건너 간다고 주장했지만 지금까지 정부는 개혁작업을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개혁을 뒷받침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 데 국민회의가 제2당이니까 법제도 개혁에서도 힘이 부칩니다. 개혁을 하는 순간 모든 대상이 곧 적이 돼버리는 게 현실입니다.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서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무조건 비판해서는 안되지요.”

정부 비판에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까.

“우선 가려서 비판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도 정부의 개혁 의지는 명확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를 거부하는 세력을 비판해야하는 겁니다. 정부의 개혁 의지에 대해서는 지지의사를 적극 밝혀야하고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라고 청와대 앞에서 시위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김 수석이 생각하는 정부와 시민단체와의 관계는 단계적 개혁을 위한 비판적 동지적 관계쯤으로 보인다. 그는 또 시민운동권이 정부 비판에 너무 치우쳐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가뜩이나 연립정부라는 취약한 정치지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정치개혁을 비롯해 재벌개혁, 세제개혁, 국보법 폐지 등에 있어서 정부의 개혁 의지 자체를 의심하고 있다. 김 수석과 시민단체간에는 많은 시각차이가 존재하는 셈이다.

집권 초기에는 시민단체들이 정부를 너무 ‘봐준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비판을 자제하고 지켜봤던 것인데요. 이는 김대중정부에게 기대한 바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정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더 이상 기다리다간 개혁이 물건너간다는 위기의식 때문 아닐까요.

“개혁은 혁명이 아닙니다. 단계적으로 갈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시민단체 요구는 너무 원론적이고 원칙적입니다. 그런 입장은 이해하지만 시민운동 차원에서 주장하는 개혁과 정부의 법제도 개혁은 현실적으로 같지 않습니다. 개혁은 한번으로 완결되는 게 아닙니다. 과거 독재시절 반정부의식으로 무장돼 운동하는 것과 민주정부에서 운동하는 것은 달라야하지 않을까요?”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장애우 관련 활동을 하면서도 정부를 무조건 비판하기 보다 협력할 것은 협력했으니까요. 바뀐 것은 없습니다. 비판도 좋지만 협력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야하지 않을까요.”

화제를 좀 돌리겠습니다. 지금부터 5개월전 옷로비 사건 등으로 김태정 전 법무부장관이 사임했을 당시 시민단체들은 민심을 전달하는 청와대 비서진의 동맥경화를 지적했습니다. 다행히도 김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여 민정수석실이 생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와대 비서진이 당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았다는 진단이 올바른 지적이었는지요.

“비서진과 내각 등은 과거 소위 운동권의 반정부적 성향 때문에 이를 기피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파트너로 삼아 대화하려고 하질 않았죠. 그런 점에서 김 대통령이 가장 진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간 재야 시민운동을 하시다가 청와대로 들어왔는 데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습니다. 서로가 이해하려면 대화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요. (청와대 내에서는) ‘김 수석은 시민단체 의견만 강조한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좀 난감한 일이지요. 일부 사람들은 (청와대에 가서) 달라진 게 아니냐고도 합니다. 운동적 차원과 국정 수행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정했으면 합니다.

민심은 어떻게 파악합니까.

“직원들이 전국 시도에서 현장에 나가서 여론을 청취하고요, 시민사회단체들과도 자주 대화를 갖습니다. 직접 시장을 가거나 택시 등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면서 만난 시민들로부터도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지방에 출장을 가면 2박 3일에 100명 정도 만나는 경우도 있지요.”

여기서 대통령의 ‘눈과 귀’ 역할을 하고 있는 민정수석실을 살펴보자. 민정수석실은 제1비서관, 제2비서관, 민원비서관으로 구성돼 있다. 김주원 제1비서관은 정부 각 부처와 지방에서 여론을 수렴하고 크리스챤아카데미 전 원장인 신필균 제2비서관은 시민사회단체의 여론 창구를 맡았다. 이곳에는 녹색교통운동 전 사무총장인 임삼진 씨가 국장직을 맡고 있다. 이재림 민원비서관은 청와대에 접수된 민원과 대통령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일을 한다. 과거처럼 민정수석실에 수사권, 조사권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현재 딸린 식구(행정관)만도 36명에 이르러 역대 정권에 비할 때 가장 큰 규모이다. 그만큼 민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김 수석의 측근으로부터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그의 출근 시간은 오전 7시. 공식적인 퇴근 시간은 밤 9시. 하지만 이 시각을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자정이 넘어야 사무실을 나간다. 수석실에 쌓이는 인쇄물도 엄청나다. 신문, 방송은 기본. 우선 30여 명의 행정관들이 거의 매일 올리는 보고서가 책상 위에 쌓인다. 끊이지 않고 팩스로 보내오는 각 단체 성명서 또는 개인 민원서류 때문에 타 수석실에 비해 팩스 용지도 거의 2배나 더 사용한다. 얼마전 의보통합과 관련한 팩스용지만도 1롤이 소요됐을 정도다. 각계각층의 아우성이 이곳으로 집결되는 셈이다. 이같은 주장의 홍수 속에서 이를 가려듣는 것도 만만치 않는 일일 것이다.

특별히 민심을 판단하는 잣대가 있는지요.

“민심은 천심 아닙니까. 그건 바닥 민심이고, 서민의 마음입니다. 분명 가진 자의 마음은 아니지요. 언론도 민심을 제대로 담지 못해요. 여론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도 아니지요. 여론과 민심은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론은 조작이 가능하지만 민심은 그렇지 못하죠. 따라서 이곳에 들어와서는 직접 민생 현장에 가서 서민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언론이 반영하지 못하는 바닥 민심에 주목하고 있어요.”

최근 중점적으로 민심 동향을 파악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정부가 구조조정을 하는 데 이게 국민의 입장, 즉 수요자의 입장에서 하는 것인지를 총 점검하고 있습니다. 공기업의 구조조정은 잘되고 있는지, 또는 규제개혁을 하면서 막상 풀어야할 것은 풀지 않고 엉뚱한 것만 규제를 풀고 있는 건 아닌지…. 직접 조사도 하고 지역 여론과 시민사회단체 의견을 구하러 다닙니다.”

민정수석실의 성과로 꼽을만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개혁을 하는 데 있어서 개혁의 질을 점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IMF를 거치면서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8·15 경축사에서 국민의 정부가 중산층 서민을 위한 정책을 기조로 삼은 것은 성과라고 할 수 있지요. 민심도 여러 가지입니다. 제가 중점을 두고 파악하는 민심은 소외계층의 밑바닥 민심이라고 볼 수 있지요. 처음에는 수석회의나 정부 국정 수행을 하면서 이를 대변할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어요. 공직사회에서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은 탓이죠. 하지만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시민단체에선 정부 개혁정책이 휘청이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인데요. 가령 중산층 서민을 위한 세제개혁이라든가, 총체적으로 불신을 받고 있는 정치권 개혁 작업은 아직 한발짝도 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면 사안별로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중산층을 위한 세제개혁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단지 서민들이 이를 체감하지 못할 뿐이지요. 김 대통령은 정치 개혁 입법에 대한 의지도 확고합니다.”

정치개혁 입법은 아직 출발점에 서지도 못한 것 아닙니까.

“정당에 얘기해도 안되니까 문제죠. 대통령이 정치개혁을 하고 싶지 않다는 평가는 부당합니다.”

시민단체들이 요구하는 것은 더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입니다.

“정치개혁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입장도 각론으로 들어가면 통일된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개혁을 발목잡는 세력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해야지요. 아니면 비판을 위한 비판이고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내거는 신당 창당 문제에 대해서도 시민단체들은 비판적인데.

“일반 여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존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신당에 참여하는 인사들이 결코 개혁적이지 않다는 지적이지요.

“누가 개혁적인 인사입니까. 무슨 기준으로요. 과거처럼 민주, 반민주 구도를 가지고 개혁의 잣대로 삼으면 안됩니다. 이제는 큰 의미에 있어서 개혁은 ‘공정한 경쟁’입니다. 이게 개혁의 핵심입니다. IMF도 공정경쟁의 룰이 없었기 때문에 닥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개혁의 잣대는 무엇입니까.

“이제 우리는 반민주 체제로 역행할 수 없습니다. 과거적 지평에서 볼 게 아니라 21세기 미래 지평에서 보아야지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전문성과 경쟁력, 정의로움일 겁니다. 가치로 보면 개혁은 경쟁과 정의가 동시에 내포된 것입니다.”

김대중정부의 개혁 성과로 꼽을만한 것이 있다면.

"다소 부작용도 있지만 공공부문과 재벌개혁, 노사관계 등으로 볼 수 있지요. 이 정부만큼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한 정부는 없었습니다. "

시민운동과 정부와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시민사회(시민운동)의 모습은 달라져야 합니다. 시민사회는 보다 전문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단순 정부비판 기능에 머물 게 아니라 자기 개혁을 해야겠지요. 과거의 지평이 아니라 21세기 새로운 지평에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건강한 파트너 관계를 통해 비판·협력해야 합니다. 정부에 협력하면 관변·어용이라는 인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언론 문건을 의식한 듯)언론개혁도 말만 무성하지 시민단체들은 무얼하고 있습니까. 정부가 하면 언론탄압이라고 합니다. 성명서 한 개 내고 나 몰라라 할 수 있는 겁니까. 시민사회의 역할을 방기하는 게 많습니다.”

시민운동에 대해 의외로 비판적이시군요.

“시민운동에 대한 애정으로 생각해주십시오. 내가 시민사회에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시민사회가 사회적 약자편에 서야 하는데 중산층편입니다. 개혁에 대해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가칭 ‘개혁을 위한 협약’을 만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개혁을 위해선 비판할 것도 있지만 협력할 것도 많습니다. 도매급으로 정부 개혁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정부가 시민운동의 발전을 위해 계획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가능한 한 시민사회 발전을 위해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적극 돕겠습니다.”

민간단체 지원법 처리전망은 어떻습니까.

“정부 안이 제출됐기 때문에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보입니다. 야당이 특별히 문제시하는 것 같지도 않고요.”

김 수석은 인터뷰 과정에서 김 대통령의 확고한 개혁의지를 여러차례 강조했다. 시민단체들의 비판 목소리에 대해서도 개혁이 혁명과 다르다는 점을 비교하면서 시민단체들의 주장이 혁명에 가깝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 말아달라는 주문이다. 또 시민운동이 겨냥하는 비판의 과녘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연거푸 했다. 결국 개혁에 대한 체감 기온이 ‘혁명과 개혁’의 차이 만큼이나 격차가 크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김 수석은 매일매일 유가협, 민가협, 택시노동자 등 그동안 청와대에 오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방을 찾아온다고 했다. 그는 또 정부 관료보다 그들과의 만남을 중요시한다고 했다. 혁명과 개혁의 차이가 이 잦은 만남을 통해 좁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인왕산 산그늘에 서서히 묻히는 청와대 문을 나섰다.

김병기(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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