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정세를 규정하는 힘은 남북한과 미국 3자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남북관계, 북미관계, 한미관계가 주요한 축을 이루는데 여기에는 남북한과 미국의 내적인 권력 역학관계와 주변국들의 관계도 영향을 미친다. 한반도 통일문제는 국제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민족내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한미관계는 비대칭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종합적으로 통일정세를 발전적으로 이끌지 못했다. 남북관계, 북미관계, 한미관계가 상호조응 하면서 발전할 때 통일정세가 고양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입증되는 것이다.
1991년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을 때는 남북관계는 변화, 발전했으나 북미관계와 한미관계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오히려 통일정세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영삼정부 시절에는 북미관계가 통일정세를 변화시킬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남북관계와 한미관계가 북미관계에 조응하지 못하면서 통일정세는 악화되고 말았다.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들 3자관계에서 한미관계가 김영삼정부 시절보다 밀접해지는 변화가 생겼다. 미국의 대북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과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이 맞물리면서 김영삼정부 시절에 표출되기도 했던 한미간의 대북정책 갈등은 완벽하게 해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난 9월 베를린 북미 합의 이후 이들 3자관계는 ‘북미관계는 대결 속의 대화, 남북관계는 대화 없는 대결, 한미관계는 완벽한 공조’라는 구조로 정립되고 있다. 북미관계에서 대화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남북관계에서 대화가 시작된다면 한반도 통일정세가 통일지향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현재 이들 3자관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북미관계이고, 북미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남북관계이다. 북한은 식량, 에너지, 생활 필수품, 외화의 4가지 부족에서 비롯되는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과 관계 개선을 최고의 정책수단으로 삼고 있다. 북한이 강성대국이나 선군정치(先軍政治)를 표방하면서 군사력과 사상무장을 강조하는 것도 미국과 관계 개선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김정일 총비서가 96년에 이른바 8? 노작을 발표한 이래 ‘미국과 백년 숙적이 아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해왔다. 미국과 관계 개선의 의지는 이미 92년에 김일성 주석이 표방한 이래 간헐적으로 제기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생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의 적대관계 해소는 미국 내부의 정치 역학관계뿐만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회주의국가가 존재하는 가운데 동북아시아 신질서를 구축해야 하는 문제까지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의도가 쉽게 실현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등장했던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는 대량파괴무기확산 저지라는 미국의 정책에 대한 북한의 도전이었고, 북한은 미국의 대량파괴무기 확산 저지정책을 적절히 활용해서 미국과 관계를 좁혀왔다.
미사일이 좁힌 북미간 거리
북한의 미사일 발사유예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완화로 대표되는 베를린 합의 역시 이와 같은 북한의 전략이 반영되어 있다. 베를린 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외무성 대변인 회견(99년 8월 18일)에서 “우리에게는 평화적인 우주과학연구사업을 위한 위성활동 계획도 있고, 나라의 방위력을 위한 미사일 발사 계획도 있다”고 강조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북한은 인공위성과 미사일 발사의 구분이 모호한 것으로 대량파괴무기 확산저지라는 미국의 정책의 틈을 만들어 내서 미국을 협상으로 이끌어 낸 것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핵무기 개발의 구분이 모호한 점을 가지고 북미 핵공방을 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로 이끌었던 것의 재판이다.
북한의 전략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워싱턴 포스트 도쿄 지국장을 지낸 돈 오버도퍼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북한의 군사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캄보디아나 라오스보다도 북한을 덜 주목했을 것”이라며 “문제는 북한과 같은 나라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북한은 안보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과 미국의 이와 같은 전략이 베를린 회담을 이끌어냈고,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완화조치를 발표하게 되었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완화는 ‘위험한 불량국가를 다루는 기법’인 것이다.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북미관계의 개선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 이후 북한이 미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경제,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생존의 위협에 놓여 있는 북한으로서는 완벽한 승리가 보장될 때까지 ‘벼랑끝 전술’에 기초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
벼랑끝 전술에는 베를린 합의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상황에서 북한이 여전히 미사일 발사를 시도할 가능성도 포함된다. 북한의 다양한 전술에는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완화를 북한경제의 돌파구로 삼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완화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북한에 취한 가장 중요한 포괄적인 조치이다. 북한 상품의 미국내 반입과 미국 상품의 대북 수출 허용, 북미간 민간 및 상업용 자금의 송금허용 등의 조치로 농업, 광업뿐만 아니라 사회간접자본과 관광에 대한 미국의 대북 투자가 가능해졌다. 이로서 카길, 코카콜라, 스탠튼 등 소수의 미국기업이 대북 진출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이 행정부의 내부 규정 변경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나타날 것이다.
남북 당국자간 대화 재개가 열쇠
북한으로서는 어렵게 맞이한 이와 같은 환경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국가와 거래할 시스템을 갖출 것이지만, 다른 한편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국기업들의 대북 투자의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내부 시스템의 변화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의 안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은 대미관계 개선에 역점을 두는 정책에 차질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남북 관계에 긍정적으로 응할 수 있다. 통미, 봉남, 접현(通美, 封南, 接現) 즉 미국과 대화를 위해서 남한과 대화를 피하며 현대에 접근하는 전략의 기조 속에서 남한 당국과 대화를 어느 수준에서 유지할 것인지가 최대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김정일 총비서와 면담과정에서 김용순 아태 평화위 위원장의 남한 방문이 거론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김용순의 방한이 실현된다면 북한의 당국자 대화의 의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김용순의 한국 방문이 이루어져서 정부 당국자와 비공식 접촉이라도 가질 경우 남북관계는 빠르게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즉 현재의 시점은 북미관계의 변화속에서 대화 없는 남북관계를 대화 있는 남북관계로 바꾸기 위한 조심스런 시도가 진행되는 시점인 것이다. 앞으로 남북관계에서 대화가 진행된다면 이는 북미관계의 확고한 안정화에 기초해서 가능할 것이다. 안정적인 북미관계에 영향을 받아서 남북관계가 변화한다면 그 폭이 넓을 것이지만 북미관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북미관계가 남북관계보다 먼저 개선되는 것을 용인하고, 냉전체제 해체를 시도하는 김대중정부의 대북정책이 직면하게 될 맹점이 바로 이것이다.
한편 방위협력지침 개정으로 대변되는 미국과 일본의 새로운 안보관계, 98년 8월 31일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로 인한 미사일 기술 능력 과시에서 비롯되는 동북아 전역미사일방어(TMD) 계획 등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군사안보 상황은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을 재연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방위협력지침 개정과 이를 법제화하고 있는 일본의 움짐임, 그리고 동북아시아를 군비경쟁의 악순환으로 내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TMD계획은 한반도 평화통일의 국제적 환경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실험으로 미국과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의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전역미사일 방어체계(TMD)를 구축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유예를 약속한 베를린 회담에도 불구하고 TMD는 계속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미사일 방위체계 가운데서 전역미사일 방위체계란 날아오는 적 미사일을 조기에 포착하여 고공, 저공에서 소멸한다는 요격무기체이다. 미국과 일본이 TMD를 구축할 경우 러시아, 중국, 북한은 TMD에 요격되지 않는 미사일을 개발하게 될 것이다. TMD 구축은 냉전의 해체 이후 최대 규모의 군비증강과 군사적 긴장의 조성을 예고하는 것이다.
아울러 미국 상원에서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거부한 것 역시 북한 핵문제가 다시 현안문제로 등장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CTBT 가입을 촉구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한반도 통일과정에 남북한과 미국의 3자 관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군사환경이 점차 많은 개입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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