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0월 1999-10-01   1608

변산공동체 윤구병

못생긴 미남이 똥체험을 시켜드립니다

“부안터미널에 내려 변산 면사무소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서해슈퍼 앞에 내려 변산공동체를 물어보면 가르쳐 줄 거외다.”

윤구병 선생이 가르쳐준 약도는 이랬다.

토요일 저녁무렵 고속도로를 가르고 달리는 맛은 특별했다. 온갖 자가용들이 벌벌 기는 가운데 버스 전용차로로 쌩하니 달려가는 쾌감이라니. 부안에 도착했을 때 시외버스는 이미 끊어져버린 뒤였다. 친구와 동행한 것이 참 다행이었다. 우리는 운좋게도 승용차를 얻어타고 서해슈퍼를 찾아 들어갔다.

“쭉 들어가면 교회가 있는데 왼쪽으로 꺾어서 쭉 들어가면 산 바로 밑에 있는 집이 윤 선생님네예요.”

길을 묻느라고 차에서 내렸을 때 코 끝에 스미는 공기가 벌써 다른 것이 조금만 걸어들어가면 될 듯 싶었다. 공짜로 태워준 승용차 주인이 밤길이라고 끝까지 태워다 줄 것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날 안으로 윤 선생을 만나지 못했을 거였다. 외등하나 없는 깜깜한 시골길은 제법 달려왔는데도 쉬 끝이 나타나지 않았다. 전설의 고향이 생각나며 약간 불안해지려고 하는데, 파란 색 불빛이 보였다. 텔레비전 수상기의 빛이었다.

모시 고쟁이 차림의 촌할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벗삼아 여름잠을 청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윤 선생 찾아왔소? 어디서 왔소? 서울서? 응, 요 건너 집이야.”

작은 개울 하나 건너 담장없는 집에 들어서자 자동차 소리를 듣고 조그만 방의 창호지문이 열렸다. 허옇고 후줄근한 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은 사내가 작은 방문에 맞춰 꾸부정하게 숙이고 나오는데 빼고 더할 것도 없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행랑아범이었다.

“아, 이제야 도착들 하셨구나.”

저이가 누구인가 하는데 고쟁이 할아버지가 곧 뒤따라 들어서면서 행랑아범에게 인사를 했다.

“윤 선생, 서울서 손님이 왔네.”

“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둘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기억의 윤구병은 이렇지 않았는데…….

고마운 승용차 기사에게 ‘막걸리라도 한 잔 하고 가시라’고 청하는 집주인의 인사에서, 어쩐지 아쉬워하며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고쟁이 할아버지의 뒷모습에서 나는 내가 비로소 변산 ‘공동체’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윤구병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7년 전이었다. 어린이 교육에 관심을 가진 사람 몇몇이 하룻밤 지새며 이야기하는 자리에서였다. 부모가 자녀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잠재능력이 달라진다는 말 끝에 이름 이야기가 나왔다.

“내 이름이 오희잖아. 학교다닐 때 선생님들마다 ‘너, 다섯째 딸이구나’ 하는데 죽을 맛이었어. 어쩌면 그렇게 성의없이 이름을 짓냐. 아마 딸이어서 더 그랬을 거야.”

“아들만 있는 집도 그렇게 해요. 옛날에야 누가 새끼들 이름을 그렇게 공들여 짓나.”

가정 안에서의 성차별 문제로 이야기가 비화되려는 순간, 누군가가 막고 나섰다.

“첫째 아들은 일병이 둘째는 이병이 셋째는 삼병이 넷째는 사병이 다섯째는 오병이…….”

“도대체 몇째까지 있는데?”

“아홉째.”

“그러면 아홉째는 구병이?”

“그렇지.”

“정말?”

“그 아홉째가 충북대학교 윤구병 선생이잖아.”

나는 그때 너무 우스워서 뒤로 벌렁 나자빠지며 웃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서 충북대학에 강의를 하러 갔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나를 초청한 교수와 밥을 먹으러 가다가 식당 입구에서 건장한 농부처럼 보이는, 또는 술깨나 먹을 듯한 노가다같은 사람과 마주쳤다. 요즘 보기 드문 토속적인 외모가 하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누구냐고 물었다.

“철학과 윤구병 선생님.”

기나긴 이름의 주인공이 저렇게 생겼단 말야. 이름보다 그 생김에서 더 호기심이 일어났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느 날 신문에서 그를 보았다. 미국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비자신청을 하던 과정에서 미국영사관측의 모욕적인 태도에 분노를 느껴 미국에 가지 않기로 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에 입각하여 준엄하게 비판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갑자기 동학군이 생각났다. 한말에 외세에 대항했던, 우리 땅에 뿌리박은 민초들의 생김이 그의 투박한 얼굴과 분명 닮았을 것만 같았다.

그가 진짜 화제의 인물이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지나서였다.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농부가 된 사나이. 변산 공동체 탄생. 교수가 되지 못해 안달하는 세상에서 기꺼이 ‘퇴행’한 희한한 사례를 신문과 잡지들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2, 3년 사이에 변산에 다녀왔다는 사람이 많았다. 마치 명상이나 마음공부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인도에 다녀오듯 교육이든, 환경이든, 생활이든, 인간관계이든 뭔가 생각이 좀 있다는 사람들은 죄다 변산 순례를 한 모양이었다. 나도 가보고 싶었다. 학교가 재미없다고 투덜대는 큰 아이와 발달장애가 있는 작은 아이 모두를 생각할 때 변산의 대안학교는 내 인생의 대안 같기까지 했다.

못생긴 미남

“이 막걸리 좀 마셔봐요. 양조장집 주인이 공무원하던 사람인데 아주 직업적 자긍심이 대단해서 막걸리를 맛있게 잘 만들어요. 사람이 가면 한 바가지씩 막 퍼주거든. 이래서 어떻게 장사하겠냐고 하면 ‘물 한 바가지 더 부으면 돼요’ 그러는 거야. 그 아버지 적부터 양조장을 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을 공부시켜서 면장을 시키려고 한 거야. 그런데……”

저마다의 술잔이 따로 없이, 커다란 냉면 대접 하나에 막걸리를 가득 붓고 돌려가며 한 모금씩 마시니 술 마시는 방법까지 공동체적이로구나 싶은데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윤 선생은 막걸리집 주인의 인생내력을 풀어놓았다.

“여기 문틀을 보세요. 다 다르지요. 허무는 집에서 뜯어다가 단 것들이라 그래요. 벽돌은 IMF로 부도난 공장에서 싼 값에 사온 것이고, 이 집이 아마 이 동네에서 가장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집일 거예요. 음료수 담는 페트병 있죠. 그걸 벽돌 사이에 넣었거든요. 그 단열효과가 대단해요.”

사람뿐이 아니었다. 물건 하나하나, 집 구석구석 모두가 그에게는 자기 삶의 내력이었다.

“선생님,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몰라 뵈었어요.”

“이게 제대로 된 내 모습이에요. 전에야 부은 거지.”

“선생님 이름에 구자가 정말 아홉 구 자세요?”

“네. 우리 아버지도 참 상상력이 없는 분이셔. 1, 2, 3, 4밖에 몰랐으니.”

그를 가까이에서 이렇게 찬찬히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나이로 쉰 일곱. 약간 느리게 조근조근 설명하듯 말하다가 농담 끝에 화통하게 웃어제끼는 그의 모습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어느 판화집에서 보았던 선이 굵은 농부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특히 약간 불거져 나온 큰 눈, 누렁소처럼 순해 보이지만 화가 나면 무섭겠다 싶은 눈이 닮았다. 판화집의 농부를 보며 대중매체가 만들어놓은 기생오라비 같은 미남들에 치여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토종 미남이 바로 이런 얼굴이로구나 생각했었다.

“선생님, 가까이서 뵈니까 미남이시네요, 한국미남이요.”

어쩌면 무례일지도 모를 소리를 나도 모르게 하고 말았다.

“뭐라구? 나 이런 소리는 생전 처음 듣네. 하하. 그거 기분 좋은데. 내가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을 할 때야. 동료 하나가 직장에 찾아온 제 친구를 내게 인사시키는데 그 여자가 나를 보자마자 면전에서 ‘생겨도 생겨도 어쩌면 이렇게 못 생겼냐’ 그러더니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거야. 대단히 솔직한 여자지. 그 여자가 누구냐 하면…….”

막걸리 사발이 돌아가는 동안 열어놓은 문으로 내 가운데 손가락보다 더 큰 여치들이 들어와 방바닥을 뛰어다니고 내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앉기도 했다.

“이거, 동물의 왕국이 따로 없구만요. 이곳은 진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곳 같아요.”

“네, 내일이면 자연과 하나라는 것을 더 실감하시게 될 거구만요.”

술상 한 켠에 앉아 간혹 윤 선생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 조용히 막걸리 사발을 돌리던, 중처럼 빡빡 깎은 머리모양이 은근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던 남자의 아리송한 말에 윤 선생이 그 화통한 웃음을 다시 터뜨렸다.

“내일, 똥을 퍼보시면 ‘자연, 이 맛이야’ 하게 될 거라구요.”

마침 오줌도 마렵던 터라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마침 화장실 가고 싶었는데?”

“아무데서나 오줌눠요. 밤에는 천지가 다 화장실인데, 뭘.”

별을 보며 오줌을 누는 환상적인 시원함, 그래 이 맛이야.

“이상해요. 산 이쪽에는 별이 별로 없는데, 저쪽에는 별이 아주 많아요.”

“내가 그 쪽 별들은 다 아는 여자들한테 하나씩 분양해줘서 없어요.”

윤 선생의 농담에 까르르 터진 웃음이 채 잦아들기도 전에 까까머리가 또 아리송한 소리를 했다.

“그건 산 이쪽이 흐려서 그래요. 내일 두엄 깔 때 아무래도 비가 오겠네요. 이제 그만 주무세요. 아침밥은 7시에 먹습니다. 깨우지는 않습니다.”

웃고 즐기는 가운데 어느새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세수는 요 앞 개울에 가서 하십시오.”

아침에 보니 까까머리는 변산공동체의 ‘숙달된 교관’이었다. 어제밤 차를 타고 건넜던 작은 개울을 보니 변산에 와 있는 게 정녕 꿈이 아니었다. 산 밑에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고쟁이 할아버지와 ‘우리’집 둘 뿐이었다.

윤 선생이 변산에 완전히 정착한 것은 96년 1월이었다. 함평이 고향인 선생은 몸담아 어울려 살 곳을 찾다가 우연히 발길따라 왔다가 이 마을을 발견했다. 산과 바다와 논과 밭이 골고루 있는 이곳을 보는 순간 자신이 택했다기 보다 이 땅이 자신을 불렀음을 깨달았다. “내가 재지기야. 이게 김씨 재실이거든. 재지기는 천민중의 천민이라. 머리가 허옇게 된 노인이라도 동네 아이들이 재지기에게는 반말을 하거든. 나는 이 재지기를 자임했어요.”

까까머리는 재실의 오른쪽 방들 중에서 대문에 가장 가까운 방의 뒷편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변소였고 그는 긴 막대기에 매달린 고무 바가지로 똥을 푸고 있었다. 농활경험이 있는 내 친구가 그 옆에서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따라 오세요.”

친구가 시키는 대로 나는 똥이 담긴 양동이 고리를 한쪽 나눠잡고 똥물이 튈세라 색시걸음을 걸었다. 아침밥을 안 먹길 잘했다 싶었다. 친구는 이미 ‘숙달된 조교’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재실 앞의 커다란 비닐하우스 두 개를 지나 풀 벤 것, 과일 껍질, 약초 찌꺼기 같은 것들이 쌓여 있는 곳에 양동이를 기울이자 소리도 없이 스며들었다. 뒷짐지고 걷는 까까머리 뒤를 우리는 빈 양동이를 들고 따랐다. 그가 똥바가지 막대기를 내려놓으면 양쪽으로 나눠들고 뒤를 따랐다. 어제 자연의 맛 운운하며 똥 퍼야 된다고 한 게 농담이 아니었다.

“똥물만 가려서 뜨는 건가 봐요. 덩어리가 없네요.”

교관 옆에 멀뚱이 서 있기가 어색해서 내가 말했다.

“원래 덩어리는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똥 퍼본 사람들은 다 그래요. 냄새가 안 난다고. 와서 보세요, 물만 있어요.”

정말 그 안은 화장실 같지 않고 밑에 흙가루가 쌓여 있는 시궁창 같았다.

“채식을 해서 그런가봐. 여기는 다 무공해 자연식만 하잖아. 그러니까 나오는 것도 그런 거겠지. 여기는 똥도 도시보다 깨끗하구나.”

양동이를 들고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우리는 똥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는 직접 퍼담을 용기를 내게 되었고 교관은 빈손으로 우리를 따라다니던 품을 절약해서 두엄버무리는 일에 전념하기에 이르렀다. 똥바가지 막대기를 ‘운전’하는 요령을 터득할 무렵 까까머리의 예견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농사에서 비는 곧 휴식을 의미했다.

기와집 툇마루에 앉아서 산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는 기분이라니, 똥장사에서 금방 신선이 된 것이다. 똥과 친해지고 나서 우리는 천하무적이 되었다. 논밭에 있는 어떤 것을 보거나 만져도 전혀 혐오감이 들지 않았다. 똥물을 부어 썩힌 두엄을 손으로 만져도 아무렇지 않았다. 불과 한두 시간만에 인간이 개종된 것이다. 감자를 심기 위해 잡초를 뽑는데 윤 선생이 나타나 가담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약초를 발효시키는 일을 해놓고 오신다고 했다.

“앞가슴에 촉촉히 땀이 납니까?”

까까머리의 이 말을 신호로 ‘야한 이야기’ 시리즈가 잡초 뽑는 내내 이어졌다. 윤구병 선생이 단연 최고였다. 30분짜리라는 섬시리즈는 배아프게 웃었던 기억만 나지 다 외우질 못하겠다. 고지식하기만 해 보이던 까까머리도 어찌나 재미있던지. 우리보다 두 살 위라는 것을 안 다음부터 곧 오빠가 되었다. 그는 목수일을 하다가 이곳에 들어왔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지만 아내를 완전히 ‘꼬시지’ 못해 지금은 이렇게 떨어져 산다고 했다. 그래서 머리를 깎은 것일까.

그는 변산공동체의 농사 선생님이었다. 잡초가 사라진 밭에 두엄을 깔고 그 위에 싹이 난 감자조각을 20센티 간격으로 줄맞춰 늘어놓고 삽질을 해서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놓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오빠, 너무 멋있다.”

“우린 이거 다 월사금 내고 배운 거예요. 정말이라니까요. 학교에서 여름방학숙제가 두엄해오기 이런 거였어요.”

감자밭은 다 만들어놓고 흙에 묻은 삽을 물에 깨끗이 씻고 툇마루에 앉으니 고구마에 막걸리가 새참이었다.

“우리 변산공동체에는 불한당이 없어요. 아니 불자에 땀 한자 땀 안 나는 사람을 말하지요. 여기 와서 일 안 하고 손님대접 받고 간 사람은 다시 안 와요. 재미없잖아요. 그런데 힘들게 일하고 간 사람들은 못 잊어서 또 와요. 노동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세상의변산공동체에는 삼박 사일의 원칙이 있다. 한번 오면 누구나 삼박사일을 지내고 가야하는 것이다. 첫날은 오고 둘째날, 셋째날은 일하고 그 밤에는 공동체 식구들과 술을 푸며 정을 나누고 해가 뜨면 떠나는 걸 수순으로 정해놓았다.

구경삼아 오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화제의 인물 윤구병에 대한 호기심에다가 도시에 사는 사람들 머릿속에 시골은 여름철 배짱이 노릇하러 가는 곳쯤으로 박혀 있으니 자칫하다가는 살림 공동체가 현대판 민속촌 관광코스로 둔갑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왜 없었으랴. “살러 온 사람도 전에는 삼개월 지내보고나서 식구가 됐는데 이제는 일년이 지나야 식구로 받아요. 농사짓고 사는 게 도시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이 아니거든. 그런데 또 진짜 낭만이 있거든요.”

윤 선생의 이 말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비록 반나절이었지만 함께 땀흘려 일하는 사이에 낯설었던 사람들이 살갑게 느껴지고 순간순간은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난 만큼 더해지는 뿌듯함을 안아보지 못했다면 고된 노동과 그것을 함께 한 사람들 속에서 진정한 낭만이 우러난다는 것을 백번 설명해 준 들 어찌 알 것인가.

병을 구하라고 구병이런가

불한당은 겨우 면했지만, 삼박사일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하는 내게 윤 선생이 ‘이제는 절판되어 희귀본이 되었다’며 자신이 쓴 책을 한 권 선물했다. 첫 장을 넘겼다. 두꺼운 펜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똥도 잘 푸고/김도 잘 매고/두엄도 잘 깔고/감자도 잘 심고….. 변산이랑 사는 데 손색이 없겠구먼요/고생 많았슈/비까지 맞아 가면서”

무겁게 싸들고 간 노트북의 자판 하나 두둘겨 볼 새가 없었지만, 그곳에 있는 내내 나는 그를 인터뷰했다. 그와 마주 앉아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지 않았지만 그를 알게 되었다.

“나는 줄곧 납자들의 삶을 동경해왔던 사람이고 몇 차례에 걸쳐 출가를 시도하기도 했다. 출가를 하면 일정한 수도과정을 거친 뒤에 뜻이 맞는 동료들과 힘을 합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일반 농민이나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참선하는 생활을 하고 싶었다.”

책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오래전부터 아니 태생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향수병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가을에 꼭 오라고, 뿌린 사람이 거둬야 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니 반드시 와서 감자를 캐자고 했던 까까머리 오빠, ‘아깝다 아까워’를 연발하며 땅에 떨어진 감 중에서 떫지 않은 것만 골라 내게 먹어보라고 주시던 고쟁이 할아버지, 공동체 정서를 잃지 않고 사는 이들이야말로 윤구병의 진정한 혈육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윤구병 선생이 만든 야채효소를 물에 타먹으며 변산을 그리워한다. 그 ‘변’자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져 쿡 웃음이 나올 때면 그의 이름에 들어 있는 ‘구’자도 문득 다르게 그려진다. 아홉 구자가 아니라 구할 구자. 그는 문명이 낳은 세상의 모든 병을 구한다는 뜻에서 ‘구병’일 수도 있다. 새로운 열이 시작되는문턱 아홉, 그 고개를 묵묵히 넘어가는 그의 등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정말로 그는 못생긴 미남이다.

오한숙희 여성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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