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1월 1998-11-01   955

내일 죽어도 오늘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

이혼소송 두번 패소한 이시형 할머니의 항소이유서

"40년을 같이 살면서 단 한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습니다. 초인종 소리에 ‘나야’ 하면, 그때부터 가슴이 분탕질 하고, 뭐 잘못한 거 없나 눈치를 살피게 돼요. 그 영감 앞에 저는 종이고, 하인이었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독선적이고 가부장적인 남편과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다며 이혼소송을 청구한 이시형 할머니(70세)에게 서울가정법원 김선중 판사는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만큼 해로하시라"며 원고 기각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에 대한 언론보도는 ‘해프닝성 우스개’ 쯤으로 사회면 하단 귀퉁이를 할애했고, 일부 여성지들은 이 사건을 빗대 “최근 황혼이혼이 늘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한숨 돌려 생각을 바꾸면, 할머니의 이혼소송 뒤엔 심각한 여성인권 침해가 있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판결이 타당한가 그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과천시 문원동에 사는 할머니를 찾았다.

“내가 처음 시집가던 때는 열아홉 시절이야. 그때는 시집 안가면 모조리 정신대로 끌려가니까 무조건 일찍 결혼을 했지. 전 남편은 9·28 서울수복 때 죽고, 아들 하나 데리고 시부모 모시고 살았어요. 그때 우리집을 드나들던 아주머니가 중매 서서 그 영감을 만났지."

씁쓸한 웃음뒤 공허하게 천장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이미 40년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몇 달 동안 만났지. 그 영감은 이북에 7남매를 두고 혼자 내려온 사람이었어. 그러던 57년인가? 그와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한 거예요."

한달에 5,000원씩 6달치 3만 원을 주고 사글세로 살았다. 전 남편의 아들은 그 집안에서 3대 독자이기 때문에 데려올 수 없었지만, 오현호 할아버지(90세)는 나중에 그 아들도 데려오자고까지 했다. 물론 아들은커녕 할머니까지 쫓겨났지만 말이다. 중림동에서 충정로로 이사와 6∼7년을 살면서 둘 사이에는 아들 하나가 생겼다.

“서른하나에 낳았지. 그 아이가 국민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혼인신고도 안했어. 그 영감은 노상 북에 두고온 일곱남매 얘기를 했어요. 처음엔 듣기 싫었지만, 나중엔 그것도 그냥 넘기게 되더라구. 그때부터 항상 불편하게 살았어. 의처증이 심해 밤낮 어딜 갔다왔냐고, 몇날며칠 주먹으로 치고, 욕하고. 그는 ‘고단수’라 안나타나는 데만 때려. 시커멓게 멍들어 온몸이 쑤셔도, 그냥 맞고 사는 거야."

예수를 믿어? 나를 믿어라

할머니는 또 할아버지의 까탈스런 성격 때문에 집에서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야 했다. 호텔이나 가서 먹을까 다른 데는 앉지도 먹지도 않는단다. 친구도 없고, 친척간 왕래도 별로 없다. 그리고 누가 집에 오는 것도 싫어했다.

“나는 정말 감금생활 한 거예요. 또 그 영감에게 10원짜리 하나 용돈으로 받은 게 없어요. 그저 찬거리 사라고 만원씩 주는 게 고작이지. 그가 법정에서 맘대로 돈 쓰게 100만 원씩 장롱에 넣고 다녔다고 진술했다대요. 장롱 속에 있었겠지. 그 장롱열쇠를 가진 사람은 그뿐인 걸. 내게 무슨 그런 큰 돈을 줘요? 패물도 나갈 때만, 그것도 끝나면 재빨리 제일은행 금고로 갔다 넣는데…."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만나 살면서 일수놀이를 시작했다. 하루종일 있다가 저녁에만 돈받으러 나가곤 하더니 어느날엔가 화가 폭발할 지경까지 이르러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들으니 돈이 잘 안걷히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당신이 좀 다니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할아버지는 흔쾌히 수락했다. 할머니가 다니니 꽤 잘 됐다. 사람들이 돈도 잘 주고 운영이 제법 잘 돼 재산이 꽤 불었다. “그렇게 돈 벌어오는 거나 용납하지, 아무데도 못 다니게 했어요. 그리고 나갔다오면 항상 ‘어느 놈 만나고 오냐’고 퉁박을 줬지."

항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할머니는 사채놀이로 제법 큰 돈을 번후 동교동에 100평 남짓의 집을 샀다. 그리곤 만성 스트레스로 인한 당뇨병과 고혈압에 걸리게 됐다.

“그이가 어떤 인 줄 아오? 애 낳고 병원 있을 동안 얼굴 한번 안디밉디다. 그때 ‘저 사내가, 정말 내가 애 낳다 죽어도 모른다, 할 사람이다’ 싶더라구. 우린 부부였지만 한번도 같은 이불을 덮고 잔 적이 없어요. 항상 각자 요를 깔고 자는 게지. 그리곤 애가 생기면 빨리 가서 떼라고 등을 떠밀었지. 그게 세 번은 됩니다. 이북에 있는 일곱남매 때문인지 애도 싫어하더라구. 그러다 93년부터 각자 방을 썼어요. 서산 살던 동생이 하룻밤 자고 가라길래 차편도 없고 해서 그러마 하고 전화를 했더니 악을 쓰고, 난리에요. 전화 끊으면 또 하고, 또 하고…. 나는 생전 종교의 자유도 없었어요. ‘예수를 믿어? 나를 믿어라’ 그러면서 주먹질을 했죠. 그래도 몰래몰래 통신교리를 했는데 나 없는 사이 그 책이 영감한테로 배달된 거예요. 그랬으니 불호령이 났죠. 무슨 년, 무슨 년 해가며 당장 죽일듯이 난리를 치더라구요. 그때, ‘아, 나는 이제 더 이상 저 사람하고는 못살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딴 데로 가야겠다 생각했는데 막상 갈 데가 없는 거예요. 평생 그 영감 수발들고나니 아무데도 갈 곳이 없더라구. 그래서 다시 그 놈의 집으로 들어갔죠. 그때부터 각방을 쓴 거예요."

할머니는 묘한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코끝이 빨갛게 물든 할머니는 젊은 기자 앞에서 부끄럽다 생각하셨는지 이내 고개를 돌린다.

“그러던 주말 아들내외를 부르더군요. 애들한테 ‘이제 느이 어머니 느이 집으로 데려가서 살면 안되겠니?’ 하는 거예요. 올 게 왔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내 꼴이 뭐가 돼요. 며느리 보기도 낯부끄럽고 손주도 앉혀놓고 세상에… 그래서 한마디 했죠. ‘나도 느이 집에 갈려고 그랬다’ 그랬더니 막 쌍욕을 하면서 ‘여편네가 그 따위로 입 놀린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나서 얼마후 대전엘 갔고, 애들은 서울로 지 애빌 본다고 올라왔어요. 연휴 때라 며칠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날 아들만 온 거예요. ‘왜 너만 왔니?’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거 다 가져가래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 내려가봤더니, 제가 쓰던 화장품, 휴지, 양말짝까지 모조리 실어보냈더라구요. 아, 이제 완전히 쫓아내는구나. 너무 괘씸했어요."

그 사건이 있은 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이름으로 돼 있던 재산까지 모조리 오현호, 당신 이름으로 등기해 놓았다. 명분은 여자 이름으로 되어 있으면 세금이 많이 나온다는 것. 장기신용은행에 아들과 할머니 이름으로 되어 있던 현금도 모두 할아버지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할머니는 40년간 할아버지 수발만 들고, 무일푼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다.

마누라에겐 일원 한푼 줄 수 없다

95년 할머니는 첫 번째 이혼소송을 걸었다. 96년 2월 선고된 1심 판결에서 법원은 “원고와 피고 사이에 형성된 갈등은 피고의 권위적인 태도와 구속에 시달린 원고가 이를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하는 반면 피고는 종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이를 제압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시적인 것일뿐 원, 피고 사이의 혼인관계는 원, 피고의 나이, 혼인기간, 생활양식 등을 고려할 때 파탄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청구를 기각했다.

판결후, 오 할아버지는 재판정에 코가 빠지게 절하며 할머니와 잘 살겠다고 맹세했단다. 그래서 할머니는 다시 동교동 집으로 들어갔다.

“화해했으니 괜찮겠지 생각했던 게 오산이었지. 혼자 가면 그 영감이 안받아줄 것 같아 동네 아주머니들과 같이 들어가려고 벨을 눌렀더니 문 밖까지 뛰쳐나와 반성문을 써오라는 거예요. ‘나같은 지식인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잘 써와라’, 하더군요. 실랑이를 하다 동네사람들이 집으로 같이 들어가줘서 나 살던 방으로 얼른 들어가 문을 잠그고 앉아 있었어요. 밥이야 며칠 굶어도 견딜 수 있으니까 그러고 앉아 있으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망치로 그 방을 막 부시는 거예요. 당장 죽일 것 같았어요. 그래 그 길로 신발도 없이 쫓겨났죠. 그날 밤 동네 아주머니 방에서 자면서 새벽에 가 ‘문 좀 열어달라’ 사정해도 외눈 하나 깜짝 안해요."

그리고나서 오현호 할아버지는 97년 5월 19일 고려대학교에 할머니와 함께 모은 재산 36억 원을 혼자 맘대로 기증했다. 세간에 오 할아버지는 평생 모은 재산을 대학에 기증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더욱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할머니가 할아버지 몰래 일수놀이를 하며,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 모은 재산까지도 들어 있었다. 모두 명의변경을 통해 오 할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나한테는 일원 한푼 줄 수 없다, 그거지. 그 영감 고대에 병들면 치료해달라, 죽으면 화장해 납골당에 넣어달라까지 한 모양이데요. 아들에게도 한푼 안주고 그저 자기 맘대로 그렇게 다 해버린 거예요. 지금 나 사는 데도 아들이 1,800만 원 주고 얻어준 거지 그 영감은 생전…. 지금은 생활비도 없이 살아요. 미국 간 아들이 가끔 20만 원씩 붙여오지만 그걸로는 생활이 안돼요. 그래서 동사무소에 생활보호대상 신청을 하려고 갔더니, 그 잘나 빠진 남편 있어 안된답디다. 우리나라는 나처럼 돈 없고 힘 없는 늙은이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법이 더럽게 되어 있더라구요."

할머니는 설움이 복받치셨는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할머니에게 혹시 행복했던 기억은 없냐고 물었다. 할머니의 답변은 이렇다.

“40년 살면서 딱 한번 부산에 간 적이 있어요. 새벽에 출발해 기차 타고 가는데, 속이 쓰려. 그래 ‘영감, 저 호두과자 하나 먹읍시다’ 했더니 들은 체 않고 신문만 보더군요. 그러더니 설탕물에 졸인 밤을 사서 아무 소리없이 저만 먹어요. 난 당뇨라 못 먹거든요."

100년을 따로 살아도 이혼사유 없으면 그만이야

지난 9월 10일 법원은 이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소송에 임한 할머니에게 무심한 판결문을 전달했다. “원, 피고는 이미 40여 년간 부부로서 생활해왔고, 피고는 이미 나이가 90살이 넘었고 원고도 나이가 70살이 넘었으며, 특히 피고가 원고와의 이혼을 원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학기금으로 기부한 재산을 제외하고서도 원, 피고의 여생을 위하여 충분하다고 보여지는 정도의 재산을 남겨두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위와 같은 사정만으로는 원, 피고 사이의 혼인관계가 피고에게 책임있는 사유로 파탄에 이르렀다거나 원, 피고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중대한 사유가 있다고 할 수 없다."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도대체 법원의 판결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못살아, 못살아. 그 영감 절 받아주지도 않고, 그런 사람과 이제 어떻게 같이 살아요? 그저 평생 노예노릇이나 하다 죽으라는 게지. 사람으로 살라는 게 아니야.” 이 사건담당 조배숙 변호사도 법률적 시각에서 어이없다고 해석했다. “사람은 하루라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데 이를 묵살한 법원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40년간 할머니가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살아온 것은 가사사건에서 충분히 이혼사유가 됩니다."

반면 오현호 할아버지의 입장은 단호하다. “100년을 따로 살아도 이혼할 이유가 없으면 안하는 거지, 왜 남의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언론기관이 야단이야. 노인들이 마지막에 가정을 이루고 죽으려는데 왜 가정을 파탄내려고 그래. 이 바보같은 것들. 신문이고, 방송이고 말이야, 어드렇게든 같이 살도록 구성해줘야지 왜 그래? 그 사람 얘기는 다 ‘사기’요. 아, 내 돈 탐나니끼니 노나먹자고 그러는 거야, 알간? 아, 내가 재산 없다면 이혼소송 하갔어? 행복하게 살긴 뭘 행복하게 살아, 그저 늙은이가 밥 먹고 살면 되지. 특별한 게 뭐 있어?" 할머니의 표현대로 할아버지는 완고했다. 좀체 누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짧은 몇 분간의 통화였지만 영상필름처럼 할머니의 40년이 스쳐지나기도 했다.

법원, 노인인권 차원으로 판단하길

요즘 솔직히 할머니는 ‘맘은 편하다’신다. 비록 하루종일 어두운 방에 앉아 돈 50원 벌자고 크리스마스 멜로디카드를 만들고 있지만 할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당도 가고 동생과도 만날 수 있어 나름의 생활기쁨이 있다.

“이런 게 자유인가봐. 앞으로 살 일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맘은 편해. 잠깐, 내가 자장면 시켜줄게 먹고 가."

약속한 2시간을 훌쩍 넘기니 얇지만 환하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할머니와 형광등을 켜고 때늦은 점심으로 자장면을 시켜먹었다. 할머니는 자꾸 당신이 ‘팔자가 너무 세서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가슴을 쳤다. 하지만 그건 우리 사회가 너무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이기 때문이리라. 법원의 판단처럼 두 사람은 이미 늙어 황혼에 젖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고, 단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어떤 법학자는 ‘남편의 권위주의’가 이혼사유는 될 수 없다며, 그러면 아마 한국 남자들 모조리 이혼당하게 될 거라고 웃었다. 또다른 법학자는 할머니가 40년간 겪었을 심적 물질적 고통을 도덕적 잣대로 일반화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게다가 4년이나 별거중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이혼사유가 된다는 것이다. 한 인권변호사는 할머니의 이혼소송을 노인여성 인권 차원의 ‘소수자 보호’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평생을 함께 살면서 그 둘중 하나가 종속적 관계에서 인권을 유린당하며 살았다면 그것은 어떤 도덕적 명분으로도 정당화 할 수 없다. 혼인은, 그것을 지속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지난 10월 법원에 항소를 신청했다. 그가 신청한 항소장에 대해 법원이 어떤 판결을 내릴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법원이 한 사람이 40년간 겪었을 인간적 고통을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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