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1월 1998-11-01   1209

특집좌담

IMF 1년,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희연 : 먼저 IMF 1년을 평가해야겠습니다. 최근 IMF 스스로 정책 프로그램의 실패를 자인한 바 있습니다만, 어쨌든 지난 1년간의 한국사회를 종합적으로 되짚어봤으면 합니다.

정태인 : 예, IMF 프로그램은 크게 봐서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투명성인데, 상호지급보증의 금지, 기업회계를 국제수준에 맞춘다든가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고금리정책입니다. 고금리정책을 쓴 이유는 한국이 ‘도덕적 해이’ 때문에 부실기업과 과잉투자가 있었으니까 그런 문제점을 시장주의에 의해 해소하겠다는 것이죠. 바로 최근 IMF가 인정했듯이 고금리정책이 한국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습니다. 사실 우리 경제가 부실화 한 원인은 재벌 중심의 거대기업들이 과잉투자했던 것이 문제였는데, IMF가 고금리정책을 쓰면서 실제로 고통받는 주체는 재벌이 아닌 중소기업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런 데에서 실업자들이 양산되었고, 재벌들이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대규모의 실업을 발생시켰죠. 그러면서 말그대로 ‘20 : 80 사회’라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김동춘 :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한국이 IMF를 맞은 이유는 생산·금융·각종 경제체제 전반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 시장논리만으로 치유될 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건대, IMF가 이런 상황에서 시장주의적 개혁을 강요했을 때 거기서 나타나는 결과는 기존의 정치관행이나 금융관행, 생산관행이 고쳐지지 않은 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결국 재벌이 개혁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대화되는 현상을 만드는 거죠. 밑으로부터 민주주의에 의한 개혁과 외부의 힘에 의한 시장 논리의 개혁, 두 가지가 충돌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밑으로부터의 개혁이 보완되지 않는 여러 한계를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대화 : IMF가 요구한 개혁은 시장주의적 개혁인데, 이것이 문제일 수 있다고 봅니다. 통상 우리가 사회구조를 개혁할 때, 불가분 정치적 역할이나 국가 역할이 개입되기 마련이죠. 그런데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논지와 시장의 역할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논지가 충돌하는 양상으로 가고 있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한편으론 국가 역할을, 또 한편으론 시장의 강화를 논하고 있죠. 여기서 비롯된 약간의 모순적 충돌상황이 상당히 많은 문제만 야기하고, 효과적 매듭을 짓지 못하는 상황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대훈 : 일단 저는 최근 6개월 동안 벌어진 상황을 단순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짧은 시간에 100만 명 이상의 사람이 갑자기 실업을 당하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생활고 때문에 자살을 해야하는 처지가 생겼습니다. 이는 어떤 경제학의 이론에서 보더라도 기본적 인간성이라든지 사회정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IMF체제가 개입된 거의 모든 나라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우리나라에서 개혁이 어떻게 성공해야 하는지 뿐아니라 IMF체제가 채무자에게 일방적으로 부담을 주고 채권자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안주는 일방성의 문제라든가, 의사결정이 폐쇄적으로 되면서 각 나라가 발전시킨 민주주의나 시민사회의 개입을 차단시켜 버리는 문제 등의 보편적 문제를 안고 있죠. IMF체제가 갖는 독특한 이념 즉, 채권자중심이고 시장에 맡기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이 이념에 대해 국가나 우리 사회가 초기에 인식을 잘 하지 못했고 그래서 대응방안에 있어 상당히 큰 혼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IMF프로그램에 대한 평가

조 : 김대중정부의 1년 개혁을 평가할 때 위기관리정권으로서는 상당히 성공했지만 개혁정권으로서는 기대에 못미친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위기관리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성공이 있었는지 그리고 초기 IMF가 고금리 등 긴축정책을 편 것을 포함, 정책패키지를 우리에게 요구한 바 있는데 이런 정책패키지에 대한 평가도 해 주시죠.

정태인 : 되돌아보면 IMF 협상내용이 상당히 굴욕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목에 칼이 들어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쨌든 그 위기는 넘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구요. 그렇지만 문제는 대통령이 계속 월스트리트를 바라보면서 정치 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여러 복안들을 뒤처진 얘기라든가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치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경제개혁이 IMF가 요구한 쪽만 법제화됐던 것이죠. 물론 IMF가 요구한 투명성 조항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죠. 우리나라 기업은 불투명한 회계처리가 관행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투명하게 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제도개혁만으로 한국경제를 바꿀 수는 없죠. 특히 5대 재벌은 IMF에 따라가면서도 자신들의 지배권을 고수할 수 있고, 오히려 앞으로는 지배권을 확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결국 김대중정부가 핵심적인 경제개혁을 하려 했다면 어떤 뚜렷한 기조를 갖고 재벌을 쳤어야 합니다. 물론 많은 정책이 나왔지만 우왕좌왕하면서 아직까지도 뚜렷한 결과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가 합니다.

조 : 일각에서는 이제 외환위기는 일단 넘겼다, 그리고 최소한 회복기조로 들어섰다는 낙관적 전망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외환위기는 언제나 재발할 수 있다, 아직도 한국경제는 회복기조로 전환된 것이 아니라는 양분된 시각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과연 한국 기업경영의 투명성이라는 원칙이 지난 1년 동안 상당한 진전이 있었냐는 것이지요. 이런 두 가지 의문점을 정태인 선생님께 드려보고 싶은데요.

정태인 : 경기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면, 외환위기가 금방 올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외환위기는 근본적으로 한국에 들어온 외화가 빠져나가면서 발생하는 건데, 지금 한국에 들어온 외화의 양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외환위기가 곧 닥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경기가 회복국면에 있다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고, 지금 세계 경제상황을 보거나 한국경제가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봐도 우리는 지금 불황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지 회복국면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대화 : 최근 정부의 국정운영방향을 두고 위기관리노선이니, 개혁노선이니, 또는 김대중정부가 위기관리정부냐 개혁정부냐는 등의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경제 뿐아니라 세계경제 사정이 전반적으로 악화하고 있는 상황을 전제한다면 아마도 이 위기관리의 기간이 대단히 길어질 것 같고 따라서 위기관리에 대한 처방이 단기가 아닌 장기처방, 또는 구조적 처방에 의해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DJ정부가 취임 전후에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성과라고 봅니다만, 그 외에 중소기업을 비롯한 대다수 기업의 도산, 대규모 실업, 구매력 감축이라든지 등등의 문제를 감안한다면 위기관리는 지금도 진행중인 것이고, 이 위기관리를 단기적으로는 처방할 수 없을 것이라 봅니다. 최근 대통령이 개혁적 담론을 발언하고 있지만 기본 기조가 시장주의적, 보수적 위기관리노선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정부가 보수적 위기관리노선으로 기울어진 배경에는 현재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정책적 자원의 한계가 작용하고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조 : IMF체제가 도래한 것은 기존 개발독재식 국가운영 패러다임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국가운영 패러다임을 앞으로 어떻게 바꿔갈 것인지. 김동춘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동춘 : 현재와 같이 거대 독점자본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경제 하에서 저는 자유주의 기조라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이라고 봅니다. 제 생각에는 분단, 경제성장, 재벌, 부패로 연결되는 이 세트를 바꿀 수 있는 패러다임이 필요하고, 그것은 새로운 자유주의적인 패러다임이라기보다는 21세기에 지탱가능한 경제체제를 어떻게 건설할 것이냐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앞으로 5년 후면 우리나라도 환경라운드에 의한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를 받기 때문에 사실상 5년이 지나면 지금보다 더 심각한 실업문제가 야기될 수 있어요. 또 최근 고용구조를 보면 전문인력은 오히려 부족한 상황이고 단순노무자는 넘쳐납니다. 이런 고용구조도 바꾸려면 기존의 교육체계, 사회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주주의와 삶의 질, 국가의 목적을 새롭게 설정하는 문제들과 IMF 위기탈출의 문제가 연동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대훈 : 지금의 위기는 단순히 경제적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위기이고, 기본적인 사회정의의 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제노동기구의 최근 자료중 실업문제 하나만 봐도 아무런 대책이 없어요. 21세기 초반까지 전체 인류의 20∼25%가 실업화 될 것이고, 계속 실업자는 증가한다고 보고 있어요. 이유는 첨단기술이나 새로운 경영기법은 인력을 줄이는 쪽으로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구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발상전환이 없으면 실업문제나 빈부격차, 사회적 분열, 사회분열로 야기되는 비군사적인 안보위기, 환경안보의 위기 등에 대처할 수 없죠.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은 철저히 20세기적, 고도성장적 고속 경제개발모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고 특히 환경운동이나 복지, 삶의 질을 강조하는 여러 시민운동의 노력을 흡수하는 통합적인 노력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청와대와 내각에 개혁세력 전진 배치하라

조 : 우리의 개혁 방향을 총론적으로 얘기했는데 각론으로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정치개혁, 재벌개혁, 사회개혁 등 영역별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개혁의 방향이 무엇인지 점검해 봅시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정치권 사정은 DJ식 정치개혁의 서막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이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개혁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과거 문민정부가 직면했던대로 정치공학적 사정으로 전락할 것인지 우려하는 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치개혁에 대한 평가부터 했으면 합니다.

정대화 : 새정부 출범 7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정치개혁이라 이름붙일만한 개혁의 시도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치개혁은 권력구조, 관료주의사회 또는 부정부패를 청산하는 인적 개혁 또는 잘못 형성된 행정조직의 개편 등 일련의 개혁적 조치가 있어야 하는 건대, 우리에게 그런 개편이 있었는지 저로서는 일차적 의문이 듭니다. YS출범 초기에는 사정개혁, 고위공직자 재산등록, 하나회의 제거와 같은 방법론을 차치하고서라도 정치개혁의 화두들이 제기된 바 있었지만 현재 새정부 하에서는 이런 정치개혁의 화두들이 제기된 적도 없습니다. 물론 출범 직전 정부조직을 개편한 바 있고, 6·4지방선거 이전 선거법 개정을 통해 일부 조항을 고친 적이 있지만 그것을 개혁이라 할 수 있는지, 또 정개개편을 위한 몇가지 논의가 있었지만 그것은 의원들의 당적이동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전까지 있었던 정치권 사정에 대해선 첫째 사정개혁의 시기가 너무 늦었습니다. 인적 청산은 대개 정부 초기에 하는 것인데 6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진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이는 대단히 돌출적이다, 그래서 과연 이것이 정부의 사정 프로그램에 의해 순리적으로 진행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저는 이런 식의 사정개혁이 정부의 프로그램에 의한 것은 아닐 거라 봅니다. 그런 식의 정치개혁은 바람직하지 않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김영삼 씨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또 개혁을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소위 정치적 개혁의 구심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이러다 보니 정치개혁의 방향, 노선, 방법 어느 것에 대해서도 준비된 프로그램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동춘 : 제 생각에 정치개혁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요구에 호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국민의 5%에 포함하는 사람이 국회의원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 또 국민의 10% 정도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여론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경우, 또 그들이 국민의 5% 이익에 부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경우, 이런 경우에 국민의 요구에 호응하지 않는 정치라고 볼 수 있고, 이것을 바꾸는 것이 정치개혁이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국민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당구조라든지 정치인 구성이라든지 각종 법안통과 상황이라든지 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개혁의 목표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정이나 부패척결은 단기적 미봉책일 뿐 장기적으로는 법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정치개혁의 목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대훈 : 저는 일단 총체적 부패구조에서 출발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한번 전면적인 사정을 시작하면 누가 시작을 하든 연쇄적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곳이 썩어 있기 때문에 한쪽 부류만 당하면 반발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총체적 부패사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면적 사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난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사정도 그것이 정치적 술수로 비춰지게 되어 있는 거죠. 이러한 딜레마에 처해 있고 대표적인 것이 지금의 검찰에 의한 정치권 사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가당착적인 부패개혁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은 결국 자기를 죽이는 정치, 그 구조 속에서 과단한 결단이 안나오면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핵심은 전면적이고 철저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권과 정치권 바깥의 세력이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인데, 과연 현정부가 정치권과 정치권 바깥에 있는 개혁세력을 결집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명쾌하다고 생각합니다.

조 : 과거의 총체적 부패구조에 연루되지 않은 새로운 세력의 정치적 등장을 통해서만 비로소 정치개혁이 가능하고 과거의 총체적 부패로부터 떨어져 있는 개혁주체세력들이 결집되면서 개혁이 일보전진할 수 있다는 말씀인데, 자연스럽게 개혁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개혁주체 형성에 대한 얘기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얼마전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현정부 혹은 제도정치권 내의 개혁세력은 점으로 떨어져 있다, 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일종의 ‘개혁세력 벨트’ 같은 것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거죠. 더구나 지금의 개혁은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정대화 교수님께서 조금 말씀해 주시지요.

정대화 : 현재 우리 사회에 정치개혁을 포함한 개혁의 구심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개혁구심은 권력구조 내에서, 행정기관 내에서, 정당 내에서, 시민사회 내에서 어떻게든 여러모로 존재하고 이 사이에서 개혁이라는 대의에 상호협조할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어쩌면 시민사회는 개혁에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부가, 특히 정부의 개혁을 앞장서서 추진해야 할 청와대나 행정부가 개혁을 위한 준비를 전혀 해놓지 않고 있어, 개혁세력들의 결합이 차단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정당구조 내에서 국민회의는 개혁적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국민회의의 상대적 개혁성이 국정에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때문에 대단히 답답한 구조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현재 개혁의 출발은 청와대와 내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는 길 뿐입니다. 저는 청와대를 전문성과 개혁성을 반분하는 형태로 개편해 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맡기고, 청와대와 대통령이 힘을 합쳐 내각을 일부 개편하고, 국민회의와 연합해 정부 내에 개혁의 센터를 만들고, 이 센터가 시민사회와 협력한다면, 늦었지만 개혁의 추진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조 :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는데 국민회의는 집권당으로서 상대적 개혁성이 있는데 이런 당의 개혁성이 정부의 개혁과정에 반영되는 제도정비, 통로라고 할까요? 이런 것을 정비하라. 또 하나 청와대와 내각을 개혁적으로 재편하라. 청와대와 내각에 개혁세력들을 전진배치하라. 이것을 오늘 좌담의 하나의 화두로 삼아도 좋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면 개혁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특별히 더 제언이 있으면 하시고 없으면 재벌개혁으로 넘어갔으면 합니다.

이대훈 :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델라 정권이 들어설 때 일종의 시민사회가 개입하면서 과거청산, 새로운 개혁의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솟아나게끔 했던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이것은 개혁적인 정치권에서 만든 법에 따라 형성된 준 민간기구입니다. 이들은 TV 생중계를 통해 피해자의 피해사실 증언,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얘기했습니다. 가해자들이 반성하는 모습이나 여러가지 과거의 잘못들이 그대로 다 드러났죠. 저는 막혀 있는 물은 물꼬를 잘 트면 정확한 방향으로 물이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도 80년대를 거치면서 잠재되었던, 그리고 현 대통령이 강조하고 있는 민주주의 의식,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적절한 진실과 정의에 관한 민간기구를 형성하면 개혁의 열망이 자연스럽게 솟아나고 정치세력에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정대화 : 우리 정치의 3대 문제점은 보수정치, 지역정치, 정경유착일 겁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새로운 정치세력이 우리 제도정치권 내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정치세력이 가급적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보수정치권과 공존하면서 상호 견제하는 구조를 형성한다면 망국적 지역대결구도, 정경유착도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정치학자지만 우리 정당이 진짜 정당이냐, 저는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국회가 다른 나라처럼 국회다운 역할을 하느냐, 이를테면 국민의 주권기관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당없는 정당정치, 국회없는 의회정치를 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마인드를 가지고 있고 시민사회에 탄탄히 뿌리박은 새로운 정치세력이 제도정치 속에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조 : 국가개혁의 중요한 영역으로 아무래도 국민들은 재벌개혁을 핵심 과제로 떠올릴 것 같습니다. 그동안의 재벌개혁 진행과정, 성과를 평가하면서 철저한 재벌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핵심적 정책의제는 무엇인가 논의해 봅시다.

정태인 : 지금 경제위기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의 부실화와 과잉투자. 이런 것들이 사실은 전부 다 재벌체제와 연관되어 있어요. 우리나라 위기가 외환위기로 온 것 자체가 재벌과 재벌이 소유하고 있는 제2금융권이 중심되어 94년에서 96년사이 굉장히 많은 돈을 들여왔고 그 돈을 재벌이 여러 군데 투자해서 생긴 문제들이죠. 한국 재벌의 특징은 다른 재벌이 돈을 벌면 거기에 같이 투자하는, ‘나란히 투자’가 과잉투자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개혁성과를 보면 상대적으로 종합금융사들이 많이 퇴출되었고 은행도 많이 정리됐습니다. 상대적으로 은행 부분의 개혁은 상당히 많은 진전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여전히 은행의 문제는 부실채권이 많다는 겁니다. 부실채권이 많다는 것은 받을 돈은 있는데 실제 돌려 받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기업에게 돈을 빌려줄 여유가 없다는 거죠. 은행 자체가 허약한 상태라는 겁니다. 또 하나는 기업구조조정인데 반도체 산업에 너무 많은 돈이 투자돼 지금 어떻게든 생산설비를 줄이든가 아니면 과도한 경제를 줄이던가 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재벌개혁과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또 기업투명성과 관련된 것은 제도화 되어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실천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고, 일단 제도화 자체도 상당한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제 기업구조를 조정하는 것은 난관에 부딪쳐 있습니다. 정부가 제시한 것이 빅딜인데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죠. 결국 기업구조조정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재벌의 은행소유 금지하라

조 : 최근 일각에선 실물기반 자체가 붕괴되고 있기 때문에 구조조정 압박전략에서 경기부양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해석하기 따라서는 정부의 정책기조 자체가 경기부양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인데요. 재벌개혁 등 구조조정에 정부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정태인 : 정부가 재벌개혁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경제적으로 봐도 은행이 갖고 있는 거대 부실채권을 정리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거든요. 그것은 정부가 공적 자금을 은행에 투여하는 방법인 겁니다. 문제는 그러한 자금을 투여할 때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재벌들이 은행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그것을 정부가 청산해주면 그것은 정말 국가가 재벌들을 도와주는 것밖에 안된다는 얘깁니다. 정부가 은행에 자금을 넣어서 부실채권을 해소해주는 조건으로 재벌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방침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실제 산업구조조정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는데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했던 방식입니다. 서류 내놓고 “도장찍어!" 하는 방식말이에요.(모두 웃음) 이것도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극단적인 방법이 바로 시장에 의한 방법인데 그것은 그대로 놔두면 우리나라 5대 재벌들도 돈이란 돈은 다 흡수하고도 세계자본에 의해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조 : 정태인 선생님은 보안사 분실에서 하는 방법과 시장주의적 방법, 다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태인 : 그렇습니다. 시장주의적 방법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게 되면 모든 돈을 다 빨아들이는 것이 아주 합법적으로 이뤄지게 되기 때문이죠. 일각의 주장대로 은행도 자기 경영을 하니까 재벌의 부실기업에게는 돈을 안 빌려줄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금 상황에서 A재벌에 속한 어떤 은행 총수가 “돈 빌려줘" 하는데 안 빌려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재벌소유지배구조를 그대로 둔 채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게 하는 것은 진짜 악수인 거죠. 그것이 지금 슬슬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두 번째로는 부실기업의 소유지배권, 누가 기업을 소유하고 지배하느냐를 바꿔야하는데, 제 생각에는 거대 부실기업의 부채를 주식으로 바꾸는 것이, 또 은행이 그 부채를 주식으로 바꾸는 일이 가장 합리적인 방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일각에서 그거야말로 재벌이 원하는 바라고 얘기합니다만 그것은 오히려 이 정책이 현실성 있는 방안이라는 얘기도 되는 거죠. 그렇게 해도 은행에 남는 부실채권은 정부가 공적 자본을 투여해서 재벌해체를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의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에 재벌이 가지고 있는 거대 부실기업을 청산하는 조건으로, 부채를 주식으로 바꾸고 소유지배권을 바꿔서 재벌해체로 나가는 것이 현재로서는 합리적인 정책이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조 : 최근 정부에서 은행의 대주주 지분을 4%에서 20%까지 확장하겠다, 이것은 결국 재벌의 은행소유를 훨씬 더 용이하게 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안된다, 또 정부의 재벌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전반적 추세라면 은행이 공익적 기구로 남아 감시역할을 해야 한다, 그 전제 위에서 현재의 기업들은 엄청나게 많은 부채를 출자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 은행의 대주주 소유가 허용되는 상황에서 부채를 출자로 전환한다면 재벌은 훨씬 더 좋아지게 되는 것이고, 이 두 가지 과제는 함께 가야 한다고 이해하는데, 맞습니까? 오늘 토론에서, 재벌개혁에 대해서는 재벌의 은행소유 금지를 화두로 던지고 넘어가야겠군요.

이대훈 : 간단한 보충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저는 이런 위로부터의 압력 뿐만 아니라 기업체제 내부의 민주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소액주주운동 뿐아니라 ‘노동자의 경영참여’ 또한 민주적 변화의 요체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이 지금처럼 잘못된 투자를 하고 정경유착을 하고, 부패할 수 있는 것은 결정권이 소수에 독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업을 잘 알고 사실상의 기업 파트너인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경영의 정보가 노동자들에게, 사회에 공개됨으로써 기업경영이 사회에 개입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이 빅딜만큼이나 중요한 개혁과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 : 현재의 경제개혁이나 재벌개혁의 목표가 투명성 내지는 합리성의 제고라 했을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소액주주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감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참여를 통한 내부로부터의 감시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이어서 재벌개혁과 노동자의 참여문제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동춘 : 재벌 문제는 국민 전체의 문제입니다. 재벌개혁을 강제할 수 있는 국민적 주체는 소비자, 주주, 노동자라고 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는 소비자도 제대로 조직화 되지 않고 있고 주주 역시 권리의식이 아주 초보적인 상태입니다. 노동자의 경영참가 역시 제대로 실시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죠. 한국적 조건에서 본다면 이상적으로 이 세 주체가 다같이 재벌이나 경제활동을 통제하는 주체로 서면 좋겠지만 우선 전국 단위에서 국민이나 노동자 대표가 재벌개혁을 강제할 수 있는 기구에 참여해서 개혁하는 것이 우선은 현실적이라고 봐요. 저는 추상적으로 모든 국민이 재벌을 감시해야 한다고 보는 것보다는 오히려 전국적이고 중앙적인 차원에서 국민이나 노동자 대표가 재벌개혁을 강제할 수 있는 기구에 실질적으로 개입하는 방식과 밑으로부터의 노동자들의 경영참가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재벌개혁을 강제하는 쪽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조 : 그러면 자연스럽게 IMF 1년을 평가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변화, 노동계의 변화를 점검하는 순서로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노동계나 사회적 변화를 점검해 나갔으면 합니다.

김동춘 : 노사정위원회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사회적 합의를 실험하기 위한 기구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만약 김대중정부가 순수하게 시장경제 기조로 가고 있지 않다면 바로 노사정위원회의 실험이 그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나 노사정위원회는 그 기구의 성격 자체가 대단히 불안정하고, 법적 위상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출발부터 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대통령의 입김이 직접 개입하는 노사정위원회는 정리해고의 조치를 막기 위한 방패막이로서의 기능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듭니다. 실제 1기 노사정위원회 합의사항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그러한 의혹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애초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할 당시 표방한 지향이나 이념이 진정으로 노동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시켜 내려는 것이었는지 상당히 의심됩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노동부 대신에 노사정위원회가 노동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주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할 수 있는 정책적 능력이나 자원동원력에 있어 심각한 제약을 안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대화 : 현대자동차사태에서 대통령과 국민회의, 노동부장관이 개입해서 중재를 평화적으로 해결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후에 재벌이나 언론 쪽에서는 과잉개입이라 평가했지만 과잉개입을 근절할 수 있는 대안이 있었냐고 물어본다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노사관계가 새로운 변화의 시점에 있는 상황에서 달리 대안이 없지 않았던가, 생각이 듭니다.

노사정위원회가 성공적으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첫째는 노사정 삼자가 적절한 수준의 협의를 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 위원회 자체가 법적 위상을 포함, 법적 제도적 뒷받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행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정부, 특히 대통령의 의지가 지속적으로 표명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가동되더라도 정부나 대통령의 의지가 약화되면 노사정위원회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 이 세 가지 조건이 이번 상황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1차 노사정위의 합의사항이 거부되고 2차 노사정위는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 처해버림으로써 사실상 부당해고에 대한 대책기구로 전락해버리는 역할의 축소가 나타나고 있죠. 따라서 이 노사정위가 잘 되려면 대통령 직속의 독자적 권한을 갖는 위원회로 설정되고, 노동개혁과 관련해서는 노동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 : 사회적 정치적 위기가 고조될 가능성이 있는데 저는 정부나 기업이 과거와 다른 새로운 대응양식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1기 노사정위원회에서 초기업 노조의 실업자들을 흡수하기로 합의한 바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노동계의 요구가 관철된다는 것을 넘어 사회적 갈등을 흡수하고 완충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 건데요. 기업경영에 노동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여러 가지 사회문제의 짐을 노동자가 함께 지도록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회적 완충장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부가 보다 폭넓은 사회적 갈등의 완충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IMF 이후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것은 실업 때문에 노조에 참여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든다는 측면도 있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사회적 위기 적신호다, 그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김동춘 : 실제 하부 노동조합원들은 고용안정을 위한 투쟁을 요구하고 있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실직자 문제가 더 큰 쟁점이 되고 있죠. 이런 지점에서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얼마전 한국노총이 실업자들을 조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적이 있지만 민주노총은 이렇다할 대책을 내지 못하고 있죠. 그것은 역시 대중조직으로서의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일반 조합원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차원과 하나의 사회정치세력으로서의 노동계가 재벌, 혹은 정치권과 일정 정도의 교섭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져야 한다는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지요.

전국단위 조직으로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정치적 지도력이나 사회적 개혁에 대한 시야를 가지고 이 문제에 대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하부 노조에 대한 일사불란한 조직적 통제가 어려운 조건에서 하부노조의 요구, 고용보장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해 있어서 일사불란한 정치적 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부에서의 부당노동행위 등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 이상의 대처를 할 수 없고 재벌개혁문제 역시 성명서나 약간의 시위를 제외하고는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는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대훈 : IMF 구조조정 국면에 들어서면서 노조가 상당히 적대적 환경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경제정책 기조는 한마디로 노동조합과 국가의 개입을 악으로 규정하는 기조이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빈부격차가 격화되는 거의 모든 나라는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의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로 바뀌고 이해관계가 다변화되면서 전체적으로 조직률이 약화되는 현상을 겪고 있는 겁니다. 조직률 문제도 크게 보면 노동자층의 이해관계가 다변화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죠. 지금 하신 말씀대로 노동조합이 노동자층 중에서 어떤 계층을 대변하느냐, 정규직, 대기업,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대변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죠. 단순 비판이 아니라 인구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대표적 조직인 노동조합이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갈 조건이 높아진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영향력, 책임성, 기여도에 대해 이것은 노동자조직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민운동과 노동조합이 함께 노동조합의 위기를 토론해야 할 것입니다.

조 : 정리해고 반대라든가 고용위기 차원으로만 노동계의 대응이 집중되면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잃어갈 수 있다, 그런 얘기죠? 그래서 재벌개혁을 포함한 폭넓은 국가 개혁과제, 시민사회의 개혁과제에 노동계가 훨씬 더 선도적으로 싸워나가는 방식으로 대응의 폭을 넓혀가야 하지 않느냐는 주문으로 이해됩니다.

정태인 : 정부가 개혁을 성공시키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국민의 힘을 끌어올리는 것이죠. 그 방법 중에 가장 조직화 되고 강력한 힘은 노동조합입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해온 정책은 일반 노동자로 하여금 국가를, 정부를 불신하게 하는 정책들이었잖아요. 재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정부의 개혁세력과 국민대중이 결연되는 것입니다. 정부 내의 개혁세력을 고립시켜서 재벌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는 구도말이에요. 그런데 말려드는 정책을 써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층민중과 연대하라

조 : IMF의 어두운 터널을 뚫고 한국 사회가 위기를 넘어 개혁의 길로 가기 위한 시민사회운동의 몫은 뭘까, 또 IMF 이후 달라진 한국사회 모습들이 시민사회운동에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시민사회운동의 평가는 무엇일까, 그것부터 질문드리죠.

이대훈 : IMF체제에 대응하는 시민사회운동도 혼란스러웠던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초반부 애국심에 호소했던 근검절약운동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정부고위관료가 적절한 소비를 해달라고 애걸하는 국면으로 바뀌었죠. 체제를 보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인식의 결여, 혼란을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중산층의 축소 또는 몰락이 시민운동에 가져오는 바는 커다란 변화일 거라 생각합니다.패러다임이 다양화 되고 이념적 분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특히 가장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저소득층, 노동자층, 실업자층 이른바 기층민중과의 연대문제가 시민운동을 상당히 곤혹스럽게 하는 이슈로 부각될 것이라고 봐요. 이 점에 대비할 필요가 있겠죠.

정대화 : 시민사회운동과 국가는 가급적 ‘항상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민화협과 제2건국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국민운동 네트워크라는 형태의 새로운 조직방식이 얘기되는데 그런 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정부 내에서 개혁문제를 본격적으로 추진할만한 기구가 없는 상태에서 자꾸 외곽조직만 꾸리려는 것은 껍데기만 남는 형태의 조직작업일 수 있고, 또 하나 정부기구도 아니고 시민기구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꾸리는 것은 시민운동도, 정부도 서로의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조 : 예를 들어 제2건국추진위원회 같은 기구들이 반관반민이기 보다는 자율적 시민기구로 운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씀이신가요?

정대화 : 제2건국이 굉장히 좋은 화두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정부가 시민사회 전체를 다 묶어 어떻게 해보겠다는 발상은 좋지 않고, 그 흐름은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상당히 자율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조 : 그러면 조금 미묘한 얘기같습니다만 IMF체제라는 새로운 상황, 그리고 국민정부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시민사회운동진영 내부의 미묘한 분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민운동진영 내부의 변화 혹은 재편의 방향이 있겠는가의 문제지요. 예를 들면 시민협에 대응하는 제2의 시민협이 만들어져야 하는가의 그런 얘기를 하는 분도 있고….

이대훈 : 전체적인 추세로 보면 시민운동 전체 보다는 특정한 지향을 가진 그룹으로 나뉘는 경향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 IMF체제에 대한 판단을 명확히 내리는 단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의 그룹화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죠. 길게 보면 신자유주의 경제기조에 어떻게 대항할 건가를 두고 그룹이 나뉠 수밖에 없다고 예상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기층민중, 노동운동과 진보적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시민운동과의 연대가 그룹화의 일차적 과제가 될 것 같아요.

조 : 이를테면 국민정부 하의 새로운 시민사회 리더십이 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하시는 거죠?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의 공세에 대응하는 반시장주의적인 시민사회의 연대, 이런 것이 현재 핵심적인 과제가 아니냐, 그런 말씀이십니까?

이대훈 : 반시장주의라기보다는 시장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국가적 반신자유주의적인 연대가 필요한 거죠. 반시장주의라고 하면 오해가 굉장히 크더군요.

정태인 : 사실 90년대 초까지만해도 대단히 뛰어난 학자들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에 대해 뚜렷한 견해를 제시하지 못했죠. 이것이 어떤 모순을 갖고 있다는 얘기는 했지만 그 이전 70년대까지 나타났던 여러 모순을 해결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아닌 어떤 다른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 유럽에서의 움직임은 토니 블레어나 안토니 기든스의 얘기 자체가 맞다기 보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넘어서려는 사상적인 움직임이 있고, 실제 정치적 힘이 그렇게 형성되고 있다는 판단이 듭니다. 또 하나 희망적인 것은 미국, 특히 IMF라든가 월스트리트에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던 일본이 위기의 극에 달하니까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미국 위주의 정책에 대한 안티의 요소로 나타난 것이죠. 이처럼 신자유주의에 관한 미국식 정책에 대한 여러 안티가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곧 하나로 뭉쳐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그림이 곧 마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21세기 한국사회 의제는 무엇인가

조 :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이 전지구를 휘몰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물결로부터 생긴 많은 희생자들, 주변화 된 사람들, 새로운 사회적 약자들이 출현할 것이라고 보고 이런 새로운 사회적 약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운동, 그들 움직임의 새로운 연대, 이런 것들이 한 측면에서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고 또다른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도 신자유주의를 극복해 가고 대응해 가는 노력의 핵심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쟁점으로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현시기 IMF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가져야 할 새로운 의제, 이슈, 개혁목표, 개혁지향은 무엇입니까?

이대훈 : 21세기 의제, 21세기 화두라는 제목으로 오늘 탈고를 하나 했습니다. 주로 급진적인 시민단체들의 대안적 패러다임, 발전모델들을 조사하다 보니까 12가지 정도의 공통의제가 도출되더군요. 인류역사상 빈부격차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한계와 극단에 대한 성찰이 첫번째 의제구요. 정치권에서 경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권에서 사실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은(시민사회에서 강한 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민중의 권한 확대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참여와 자기결정에 기초한 강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고 있죠. 지금처럼 경제권력에 밀리는 약한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이 큰 의제인 것 같구요. 세 번째는 이에 기초해 저소비 저성장에 적합한 사회경제시스템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는 신안보론도 중요합니다. 안보란 20세기 핵무기로 상징되는 군사적 안보론인데, 그것이 한계에 봉착하면서 비군사적인 안보의제가 굉장히 중요해지고 있어요. 환경안보라든가 실업, 폭력의 증대, 재래식 무기의 범지구적 확산, 청소년 폭력의 확대 등을 다 포함한 것인데 이는 안보의 사회화라는 의제로 말할 수 있죠. 우리와 같이 군사적 대립이 심한 사회에서는 안보의제를 사회화하는 과정이 남북한 통일과정을 순화시키는데 굉장히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대화 : 새정부가 무엇을 할 것인지 개혁의 방향, 목적, 원칙은 무엇인지, 또 재벌개혁을 한다는데 거기서 국가나 시장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그 관계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정치개혁의 방향은 무엇인지 등등 이런 이야기들이 충분히 제기되고 토론되지 않는다면 어느 한쪽의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최근 우리 사회의 모든 쟁점의 귀착점이 경제적 비용의 관점에서 처리되고 있지 않느냐고 생각해 봅니다. 이것은 적어도 50년만에 여야간 정권교체를 통해 개혁을 하겠다는 정부의 개혁방침 치고는 지나치게 편협한 것이라고 봐요. 이런 점 때문에 시민단체가 정부가 잘못 가고 있는 부분, 빈 부분을 메워주는 아젠다 설정의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태인 : 아젠다 세팅에서 첫째는 국제금융자본을 규제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국제금융자본의 움직임이에요. 지금부터 그 규제에 대한 연구와 여러가지 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금융자본이 전혀 신경 안 쓰는 제4세계, 아프리카 혹은 구 동독권의 일부, 중동 쪽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내적으로는 앞으로 경제위기가 극복되더라도 5% 성장을 못넘길 것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행동양식을 개발하고 익숙해져야 합니다. 저성장 속에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는 패턴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거예요. 그런 거시적 안정성을 가져오는 정책들이 개발되어야 5% 성장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10% 성장사회에서는 성장이 빨리빨리 되기 때문에 불안하더라도 참아낼 수 있지만 5% 성장사회에서는 그런 점이 절대 불가합니다. 제 생각에 가장 바람직한 사회는 거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개인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아닐까 해요.

김동춘 : 돌이켜보면 우리 역사에서 국민을 열광시키는 정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억압적 통치 체제하에서 국민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으로 등장할 수 없었던 조건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정치가가 되어야만 희망을 주는 정치가 가능하다고 봐요. 희망을 주는 정치 없이는 국민들을 절대 동원할 수 없구요. 우리 사회는 약자나 하층을 사회적으로 통합시켜서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만들고 있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봐요. 또 하나는 북한문제인데, 남북 양쪽이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우리가 두 개의 국가로 21세기를 계속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통합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다면 결국 북한의 문제는 미래 우리의 문제죠. 북한이 현재 식량난을 겪는다면 이것은 앞으로 한국의 사회문제인 겁니다.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 : 장시간 감사드립니다.

조희연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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