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0월 1998-10-01   1087

실업극복 풀빵잔치에 초대합니다

충무로 풀빵장사 아가씨 박민영

아침저녁 부는 선선한 바람, 소주 한잔과 따뜻한 오뎅국물을 나눌 수 있는 정겨운 벗이 그립다. 이 가을, 보고 싶은 사연을 마음으로만 간직해야 할 사람들에게 충무로를 지날 일이 있으면 꼭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분명 아름다운 웃음으로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충무로 극동빌딩 뒤편에서 풀빵장사하는 박민영 씨(34세). 그녀를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참 당당하다고 말한다.

대학까지 나온 사회복지전문가가 웬 풀빵장사? 궁금함도 잠시, 그녀가 사는 삶의 모습을 조금만 지켜보면 참 그녀다운 결정이었다고 생각된다.

박민영 씨는 소위 386세대다. 군사독재 시절 대학을 다니면서 방송국 활동과 학생운동을 했다. 대학졸업 후엔 목포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는 유달산 달동네에서 생활보호대상자들과 4년을 함께 보냈다. 그때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과 살아가는 삶이 천직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 아이들, 모자가정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94년 사회복지활동을 해오던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정부보호에서조차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홈그룹 활동을 결성했고, 그러면서 서울로 상경했다.

압구정동 파출부에서 식당일까지

정기적인 월급도 없고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도시생활이었지만 그녀 특유의 낙관성과 여유로움으로 주변의 벗들을 만들어갔다. 객지인 서울에서 지금도 마음 터놓고 지내는 지인들은 당시 ‘열린사회 아카데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객지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스스로 풀어야 하는 숙제였다. 큰 고민 없이, 그녀는 명쾌한 논리로 풀었다. 돈도 들지 않고 특별한 기술도 원하지 않는 일들을 찾았다. 약 1년 동안 압구정동 파출부, 식당일 등 시간이 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자기 일을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래서 아는 선배에게 60만 원을 빌려 포장마차 준비를 시작했다. 한 달 동안 서울의 동대문시장, 중부시장, 중앙시장 등을 돌아다니며 풀빵기계를 구입했다. 장소만 결정하는 일이 남았다. 평소 인사동이 마음에 들어 대책 없이 물색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 어떤 아저씨가 풀빵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아저씨를 잡고 부탁하기 시작했다. 중앙시장에서 이미 중고기계까지 구입하고 장사를 하려고 하니 허락해 달라고. 처음에 아저씨는 난색을 표했고 무조건 떠나라는 이야기만 했다. 그러나 민영 씨의 맑은 눈 속에 담긴 진실을 읽었는지 그러면 다른 좋은 장소를 찾아주겠노라며 지금 자리잡은 충무로 극동빌딩 뒤로 직접 안내를 해주었다.

그때부터 노점상 단속원들, 경찰들과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돈을 주면서 단속원, 경찰들을 피해 가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리어카를 빼앗기는 일이 수시로 있지만 장사를 못하고 공치더라도 끝내 매일 나가서 자신의 리어카를 돌려받기 위해 싸우면서 포장마차 자리를 지켰다. 하루는 파출소에서 난리를 쳤다. 줄 돈도 없고, 돈을 주면서 거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국화 한 다발과 피로회복제를 들고 가서 그들을 설득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구청단속반에 리어카를 빼앗겨 평균적으로 벌금 10만 원은 한달에 한번씩 내야 한다. 그런데도 이 일을 하며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다.

“혼자 살면서 크게 돈 벌겠다는 욕심도 없고, 내가 만든 풀빵으로 배고픈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며 사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동안의 경험만으로도 그녀는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충분했다. “리어카를 빼앗기고 나서 스트레스가 될 때는 참 서러워요. 그래도 저는 형편이 낫지요. 부양할 가족 이 없으니까. 가족 있는 사람은 어떨까 싶어요." 항상 겸손한 태도가 어려운 일을 극복하게 해주는 힘이 되는 게 아닐까?

“몸과 마음이 건강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런 민영 씨의 마음은 가족들에게도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 풀빵·오뎅 포장마차를 하고 있는 것을 아는 유일한 가족은 큰언니. 그녀는 처음 이야기를 듣고는 울기까지 했다. 왜 공무원으로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포장마차를 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게다.

“지금도 목포에 계신 부모님은 서울에서 사회복지 전문요원으로 직장 다니고 있는줄 알고 있어요. 이야기를 안 한 것은 노인네들 쓸데없이 막내딸 때문에 마음 상하실까 하는 걱정 때문이지, 하는 일이 부끄러워서는 아니에요."

저녁시간을 이용, 사회복지 공부

민영 씨는 풀빵장사를 하면서도 저녁시간을 이용해 보육대학 사회교육원을 다닌다. 아침 6시 30분 토스트장사 준비를 시작으로 하루를 바쁘게 지내지만, 스스로 천직이라 여기는 사회복지운동을 위해 보육교사 자격증이 필요할 것 같아 공부하고 있다. 올 12월 수료하면 다시 아동인권을 위해 일할 생각이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미래에 대한 거창한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특별히 전문 사회복지기관에 들어가서 일할 생각도 없다. 공무원에서 풀빵장사로 이어진 그녀의 인생경험은 사회가 만든 고정 관념을 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유난히 폭우가 쏟아진 올 여름 그녀는 두 달 간 포장마차를 쉬었다. 휴식은 또 하나의 생산을 위한 준비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IMF 한파는 그녀에게도 닥쳐왔다. 풀빵 판매가 2/3로 줄었다. 그래도 점심때면 민영 씨는 ‘알아서 드시고 돈을 놔두시거나 그냥 드셔도 됩니다’라는 메모 한 장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동안 충무로에서 사귄 사람들,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가톨릭 들빛회나 사회복지원의 마음씨 넉넉한 분들이 그녀도 함께 할 수 있는 점심을 준비해주신다. 민영 씨에게는 이런 분들이 항상 사회의 희망이라고 믿는다. 어려울수록 도움을 주는 분들을 보며 자신이 살아가야 할 모습을 한 번씩 반추한다. 그래서 올해는 큰언니를 설득해 풀빵장사에 동참하게 해 작은 이벤트를 마련할까 생각중이다. 주말에 실업자들에게 풀빵으로라도 한끼의 허기진 배를 해결해주는 일. “요즘 제일 마음 아픈 일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어깨 처진 가장들의 모습이에요. 눈이 초롱초롱 빛나지 않아요. 내가 직접 장사하며 살아보니 한 가족 먹여 살리는 일이 서민에게는 정말 쉽지 않아 보여요." 그래서 생각한 일이 풀빵잔치다.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IMF 위기라고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소비문화에서 벗어나려면 먼 것 같아요. 서울에 와서 보니 중고등학생부터 유명 브랜드 아니면 사용 안 하더라고요."

그녀는 IMF 위기를 철학의 부재에서 찾는다. 일하는 사람들이 소외된 문화와 경제에서 언젠가는 꼭 올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단다. “요즘 들어 철학의 중요성을 다시 느낍니다. 배가 부른 상황도 결국 어려운 사람들이 소외되면서 만들어진 비극 아닌가요?" 이런 그녀가 본 시민운동단체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했다. 마지막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시민운동에 기득권층이 생기면 절대 안 됩니다. 마음으로 운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간판이 아닌 사회운동을 할 수 있고 비로소 시민이 신뢰하는 시민운동으로 발전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화난 모습을 보긴 쉽지 않을 것 같다. 마음과 몸이 고달플수록 언제나 웃음을 보일 수 있는 사람 박민영을 만난 것은 나에게 참 행운이었다.

차미경 참여연대 국제인권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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