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7년 01-02월 1997-01-01   1556

해외통신- 왜 미국노동자는 클린턴 지지했나?

미국의 실패와 한국 노동운동 과제

지난 96년 미국 선거에서 공식 노조인 AFL-CIO(American Fede-ration of Labors of Industrial Organization:전(全) 미국 노동조합연합)는 민주당이 대통령직 및 의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다. ‘Labor 96’ 계획이라고 명명된 선거전략은 클린턴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친노조 성향 민주당 후보들이 의회에서 다수의석을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선거가 있기 전 96년 3월, AFL-CIO는 특별 전국대회를 열어 3,500만 달러의 선거자금 지출을 결의했다. 이 돈은 각 선거구에서 민주당이나 그 후보의 정책과 그것이 노동자 이익과 어떻게 부합되는지를 알리는 선전비에 사용됐다. 특히 깅그리치를 필두로 한 공화당 급진파가 주장하는 복지 및 의료보장비 지출의 지속적인 삭감은 노동자들을 긴장시켰다.

어쩔 수 없었던 선택, ‘민주당 지지’

노동조합원들은 자원봉사자로서 동료, 가족, 친지들에게 민주당 지지를 호소하는 선전원, 운동원으로 활동했다. 어떤 민주당 인사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동료나 이웃들을 자극하고 그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은 노조가 지출하는 돈보다 훨씬 엄청난 위력”이라고 말했다. AFL-CIO의 이런 자세는 오랜 조직 경험을 가진 스위니(Sweeney) 위원장의 유연하고 적극적인 지도력에 힙입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노동자 정당이 조직된 나라였다. 그러나 미국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독자정당을 만들기보다 자유주의적인 민주당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번 선거에서도 대다수 노조 간부들의 목표는 노동자 독자정당 결성보다는 클린턴 당선과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던 의회의 민주당 탈환이었다.

한편, 한국의 노동계에서 88년 이후 지금까지 선거 때마다 논란이 돼온 비판적 지지와 독자후보 논쟁은 미국에서도 미미하게나마 계속되고 있다. 96년 11월 5일 미국 대통령 및 의원 선거가 있기 전 한 노동자는, “이후에도 계속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노동자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자신들의 강요된 선택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토로한 바 있다.

이번 선거 전에도 미국의 전기, 라디오, 기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 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전국대회가 열렸으며, 선거구별 조직화에 착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노동자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노동자 전위(Workers Vanguard)’라는 조직에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대응을 시도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독자적 조직화를 주장하는 이들 노선이 현장 조합원들에게는 별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기에 선거 국면에서 어떤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현실 및 선거를 바라보는 공식 노조의 입장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생활수준의 하락, 의료보험 및 연금 혜택의 불완전, 과로, 실업, 인종 차별화 위험 등이 미국 사람들 일상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다. 문제는 경제성장의 과실을 기업, 정부, 노동자들이 함께 나누어 갖도록 해주던 전후 사회협약이 포기된 데 기인한다. 미국 기업은 새로운 세계경제의 압력에 직면해 임금 삭감으로 대처하고 있다. 기업은 성장의 과실을 고소득자, 주식소유자들에게 돌리고 있으며, 다운사이징, 해고, 대체고용만이 노동자들에게 안겨지고 있다. 미국 노동자들은 이러한 경제환경 속에서 점점 더 무력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들의 생활은 비참해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교섭력은 노조 조직률 감소로 나타난다. 지난 25년간 미국의 노조 조직률은 지속적으로 감소돼왔다. 미국은 더욱더 양대계급 사회로 변하고 있으며 19세기와 같은 조건 즉, 부자와 빈자가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21세기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선거일 당신의 한 표는 당신의 고용주와 같은 한 표이다. 만약 부자들만이 투표한다면 부자들만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들만이 생겨날 것이고,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투표한다면 노동자들을 존경하고 위하는 정부를 갖게 될 것이다.”

결국 대다수 미국 노동자들은 클린턴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심지어는 반대하면서도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미국에서 일자리가 없어지도록 하는 결정(NAFTA 비준)을 내리고, 복지의 수혜자들을 더 어렵게 만든 대통령을 지지해야 한다는 사실에 떨떠름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최선이 아닌 차악”, 더욱 나쁘게 되지 않기 위한 선택 등, 한국 노동자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구호가 지난 선거 당시 노조 관계자들 사이에 끊임없이 오르내린 말들이었다. AFL-CIO 위원장인 스위니도 자신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 가족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이들로서는 공화당의 영향력을 축소시킴으로써만 노동자들에게 호전적인 보수주의자들이나 자본 측의 공세를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 공식 노조의 기본 전략은 한국에서의 비판적 지지, 다시 말해 노동자의 독자정당 결성보다는 노동자 이익을 나름대로 대변해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야당 지지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민주당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당은 아니지만, 노동자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셈이다.

이들의 민주당 지지 이유는 노동자들의 생활과 직결된 여러 쟁점, 즉 일자리, 임금, 의료보험, 교육 등에서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훨씬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클린턴과 고어가 노동자들에 유리한 정책을 펴왔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지난 4년간 1,000만 명의 일자리가 새로 생겨났고, 최저임금이 상승됐으며, 교육·훈련, 환경과 기술에 더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에 대한 지원과 학생들을 위한 교육비 대부가 가능해졌고, 보편적인 의료보장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며, 직장의 안전과 소수민족이나 약자를 위한 보호조치(Affirmative Action) 관철을 위해 애썼다는 것이다.

실리적 조합주의가 갖는 한계 노정

구체적으로 노조 측에선 지역별로 노동자들을 선거운동에 동원하기 위해 선거 등록을 유도했다. 그러나 60%의 조합원만이 등록을 했다. 나머지 40%는 이들의 표현대로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할 것이 예상됐다. 그리고 조합원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후보와 정당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 대대적인 정치교육을 실시했다. 약 1만여 명의 노조활동가들이 전국 각 선거구에 배치돼 선거의 쟁점 사항을 노조 관계자나 조합원 가족들에게 설명했다.

노조 측은 노동자들이 선거에 임하여 이처럼 단결된 모습과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선거 막바지에 가서 이들은 조합원 모두가 선거에 참가할 것을 설득하는 한편 방송을 통해 각 후보들이 선거 쟁점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선거 직전 조사에 의하면 노조원들의 68%는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조 측의 민주당 지지전략은 공화당 후보나 사용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노조 측의 정치자금 지출은 기업으로 하여금 더 많은 돈을 공화당에 지출하도록 자극했으며, 크리스찬 연합 등 보수적인 조직을 더욱 단결시켰다.

보수적인 인사들은 노조가 조합원들의 의사에 반하여 조합비를 부당하게 민주당 후보지지 자금으로 전용했다고 비판했다. 미국 식의 자유주의 논리에 입각해보면, 유니언숍 조직 자체는 물론, 조합비 갹출과 사용 모두가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 노동자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거 직후 헤리티지 재단 주최로 열린 노동자들의 96년 선거 참여 토론회에서 경영자측 대표로 나온 인사는 미국의 노동운동이 본령을 벗어나 과도하게 정치에 개입하고 있으며, 지도부가 조합원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전횡을 했다고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시했다.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하고, 비록 의회의 다수를 장악하지는 못했지만 노조가 지지하는 민주당 후보들이 진출함으로써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계속되는 우경화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공화당이 주장하는 과격한 복지 및 의료보장비 삭감은 약간의 제동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번 선거를 통해 노동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확대시켰는가 생각해보면 결과는 그리 좋지는 않다. 또한 이런 전략이 미국 노조의 전통적인 노선에서 탈피하거나 노동자 정치를 향한 새로운 모델이나 실험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자 후보를 진출시키고 정당 조직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노조측이 노동자 대중의 조직적인 힘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 정치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전망을 갖고서 선거정치에 개입했다기보다는 단지 전통적인 실리적 조합운동의 원칙에 입각해 정치를 경제적 이익의 연장으로만 파악했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들은 스스로 사회의 책임있는 주체가 되려하기보다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조합주의적인 시야를 버리지 못했다.

과거 60년대 월남전 참전 조직을 노동자들이 지지했던 것처럼, 노동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미국 경제의 확장과 번영을 통한 일자리 확보라는 국가이기주의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정신적 노예상태에서는 극히 초보적인 정치적 실천도 노동자의 사회적 영향력의 확대로 발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에서 노동자들이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것은 1906년 유진 뎁스가 얻은 6%였으며, 그 후에는 어떤 노동자 후보도 그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심지어 노동자 독자후보와 비노동자 제3당의 후보가 출마했을 경우, 노동자 후보는 이들 비노동자 제3당 후보를 앞서지도 못했다.

가까이는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기존의 양당구조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억만장자인 페로가 사회주의 후보보다 훨씬 많은 득표를 했으며, 이번 선거에서도 역시 노동자 독자후보는, 페로는 물론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시민운동가 네이더(Nader)보다 훨씬 적은 득표를 하는 데 그쳤다. 즉 미국 노동자들은 하나의 계급세력으로 존재하지 못하며, 오직 시민사회 내의 사회적 분파로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어려운 미국

미국 노동자들이 이처럼 미미한 세력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국은 선진 자본주의 중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존재하고 있으며, 빈곤층의 분노와 좌절, 흑인 및 스페인계,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은 별로 해소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 현상 즉,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를 둘러싼 논쟁은 19세기 중반 미국을 방문해 미국과 유럽의 차이점을 주목한 토크빌(Tocqueville)에서부터 시작해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람시 등 사회주의자나 립셋(Lipset) 등 보수적인 사회학자에까지 100년 이상 진행돼온 논쟁인데, 이들 선각자들의 판단은 이번 선거에서 또다시 확인됐다.

이들 주장 중 미국 노동운동과 관련된 것만 거론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국에서는 봉건제가 결여돼 있기 때문에 계급간 구분이 애매하며, 미국에는 초기부터 개인주의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노동자들 역시 집단주의 혹은 집단적 목표에 헌신하려는 태도가 약하다는 것이다. 또한 풍부한 자원과 넓은 영토를 갖고 있어 노동자들이 지위상승이나 개인적 출세의 가능성에 높은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다민족 사회여서 노동자들간에 분열이 심각하고, 하층 노동자는 언제나 새로운 노동자로 채워졌기에 노동자들간에 분열이 만성화돼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일찍이 보통선거가 도입돼 선거권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노동자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유럽과는 달리 미국 노동자들은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으며, 양당제도가 초기부터 고착돼 있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런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게 별로 유용한 대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양당은 나름대로의 철학과 정책을 가진 전통적인 정당으로서 매우 유연한 입장을 취할 뿐더러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어 사회적 긴장을 쉽게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노동자들이 새롭게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인 것 같다. 그 이유는 미국의 노조 조직률이 계속 하락해 이제 10% 정도에 머물러 있고, 제조업의 공장 이전으로 조직력과 단결력을 과시할 수 있는 생산직 노동자의 비중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수의 실업, 주변 노동자들은 거의가 흑인이나 이민자들로 채워지고 있어 사용자들의 분할통치가 대단히 용이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미국 선거는 돈의 힘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선거였다. 오랫동안 의회활동을 열심히 해온 다수의 상·하원 의원들이 이번 선거에는 ‘일신상의 이유’로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엄청난 액수의 돈을 마련할 수도 없었으며, 또 돈에 의해 굴절된 의회의 멤버가 되고 싶지 않다고 현실정치에 노골적인 환멸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돈은 주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선전을 위해 지출됐는데, 돈이 없는 독자적인 후보는 아무리 휼륭한 비전과 도덕성을 갖추고 있더라도 대중들에게 알려질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자본측은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뿌렸다. 노조가 책정한 선거비 정도의 액수는 기업 측의 공화당 지지에 비하면 양동이 속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적은 액수였다. 대자본의 경우 어차피 양다리를 걸칠 수밖에 없으므로 민주당과 공화당에 적절히 자금을 배분했으나, 중소기업은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지원했다. 선거가 돈의 힘에 좌우되면 될수록 노동자들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더 축소될 수밖에 없다.

한국 노동자들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

이번 미국 선거에서 노조가 보인 경험은 한국 노동자들에게도 몇 가지 시사를 던져줄 수 있다. 우선 한국 노동자들은 미국 노동자들과는 매우 상이한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 있다는 생각이다. 정치적인 환경을 보면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양당이 실질적인 정책정당으로서 어느 정도 기능하는 데 비해 우리의 경우 기존 정당은 어떠한 철학이나 사회적 기반을 갖지 못한 1인 정당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 기존 정당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다수 노동자들은 어느 정당에도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갖고 있지 않다. 즉 정당의 사회적 긴장 흡수능력이 거의 없으므로 한국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야당 지지자로 남을 가능성은 미국보다 훨씬 적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 노동자들은 아직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한편, 미국 생산직 노동자들은 점차 그 숫자가 줄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제 공장을 보기가 어렵다. 그것은 미국 제조업이 멕시코를 비롯한 제3세계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층 육체노동자들은 대부분 흑인이나 히스페닉으로 채워지고 있어 미국의 전통적인 육체노동자의 개념은 사실상 인종문제와 겹쳐 있으며, 노동자의 독자적인 정체성이 형성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에 비해 한국 노동운동은 여전히 제조업 노동자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공장노동자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강한 동질성을 갖고 있어 단결이 비교적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미국 노동자들이 인종갈등의 포로가 되어 있는 것처럼 한국 노동자들은 지역갈등 구도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야당 집권을 통한 정권교체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텔레비전 매체의 막강한 영향력과 금권선거의 위협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경제의 세계화에 따른 노동조건 하락, 실업, 노동자 권리의 침해, 조직 노동자의 교섭력 약화 역시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노동자의 조직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선거에서 노조 측의 대응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것은 ‘돈’이 아니라 노동자측의 조직된 힘만이 정치력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용자의 무기는 물론 돈이다. 이번 한국의 노동법 개정논의 과정에서 한국경영자총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자본측은 노동자들이 실력 행사를 하면 응징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기업이 평상시에 돈으로 국회의원과 관료, 그리고 각종 언론이나 선전수단을 통해 국민들을 매수하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사용자들이 갖고 있는 아무런 실력행사의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돈의 게임’ 그 자체를 노동자들이 인정하면서 게임의 구성원이 되려는 것은 사실상 질 수밖에 없는 게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즉 사용자들이 선거과정에서 쏟아붓는 규모의 돈을 노동자들은 결코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노조 간부들이 돈을 무기로 하여 선거에 임하겠다는 것은 결국 지는 게임에 들어가는 것이다.

‘돈의 선거’, 돈으로 매체를 장악해 대중들을 매수하는 선거는 노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 이익에 반하며,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뒷걸음치게 한다. 시민으로서 노동자는 우선 게임의 타락 그 자체를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노동자와 시민은 조직력이라는 무기에 호소함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하며,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정책 대결이 존재하고, 그것이 투표에서 판단의 가장 강력한 기준이 되는 미국 선거가 분명 한국 선거보다는 선진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 노동자들은 미국 노동자들로부터 별로 배울 게 없다.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실천의 영역이 한국 노동자들에게는 열려 있다.

김동춘 미국 UCLA 객원연구원· 사회학·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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