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담론

호남당과 진보세력 연합론 비판

15대 대통령선거(이하 대선)를 앞두고 제도권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미 지난 95년 지방선거 무렵부터 대선 승리를 위한 전략을 꾸준히 실천해왔다. 그리고 지난 96년 4월 총선이 끝난 뒤에는 사실상 대선정국에 돌입했다. 이러한 제도정치권의 움직임을 고려할 때,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지금부터라도 진보진영은 대선전략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의 상황은 국내외정세 모두 다 진보진영에게 많은 어려움을 던져주고 있다. 국제정세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좌절이나 사민주의의 위기, 거의 모든 국가들의 신보수주의화, 세계화와 지역블럭화, 전세계적인 탈냉전 추세와는 달리 여전히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돼 있는 남북관계, 그리고 주권의 부분적 회복에도 불구하고 지배-종속관계의 틀 내에 머무르고 있는 한미관계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국내정세에 있어서도, 최고 정책결정권자의 민간화와 정치영역의 부분적인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정치제도나 행태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자본가계급은 세계화 전략과 유연생산 전략 등으로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충실하고 노동자계급과 중간계급은 이들의 전횡으로 고통과 희생을 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해야 할 정치세력들이 오히려 자본의 이익에만 충실한 행태를 보이고 있고, 특히 3저 호황 이후 만끽해온 물질적 혜택을 놓칠까 두려워 돈을 버는 일이라면 자본가계급에의 순종은 물론 탈법행위도 눈깜짝하지 않고 해치우려는 중산층과 일부 노동자층의 존재 등이 진보진영을 둘러싸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92년 대선과 비교할 때 더욱 심각한 것은 불완전하기는 했으나 상징적인 역할이라도 했던 진보운동의 정치적 구심체(예, 전국연합과 민중당)가 그 영향력이 이전 같지 않거나 아예 해체됐을 뿐 아니라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구심체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진보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세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잠재적인 구심조직 중 그 어느 조직도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단일한 전략이 나오지 못함은 물론 논의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실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갖는 잠재적 가능성

진보진영이 맞닥뜨린 현실이 이러하다면, 필자가 설사 아무리 ‘멋진’ 대선전략을 제안한다 하더라도 이를 실천할 주체가 없다면, 여기서 제안하고자 하는 ‘진보진영’의 대선전략이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이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사회에는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하더라도 앞으로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진보세력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세력은 다름아닌 민주노총으로 결집돼 있는 노동자계급운동세력이다.

민주노총은 아직 합법성을 확보하지도 못했고, 조직 내 단결력도 다지지 못했으며, 하나의 통일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지도 않다. 그러나 여당이 마련한 노동법 개정안에도 포함돼 있듯이, 민주노총의 합법화와 노조의 정치활동은 임박한 현실이 되고 있고, 이에 대비한 노조 내 움직임도 활발하다. 게다가 민주노총의 조직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으며, 통일된 행동과 정치활동을 보다 용이하게 할 산별체제도 착실하게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조직력과 단결력을 가진 민주노총은, 모든 자본주의사회에서 그렇듯이, 우리 사회에서도 상당한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거의 유일한 조직이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여기서 제안하는 ‘진보진영의 대선전략’은 주로 민주노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민주노총의 대의와 명분에 동의하는 다른 정치조직(예, 전국연합)이나 시민·사회운동단체(예, 전농, 민가협, 참여연대 등)를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민주노총은 이들과 더불어 대선전략을 논의하고 실천해나가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을 주로 염두에 둔 것은 방금 지적한 대로, 무엇보다도, 민주노총만이 가장 탄탄한 대중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이, 최근에 지역패권주의와 지역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호남당’과 노조가 정치연합을 이룰 것을 제안한 글(황태연 교수의 「호남당과 진보세력의 연합으로 정권교체를」, 『말』 1996년 11월호-편집자)에 대한 평가라는 성격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합법적인 공간에서의 선거·정당정치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의 원리에 충실한 선거정치와 정당정치로 표현되는 대의제민주주의 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실현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혁명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한국식 자본주의를 바꿀 수 없는 현재, 필자는 대중의 당면한 일상적인 고통과 희생을 해소하는 것도 진보진영의 중요한 과제라고 보며, 이러한 과제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틀 내에서도 상당부분 해결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선거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적절한 전략이라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필자의 대선전략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진보진영이 택할 대선 전술은?

진보진영의 대선전략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노동법이 정부안대로 개정될 경우 97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될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전망해보자. 97년부터 98년 지방선거 무렵까지는 일종의 과도기로서, 노조와 진보정치세력은 노동자정당 또는 진보정당의 건설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내용과 방식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논의를 활발히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약 2년 동안의 준비기를 거친 다음, 98년 지방선거에는 조직적으로 참여해 상당수의 당선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당선자들은 91년과 95년 지방선거에 당선돼 통치능력을 검증받은 노조출신 정치인들과 더불어, 새로운 정당의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될 것이다. 아마도 이 무렵에 이르러서 전국적인 범위를 커버하는 정당을 출범시키거나, 혹은 정당이 이미 이전에 출범했다면 이를 전국적인 정당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새로이 건설될 정당의 노선이나 형태는,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조직노동자의 낮은 비중이나 노동자들의 정치의식과 지역주의적 투표행태 등을 고려할 때, 적어도 초기에는 노동자 등 기층대중을 중심으로 하되 학생과 중간계급의 하층을 포괄하는,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계급연합의 진보적인 대중정당이 될 것이다. 어쨌든 새로운 진보정당은 전국적인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2000년 총선에는 상당수의 노동자후보를 국회로 진출시키고, 마침내 2002년 대선에는 노동자출신의 대통령후보를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진보진영이 다가올 대선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상과 같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형태나 단계와 함께, 현재의 제도권 정치구도와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제도권 정치는 지역패권주의를 추구하는 집권여당과 이를 타파하기 위해 지역등권론을 내세우는 야당에 의해 구조지워져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95년 지방선거 무렵부터 대선을 대비해왔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정당은커녕 정치적 구심체조차 갖지 못한 진보진영이 독자후보를 낸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이 택할 수 있는 전술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는 기존 정당의 후보 중 하나를 택해서 정치연합 등을 통해 지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산별 건설 등 조직확대 및 강화에 치중하고 후보전술을 구사하지 않은 채 정책토론회 등을 통해 정책요구만을 내세우는 것이다.

전자에 대한 평가의 내용에 따라 후자의 선택 여부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이 둘의 전술은 서로 연관돼 있다. 그리고 전자에 대한 판단은 세 가지 기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기존 정당 또는 예상후보 중 진보진영이 지지할 만한 노선이나 정책을 표방하는 정당이나 후보가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선에서의 그 정당이나 후보의 당선가능성이며, 나머지 하나는 그 정당이나 후보가 진보진영이 요구하는 정책을 실현시키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선가능성과 정책실현 의지나 능력(특히 의지)에 대한 평가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 정당이나 정치인이 보여준 행태를 근거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이 얼마나 신뢰감을 갖게 행동했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최근 한 논자에 의해 제안된 ‘호남당’과 노조의 정치연합에 대한 가능성이나 조건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저항적 지역연합론’의 논리

노조가 ‘호남당’과 정치연합을 제안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92년 대선의 결과가 지역주의적 성격을 확산·강화시킨 것으로 밝혀지자, 한 논자는 지역차별로 희생되고 있는 호남인과 계급모순으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를 결합시켜 이 두 세력을 진보의 지지기반으로 하는 정치연합을 주장한 바 있다. 전형적인 진보지식인이었던 그는 이에 대한 이유로서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지역문제가 계급문제로 환원될 수 없지만 계급문제와 중첩돼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지지(진보세력이나 호남당에 대한 지지)가 하루아침에 형성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묶어서 말하자면 지역문제는 그 자체로서는 진보적 성격을 갖지 못하지만 계급문제와 중첩돼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지역주의적 대립구도는 그 자체로서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저해하는 장애요소이지만, 지역주의에 근거한 지배-피지배관계가 계급에 근거한 지배-피지배관계와 겹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지역적으로 핍박받는 호남인들을 대변하는 정당의 지지기반이 탄탄하기 때문에, 진보세력은 호남당과 정치연합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역주의의 성격에 대한 인식이 이러했던 그 논자가, 호남인과 호남당이 비민주적 운영방식을 보이고 보수적인 정책을 채택하는 등, 지역패권주의 정당에 대한 도전을 제기하는 명분 중에서 계급적, 진보적 요소가 ‘빠져 나가자’ (또는 희석되자) 이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호남인과 호남당의 저항적 지역주의든, 영남출신과 ‘영남당’의 패권적 지역주의든, 지역주의는 그 자체로서는 진보적 성격은 물론 민주적 성격을 갖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호남당에 대해 이러한 인식을 하는 진보인사들은 대부분 노조의 호남당과의 정치연합을 반대하고, 독자후보나 정책전술을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 또다른 진보적 인사는 이와는 정반대의 제안을 했다. 이 논자의 주장은 노조가 호남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이유로서 몇 가지를 들었다. 첫째, 지역패권주의와 이로 인한 지역차별을 타파해 지역등권을 실현하는 것은 계급모순을 타파하는 것만큼 중요한 근대민주주의 또는 진보의 과제다. 둘째, 대다수 국민들이 지역등권을 지지한다. 셋째, 한국전쟁에서의 대량유혈경험으로 말미암아 극우보수세력이 노동문제나 이념문제만 나오면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권력구조 하에서는 노동자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와 자유를 직접적으로 요구할 수가 없다. 넷째, 영남출신의 지역패권블럭이 극우보수적인 기존 권력구조의 급소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저항적 지역주의에 의한) 타격은 곧바로 극우보수적 권력구조의 해체를 가져올 수 있다. 다섯째, 호남당은 노조의 정치사회적 당면목표(노조의 완전한 자유와 정치세력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지지한다. 여섯째, 호남당은 대선에서 승리를 확보할 수 있는 자민련과의 저항적 지역주의의 상층연합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이러한 상층연합을 추구하면서도 각 정당은 독자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호남당은 노조의 요구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노조를 포함한 진보세력은 노동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지역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호남당과 정치연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남당’과 ‘충청당’의 저항적 지역주의에 기반으로 하는 ‘상층연합’과 호남주민(사실상 호남당)과 노조의 ‘하층연합’이 동시에 이루어질 경우 대선에서의 승리는 필연적이고, 그럴 경우 극우보수적 권력구조도 해체돼, 노동운동의 완전합법화는 물론 각종 선거에서의 공천권도 필요한 만큼 확보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도 보다 용이하게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이 호남당과 노조의 정치연합을 제안한 논자는, 무엇보다도 패권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를 명확하게 구분해 평가할 것과 저항적 지역주의(연합)세력에 의한 지역등권의 실현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지역등권론을 단지 지역이기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받아들이거나 기껏해야 저항적 지역주의의 다른 표현으로만 받아들이는 적지않은 진보인사들의 주장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신지역 때문에 권력이나 일자리 또는 소득·복지를 획득하는 기회에 있어서 차별을 받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는 지역문제가 반드시 계급문제로 환원되지는 않기 때문에, 지역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계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과는 별도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호남당과의 연합론, 그 문제점

그렇다면 문제는, 지역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이냐 또는 계급문제와 지역문제 중 어느 것을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노조가 호남당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보수적이라 하더라도 저항적 지역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세력과 연합해 지역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세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의 이유들을 들고 있다. 이 네 가지 이유의 타당성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국가권력을 장악한 극우보수세력이 노동문제나 이념문제만 나오면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때문에 노동문제나 이념문제를 직접적으로 전면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대체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받는다고 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발전의 원리를 잘못 인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투쟁과 희생 없이 민주적 제 권리가 획득된 경우는 거의 없다. 6월민주화투쟁과 민주노총 건설과정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그리고 영남출신의 지역패권블럭이 극우보수적 권력구조의 급소(핵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타당한 지적이지만, 이들만 타격한다고 해서 극우보수적 권력구조가 해체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우선 극우보수적 권력구조를 지지·지탱하는 인사들이 과연 영남출신 엘리트들만이냐 하는 점에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며, 이런 주장에는 권좌를 차지한 사람만 제거한다고 해서 구조가 바뀔 것이냐 하는 의문도 강하게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이유와 관련된 호남당의 정책적 지향과 행동방식을 보자. 최근의 급격한 노선변경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이 호남당의 ‘상대적 진보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나는 김영삼 정권의 ‘저돌적인 개혁’ 추진 이후 여당과 딱뿌러지게 구별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거의 제시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호남당이 ‘상대적 차별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일반유권자들이 인식할 정도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노조와 호남당의 정치연합을 제안한 이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았다. 필자의 입장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패권적 지역주의와 지역차별은 반드시 극복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분명히 근대민주주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극우보수집단인 ‘충청당’이나 ‘경북당’과도 연합을 한다든지 당내 민주주의를 배제하고 반민주적 인사를 당 요직에 중용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87년 대선에서의 분열에 대해서도 적지않은 영남출신의 노조지도부나 진보인사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호남당이 진정으로 노조나 진보진영과의 정치연합을 원한다면 이 점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노조도 기꺼이 정치연합에 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호남당이 이러한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즉, 정치주도권을 장악하고 패권적 지역주의를 추구하는 영남출신 엘리트들에게 지역갈등에 대해 더 큰 책임이 있듯이, 진보진영 인사들의 지역문제에 대한 잘못된 행태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정치권에서 훨씬 큰 영향력을 가졌던 호남당에게 더 큰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보진영의 호남당에 대한 미지근한 태도는 진보인사의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바도 없지 않을 것이나, 호남당이 ‘노동자는 표가 안 된다’거나 중산층의 표를 깎아먹는다는 이유에서 계급문제나 지역등권 이외의 민주주의적 과제를 외면했던 점도 무시돼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서 호남당의 입장에서는, 표를 의식해야 하는 선거정당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된 유권자들의 행태에 맞게 노선과 정책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지 모른다. 그러나 노조를 포함한 진보진영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호남당이 보다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주기를 바랐다. 문제제기만이라도 적극적으로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야당 또는 반대세력이 어떤 문제를 제기하느냐 하는 것은 여당이 어떻게 하느냐에 못지 않게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설사 그들이 제기한 대로 정책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야당의 문제제기가 여론을 부추기고 어느 정도 지지를 확보할 경우 여당으로서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적지 않은 진보인사들과 ‘호남당’이 서로 비판적인 관계를 넘어, 김대중 씨(DJ)가 정계에 복귀한 이후에는 감정적인 차원의 비난을 주고 받는 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둘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이 진보인사들의 ‘지역감정’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지역문제’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잘못 인식한 데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호남당’과 DJ의 잘못된 정치행태나 보수화에서 기인한 것인지 필자로서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로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들이 조금씩 현실적 근거를 가졌다는 점이다.

진보진영과 호남당의 발전적 관계를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각각이 보여온 행태나 그러한 행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관과 정세판단의 차이가 아니라, 그러한 차이를 만들어내거나 해소해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불신이다. 호남당과 그 지지자들은 진보세력의 행태를 지역패권주의에 대한 동조로 몰아세우고, 진보세력은 호남당과 그 지지자들의 행태를 모두 지역이기주의나 비민주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가 자신들의 ‘정치적 실패’를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은 상호간의 실망과 불신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호남당과 노조 또는 진보진영은 역사적 경험에서나 한국정치 발전을 위해서나 함께 행동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서로에 대한 필요성이 큰 만큼 서로에 대한 기대도 클 것이다. 상호신뢰의 회복을 위해 노력할 때라 생각한다. 특히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 우위에 있는 호남당의 보다 솔직하고 적극적인 자세가 요망된다. 노조를 포함한 진보진영에서도 호남당에 대한 지역주의적 편견을 혹시라도 가졌다면 떨쳐버리고 정치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전술을 구사하든 진보진영 내의 충분한 토론을 통한 합의 하에 추진돼야 할 것이다.

정영태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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