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사상가를 찾아서3

신경림과 민중사랑

김호기 이번 호에는 시인이면서 또한 민중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신경림 선생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신경림 사상가란 말이 나한테 맞을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그저 단순한 시인이니까.

김 제 경우 70년대에 대학을 다녔는데요. 선생님의 시들, 예를 들자면 시집 『농무』를 비롯해서 최근의 『쓰러진 자의 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민요기행』 같은 산문집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문학적 삶을 회고해 보신다면 어떠하신지요.

신 다른 시인과 마찬가지로 뭐 특별히 계획된 삶도 아니었고 또 특별히 남들보다 더 어려운 삶도 아니었어요. 그냥 다른 한국 시인이 살아온 삶과 비슷한 것이었겠죠. 그 시대의 가장 예민한 부분에 대해 둔감해선 문학이라는 걸 할 수가 없으니까, 어떤 시대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달까, 그런 부분은 있겠죠.

또 하나 우리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평범한 삶이 가장 어려운 삶이었죠. 어려운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 나름의 정서가 생겼을 테고 그 정서를 시로 표현하다 보니까 나 같은 시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특별히 내가 의식을 해서, 이런 시를 써야겠다,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 이런 건 없었어요. 다만 정직하게 내가 겪은 시대도 반영하고 내가 살아온 정서도 시에 반영해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민중을 발견한 10년의 침묵

김 제가 책을 통해서 알기로는 선생님께서 50년대에 등단하셔서….

신 예, 56년인가 그렇죠.

김 등단을 하셨다가 한 10여 년간 붓을 꺾었고, 60년대 후반에 다시 문단에 나오시게 됐는데요. 그 10년 동안 아주 다채로운 삶의 경험을 하신 걸로 압니다.

신 50년대는 먹고 살기 힘들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반공주의밖에 없었고, 자유가 철저하게 억압당하던 시절이었죠. 그때 문단에 나왔는데, 전쟁이 끝난 지 불과 몇 년밖에 안 됐고, 길거리에 전쟁으로 상한 사람들, 전쟁통에 허물어진 집들 천지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대한 자각이나 인식도 없이 그저 막연한 소리, 존재니 실존이니 이따위 소리나 하고 앉았었지요. 거기에 대해, 과연 이렇게 시를 쓰는 게 옳은 것인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면서 시를 못 쓰게 됐죠.

그리고 당시에 함께 공부하던 패거리 중에서 한 친구가 문제가 생겨서 구속되는 바람에 겁도 먹었구요. 또 등록금을 계속해서 내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경제적인 형편도 안 됐고, 학교에 다녀야 할 의미도 있는 것 같지 않고, 서울 살기도 힘들고 해서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도 지어보고, 장사도 해보고, 학원강사와 가정교사도 해보고, 금광에 가서 일도 거들어보고, 공사판에 가서 잔돈푼도 벌고 그러다보니 10년이 금방 지나가버렸어요.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서울에 돌아와서 다시 시를 쓰게 된 건데…. 10년 동안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다시 시를 쓰고 문학을 하게 될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런 기회가 생긴다면 옛날 같은 그런, 사는 것과 동떨어지고 현실하고 동떨어진 문학, 그런 말장난은 하지 말고 진짜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 우리 현실이나 역사의 피해자들, 이런 사람들의 아픔까지 내 아픔으로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서울에 와서 다시 글을 쓰면서 쓴 시들이 바로 시집 『농무』에 실린 시들인데, 거기에 그 10년 동안 메모했거나 쓴 시가 몇 편 있어요. 가령 「눈길」이나 「그날」 같은 시들 몇 편이 그렇죠. 물론 나머지 대부분은 나중에 그 10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쓴 것이지만요.

서정적으로 접근했던 민중

김 저도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는데요. 20대에 선생님의 「겨울밤」, 「서울로 가는 길」, 「실명」 등과 같은 시들을 읽고 대단한 전율 같은 걸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때 선생님의 시들이 오늘날 저희들의 의식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요. 그 10년이라는 기간이 선생님의, 민중에 대한 발견의 시기라는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닐까요?

신 저 역시 농촌 출신이라 농사도 지어보고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 전까지 뭐 뚜렷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사실은 농촌 사는 사람들이 농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 10년 동안 이것 저것 하고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됐으니까 저로서는 민중을 발견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죠.

김 사회학을 전공한 저로서는 선생님이 발견한 민중이라는 게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선 저희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농민으로 대표될 수 있는 당시의 민중이라고 하는 계급을 아름다운 전원 속의 존재들이 아니고 대단히 억압적이고 파괴적인 근대화의 구체적인 희생자들이라고 파악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목계장터」라고 기억하는데, 이런 민중을 대단히 한국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갖고 있는 집단으로 파악하고 계신 걸로 저희들은 이해했는데요. 선생님께선 민중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좀 추상적인 질문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신 어려운 질문인데요. 난 민중이라는 게 반드시 긍정적인 측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역사가 잘못된 데에는 상당 부분 민중들한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렇다고 민중에 대한 일체감이나 사랑없이 역사가 흘러간다면 문제가 있겠죠. 문학이라는 것은 그런 일체감이나 사랑에 바탕을 둘 때 우리 나름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겠죠. 저는 사실 서정적인 시인이지 다른 생각을 많이 하는 시인은 아니에요. 옛날부터 저는 ‘난 서정시인’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요. 내가 민중에 접근한 것은 사회과학적이고, 분석적이고, 과학적이고 그런 게 아니고 서정적인 접근이었지요.

『민요기행』을 쓰게 된 사연

김 그런 맥락에서 질문을 드리자면, 선생님이 70년대 후반부터 민요에 관심을 갖게 되신 배경은 무엇인가요.

신 제가 노래를 잘 못하지만 민요를 좋아하게 됐던 건, 고향이 충주인데요, 당시 한강에 나가 보면 이른 봄, 여름, 초가을, 이런 때에 뗏목이 많이 다녔어요. 그럴 때 이 뗏목을 타고 내려 오는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요. 한 배에 두 사람씩 타고 떼를 지어 가는데 하나가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뒤에서 받고, 눈 앞을 지나가는 게 한 서너 시간쯤 걸리는데, 노래가 끊이질 않았죠. 그걸 들으면서 ‘참 아름답다’ 하는 생각을 했고 그게 민요를 좋아하게 된 한 동기가 됐죠. 그리고 또 우리 고향이 장터이기도 하고 광산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온갖 고장의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죠. 모여서 놀고 그러면 다 민요들을 불렀어요. 그런 걸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죠.

그러다가 민요를 다시 새삼스럽게 찾아다니는 기행을 하게 된 것은 「새재」라는 장시를 구상하면서부터예요. 「새재」라는 시는 사실은 남한강 상류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구전돼오는 이야기를 제가 재구성한 거예요. 이 장시는 민요가락을 가지지 않으면 독자들을 끝까지 끌고나갈 수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장시를 구상할 때 민요를 찾아 돌아다니게 됐죠. 그래서 민요기행을 하다가 지역을 확대해서 강원도도 가고, 경상도도 다니고, 전라도, 제주도까지 가게 됐구요.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이 글로 한 번 써봐라 그래서 쓰게 된 게 『민요기행』이죠.

김 저는 그 책을 80년대 중반에 읽었는데요. 제 기억에 의하면 남한강에서 시작해서 제주도로 끝나는 걸로 기억되는데, 가장 커다란 감동을 준 것은 선생님의 민중사랑이자 국토사랑이었습니다.

신 우리 나라 땅이란 게 다녀보면 참 좋아요. 민요기행을 다니면서 제가 얻은 것은 우리 땅에 대한 일체감 같은 걸 제 스스로 같게 된 것이었죠. 땅을 밟을 때의 즐거운 마음 같은 것 말입니다.

세계화하려면 우리만의 것 필요

김 그것과 결부시켜 보자면, 90년대 들어 크게 불고 있는 바람 중의 하나가 ‘세계화’이지 않습니까? 그중 하나가 미국문화로 대표되는 문화의 세계화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민요라고 하는 게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건데요. 요즘 랩 음악이다 얼터너티브 록이다 뭐다 해서 정신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 저는 세계화가 민족적인 것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우리가 세계화하려면 우리만의 것 없이는 세계에 나가서 장사도 안 되는 거죠. 세계화라는 게 일단 외국 나가서 돈을 벌자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진 독특한 것, 우리만의 문화를 살릴 때 세계화라는 것도 가능한 것이지, 우리 것을 없애는 세계화라는 것은 세계화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작년에 프랑스 가서도 그런 걸 느꼈는데, 프랑스 사람들하고 한국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 사람들이 한국문학만이 가진 특수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 볼 수 있었어요. 그때 파리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포럼을 했는데, 프랑스에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행사였어요. 한국만이 지닌 특수한 역사적 배경이랄까 그런 것 때문에 한국만의 독특한 문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실은 별로 특수한 게 없다는 걸 알고서 상당히 실망하는 걸 봤어요. 거기 간 사람들이─거기 간 사람들을 욕하는 건 아니지만─더 독특한 우리만의 분위기를 지닌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계문학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프랑스 사람들하고 비슷한 문학을 한다면 ‘걔들 참 귀엽구나’ 하는 생각이나 하겠지만 우리만의 것을 보여준다면 그렇지 않거든요.

표현의 자유 문제와 상업소설

김 최근의 신세대 작가들의 경우는, 선생님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신 신경숙 같은 경우는 참 좋던데요. 하지만 다른 많은 신세대 소설가들에게는 실망하고 있어요, 기법 같은 게 탄탄하지 않고 공부가 덜 된 면이 있다든가. 시인은 더하고…. 그리고 너무 유행에 휩쓸려가는 것 같아요. 사실 문학이란 게 그렇게 유행을 따라가는 게 아니거든요.

김 제가 보기에도 도시에 사는 일부 중간계층의 심리나 생활세계만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 여전히 한국적인 특수한 정서가 있는 건데, 그걸 무시해선 좋은 문학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령 요즘 뭐 아스팔트, 아파트 그런 정서를 가진 아이들이 읽어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가 돼야 할 것 아니냐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러나 그 아이들도 한국적인 것,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한 생활을 안 했다 하더라도 정서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거죠. 『임꺽정』 같은 게 젊은이들에게 널리 읽혀지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딸아이한테 읽혀봤는데 소설 중에 제일 재미있게 읽은 게 그거라고 그래요. 걔들이 읽으면 말도 죄 모르는 것 천지고 그 정서도 모르는 거죠. 그런데 몸 속에 흐르는 뭐가 있어서 다 알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문학이죠. 문학과 대중예술은 차이가 있다고 봐요. 대중예술은 변하는 시대에 따라 그 정서도 변하지만, 문학에는 그 바탕에 흐르는 정신이 중요한 것이고, 그게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죠.

김 최근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표현의 자유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신 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극단적인 상업주의의 표현이라고 봐요. 하지만 그 제재는 문학 자체 안에서 해야지 법으로 한다는 것은 문학을 위축시킬 염려가 있죠. 시민단체 일부에서 이런 작가들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리는데, 그것이 법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돼서는 안 돼요. 지금 우리 사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상업주의인데, 외설도 결국은 그런 거죠.

김 개인사적 질문이지만 선생님께 커다란 영향을 미친 분들을 회고하신다면….

신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계셨죠. 유촌 선생님이라고…. 연세대 유종호 교수 아버님이시죠. 또 정춘용 선생님이라고, 변호사신데 저보다는 10년 위예요. 정 선생님도 학교 다닐 때 마치 친구처럼 우리들하고 문학이야기를 하고 그랬어요. 집안에서도 삼촌이나 당숙들이 책을 좋아하셔서 책들이 많았어요.

민족민주운동은 성급함을 버려야

김 요즘 대학생들 같은 경우도 선생님의 근작 시집인 『쓰러진 자의 꿈』도 많이들 읽고, 한국적이고 민중적인 정서를 재발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좀 바꿔보죠. 선생님은 80년대에 들어와 민족민주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 문학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조직으로 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한 게 75년도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란 걸 백낙청, 염무웅, 고은, 조태일, 구중서,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돼 만들면서부터였죠. 저는 문학이라는 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의 요소가 말이죠. 하나는 일단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겠죠. 읽어서 재미 없는 시나 소설을 누가 읽겠습니까? 재미를 줘야죠. 그것은 어떤 예술적 완성도를 이야기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즐거움을 주는 것만으로는 문학의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없고, 또 한 가지는 보다 나은 삶을 만들어나가는 데 도움이 돼야 한다는 거죠. 이건 말하자면 문학의 사회성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럼 박정희 시절이나 전두환 시절에 보다 낫게 산다는 게 무엇을 의미했겠어요? 군사독재가 있고서는 행복하게 살 길도 없고, 보다 낫게 살아갈 길도 없고, 그러니까 문학이 정권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우리가 그런 역할을 했던 건데, 사실 문인들은 앞장서서 싸웠다고 하지만 글을 써서 싸우는 것이지 뭐 앞에 나서서 싸웠던 것도 아니었어요.

김 87년 이후의 우리 민족민주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신 사람들이 너무 성급해서 좌절도 빨리 하고, 너무 쉽게 깃발도 내리고 그럽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는, 80년대에 문학 쪽에 아주 급진적인 평론가들이 많았는데요. 이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문학을 비판하고, 소시민적 문학이라고 이야기하고, 문학이 변혁운동의 무기가 돼야지 무슨 쓸 데 없는 짓거리들만 하느냐, 그러면서 굉장히 비판했죠. 그런데 그 비판하던 사람들이 지금 90년대 들어서면서 다 깃발을 내리고서, 이제 깃발을 내릴 때가 됐다, 지금 무슨 새삼스럽게 역사니 현실이니 강조할 근거가 어디 있느냐, 이런 이야길 먼저 해요. 성급해서 그런 거죠. 역사라는 게 원래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지 뭐 한꺼번에 그렇게 얻어지는 겁니까? 변혁운동 내세웠던 사람들은 금방 뭘 얻으려고 하다가 안 얻어지니까, 이건 조금도 얻어질 길이 없다, 그러면서 다들 깃발 내리고 말았는데요. 그런 게 민주화운동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많았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우리가 해야 할 운동이 참 많지 않습니까? 지금도 뭐가 다 된 것도 아니고, 사실 하나도 얻은 게 없는데도 다 얻어진 것처럼 다들 도망가고 있는데, 진짜로 일을 할 때는 지금이에요. 그래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보다 나은 세상 만드는 데 온갖 힘을 다 쏟고 있으니까 실망하진 않고 있고요.

또 사회주의의 몰락이 우리한테 준 충격도 있죠. 우리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상에는 자본주의를 대신할 뭔가 좋은 이념이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일단 무너진 것은 틀림없으니까. 이런 생각도 저는 해요. 사회주의라는 게 여러 형태의 이상주의들 중의 하나지 이상주의 전부는 아니거든요.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이상주의가 없으면 그 시대는 지탱할 수가 없는 거죠. 사회주의라는, 이상주의 중의 하나에 실천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이상주의가 다 없어진 것은 아니고, 사회주의의 몰락이 잠시 충격을 주긴 하겠지만 20세기가 다 가기 전에 새로운 형태의 이상주의가 나와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체제를 서로 생각하고 의논해 가는 시대가 오지 않겠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막연한 소리라고 하겠지만. 너무 로맨티즘이라고들 하는데…(웃음).

실사구시 정신으로 패배주의 극복해야

김 저희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90년대 한국사회는 그 변화의 속도가 대단히 빠르고 이질적인 사회인 것 같습니다. 한 편에서는 여전히 가난한 민중의 삶이 계속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포스트 모던한 문화들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이 당대 현실의 반영이라면,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민족문학의 당면과제들로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신 글쎄요, 민족문학 안에 있는 패배주의를 극복해야 될 것 같아요. 민족문학을 가장 소리높여 외치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지금 풀이 팍 죽어서 민족문학, 이거 뒤늦은 문학 아닌가 이러고 있는데요. 물론 민족이란 게 그렇게 매력있는 건 아니겠죠.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문학이 민족운동, 그런 사회운동과 궤를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 있으니까 민족문학이란 게 여전히 유효하고요. 민족적 정서를 갖는다, 이런 건 세계화 시대에도 중요한 담론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김 마지막으로 시민운동에 대해 평소 생각하고 계시던 걸 말씀해주시죠.

신 지금은 시민운동의 시대라고 생각해요. 변혁운동, 그러니까 괜히 실사구시 정신도 없이 지금도 변혁을 운운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민운동으로 조금씩 조금씩 얻어내는 거죠. 그러니까 한꺼번에 얻으려고 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낫게 만들어가는 그런 게 옳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시민운동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 뭐 비밀결사를 만들어서 뒤집어엎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 있는 세상도 지나갔고.

그리고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한 마디만 더하면, 저는 실사구시 정신을 가지고서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에요. 아직도 일부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북한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비판받아야 할 대목, 부정적인 대목을 자꾸만 미화하려고 하고 그런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통일운동을 해나가야지 그러지 않고서 북한은 무조건 잘하고 우리가 모든 걸 잘못하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계속 가진다면 민중들, 시민들한테 호응을 받을 수 없는 통일운동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생각도 합니다.

김 저희들의 소망은 이제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시가 국어 교과서에 실려서 어린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하는 것입니다.

신 조금씩 조금씩 나아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나아지는 것도 우리가 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겠지만요.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본지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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