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7년 01-02월 1997-01-01   1701

오숙희가 만난 사람

여성운동의 어머니, 이효재

대학 일 학년 여름방학, 여고 동창끼리 대학에서 맞는 첫 방학을 어떻게 보낼까 의논하던 중 한 친구가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라는 책을 꺼내놓았다. 그 친구는 자기의 언니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엮어내신 책이라며 언니 말에 따르면 ‘그 선생님이야말로 지행합일의 산 표본’이라는 거였다. 지행합일은 학교 윤리교과서에나 있는 줄 알았던 우리는 그 말에 반해서 생각도 안 해봤던 여성해방 공부를 하게 됐다. 그 책이 우리 나라에 여성학을 연 의미 있는 책임을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대학원에서 여성학 공부를 시작하면서였다(1979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그 책에는 서양여성해방운동사에서 선구적 역할을 한 여성들의 핵심적 이론과 우리 나라, 중국, 알제리 등 제3세계 여성에 대한 논문들이 실려 있어 민족문제와 여성문제의 중층적 결합구조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 책은 선생이 1975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유엔이 그 해를 세계여성의 해로 정한 것을 기념해 마련된 자리)에 참석하신 것을 계기로 나타난 빙산의 일각이었다. 한국 여성학의 선구자로서 선생은 이미 『한국여성의 지위』(공저, 1976), 『여성의 사회의식』(1978), 『여성과 사회』(1979) 등을 지어낸 바 있었고, 1977년부터 시작된 이화여대 여성학 교과과정을 개발하는 일에도 앞장서셨던 것이다. 1969년부터 12년간은 이화여대 한국여성자원개발연구소장을 지내면서 화곡동에서 ‘도시주민 공동체운동(생협운동과 공동육아)’을 펴신 일이 있었으니 그 의식이 보통보다 20~30년은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선생에게 여성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우선 선생의 제자 키우기가 그렇다. 선생은 학교 사상 최초의 이념서클 ‘새 얼’의 지도교수로 여성의 사회참여와 민주화를 항상 강조하셨기 때문에 제자들 중에 여성계의 중추적 인물이 많다. 여성단체연합의 지은희 상임대표, 여성단체협의회의 김금래 사무총장, 내일신문사의 최영희 사장, 민주당의 이미경 국회의원, 여성의 전화 신혜수 대표,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이혜경 대표…,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선생이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가 된 것은 1958년부터지만 나는 선생의 강의를 대학원에 다니면서야 듣게 됐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에 연루돼 4년 동안 강제해직되신 까닭에서다.

“5·16으로 우리 나라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유교적인 권위구조 위에 군대의 계급적 사고방식이 더해져서 사회 분위기가 반민주적인 상태가 계속됐고 그것이 전두환 정권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사회학 강의를 듣는구나 실감했다.

제자들, 여성계 중추인물로

하루는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이 큰 초코렛 상자를 책상 위에 풀어놓았다.

“애들이 찾아오면서 나 먹으라고 가져왔는데 난 단 거 많이 안 먹으니까 가져들 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자리에서 선생에 대한 후학들의 추억담을 듣다가 나도 끼고 싶어 그 초코렛 얘기를 꺼냈다가 선배들에게 무척 민망했다.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공부하시는 선생님의 간식거리로 장만해드린 것을 후배들이 철없이 몽땅 앍아먹었으니….

어떤 선배가 결혼을 앞두고 선생을 찾아갔다고 한다. 따뜻이 맞아주면서도 ‘난 축하한다는 말은 못하겠어’라는 단호한 말씀에, 마음에 두었던 ‘주례 부탁’은 꺼내지도 못하고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매매춘을 주제로 한 석사논문을 심사할 때 “넓은 의미로 보면 상호 존경 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의 비위를 맞추고 비굴하게 구는 것도 매춘인 셈이 아니냐”고 질문해서 학생들 사이에 ‘급진적 여성학자’로 꼽히기도 했다.

처음 선생 댁에 세배 가는 대열에 끼었을 때였다. 선배들이 약속장소를 정하면서 ‘절대 아이를 데려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선생이 결혼 안 하고 혼자 조용히 사신 까닭에 애들을 번거로워하시나 했다. 그런데 이유는 더 큰 데 있었다. 선생께서는 최근에 읽은 책, 유익했던 프로그램, 외국여행에서 경험하신 것, 제자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무궁무진했다. 책을 꺼내 보여주시고 나면 빼놓지 않는 말씀이 ‘누가 이것 좀 번역해봐’, 학교만 아니다 뿐이지 강의실이나 마찬가지니 아이를 데리고 오지 말 것은 상식이었다.

오래된 제자들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다. 선생님은 논문을 지도하시면서도 항상 지도교수와 학생이라는 기능적 관계가 아니라 여성사 연구라는 과제를 해결할 동료와 후학으로 여겨, 논문이 끝나면 ‘수고했다’고 오히려 학생들에게 점심을 사주곤 하셨다.

고희를 넘긴 멋쟁이 선생

지난 12월 10일, 선생을 모시고 부산에 내려가게 됐다. 부산 여성사회교육원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여성사회교육원의 모태는 한국여성사회연구회로 선생님께서 해직돼 계실 때 후배와 제자들이 마련한 연구 토론의 장이었다. 1992년 교육원이 연구회와 발전적으로 분리된 후 원장을 거쳐 이사장이 되셨는데, 부산에도 여성사회교육원이 생겨나 바야흐로 사단법인화를 추진하면서 그 후원의 밤 행사에 ‘한국 현대 여성운동사의 산 증인’인 선생과의 대화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이었다.

약속시간에 공항 로비에 가니 선생은 바바리 코트에 청색과 흰색이 교차된 모직 목도리를 두른 차림으로 『뉴욕타임즈』를 읽고 계셨다. 그 모습이 너무 근사해서 누가 저 양반을 고희 넘긴 노인으로 볼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선생은 최근의 호주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외국에 공부다, 회의다 해서 많이 가봤지만 호주를 꼭 한 번 가보는 게 꿈이었어. 내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호주 선교사들과 함께 그 곳에 가셔서 선교활동을 하신 적이 있었어. 그 때 아버지께 들은 이야기도 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언제고 호주에 가서 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보겠다고 맘을 먹었었지. 그러다가 이번에야 간 건데 운좋게 그 때 선교사의 딸로 한국에서 태어난 나보다 한 살 위인 사람을 만나 아버지의 활동이 기록된 교회신문도 복사해오고 그 어머니가 모았다는 한국 고서화와 고가구 등을 보고 놀랐어. 그 어머니는 30년대에 이화전문에서 가르치기도 해서 귀한 사진들을 얻어오기도 했어. 이봐, 그 호주라는 데가 말야, 정말 아름다운 곳이더군. 그런데 그 곳에 간 백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기도를 하고는 나가서 원주민 사냥을 했다는 거잖아. 백인 눈에 원주민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었던 거야. 지금도 백인들 눈에야 우리도 마찬가지지. 그게 제3세계 문제를 만들어낸 거구. 그런데 아주 재밌는 일이 있었어. 내가 묵은 그 선교사 딸네 집, 멜본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젊은 도예가가 사는데 그 이가 우리 나라 이천과 경주에서 1년 머물며 도자기 굽는 걸 보고 귀국을 했는데 자신의 도자기를 알리는 선전문구가 ‘한국식 나무로 때서 구운 도자기’야. 세상에 그런 데에서 우리 전통이 살아숨쉴 줄 누가 알았어. 신기하지 않니. 결국 우리 전통이 세계화의 구실을 하는 거야.” 그야말로 정열적으로, 감동적으로 이야기하시는 모습에 제자들이 붙인 선생의 별명들이 실감났다. ‘발로 뛰는 사회학자’, ‘지칠 줄 모르는 청년’, ‘멋쟁이’, ‘감격시대’가 그 별명들이다.

부산 시내에 들어서자 선생의 ‘감격시대’가 다시 한번 발했다. 목사셨던 아버지가 부산 초량동에서 목회를 하신 까닭에 어린 시절을 부산에서 보내신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거절한 아버지가 구속됐다가 만주로 피신한 후 선생 역시 다니던 경남 동래여고가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폐교된 후 원산 루씨여고로 전학함으로써 부산과는 작별을 했다.

여성운동에 대한 쉼없는 정열

부산 코모도 호텔에서 열린 여성사회교육원 후원의 밤 행사에서는 선생의 어린시절부터 중·고등학교, 미국 유학시절(알라바마대, 콜롬비아 대학원, 캘리포니아 대학원 등에서 사회학 전공), 이화여대 교수 초기시절 사진 등이 슬라이드로 소개되는 가운데 토크쇼가 진행됐다.

오래 전에 우스갯소리 비슷한 학계의 3대 불가사의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결혼을 안 하신 이효재 교수가 한국 가족사회학의 태두가 됐다는 것이었다(68년에 쓰고 84년에 개정된 『가족과 사회』는 가족사회학 연구에 독보적인 책이고, 도시가족문제, 도시 빈민가족문제, 도시인의 친족관계 등의 저서가 있다). 나는 미국 유학 당시 한 청년으로부터 두세 해 동안 열렬히 구혼을 받으신 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과 더불어 그 불가사의를 여쭈었다.

“미국 학생 하나가 두세 해 동안 열심히 나에게 구혼을 하긴 했어요(웃음). 그러나 나는 빨리 돌아와 우리 사회의 격변 속에서 여성들을 어떻게 깨우치고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목적이 너무 강해서 청혼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어요. 내가 가족사회학을 한 것은 가족이 민주적으로 변해야 여성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선생의 책을 한 권이라도 읽었거나 강의를 들었거나 가까이에서 말씀을 들을 기회를 가진 사람이라면, 늘 가족이기주의를 비판하시고 가부장제도에 희생당하면서도 가족이라는 끈에 매여 스스로 가부장제를 수호하는 여성(시어머니의 며느리 학대, 시누이와 올케 간의 갈등)들을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여성들에게 가족을 위해서만 헌신하도록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이 이웃과 더 넓은 사회공동체에 대해 담 쌓게 만듦으로써 점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신의 삶이 어떤 객관적 조건하에 있는지 눈을 뜨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갈파하셨다. 선생의 여성학은 여기에 기초하고 있었고 따라서 주부들이 생활 속에서 의식화되고 공동체적인 삶을 실천하게 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우리 나라 여성학과 운동이 앞으로는 서민여성들의 삶, 또 전통적인 생활방식 등을 존중하는 가운데 대중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전망하셨다.

선생은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나 엘리트 교육을 받았지만 항상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어려운 조건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몸과 마음이 떠나지 않으셨다. 도시화와 빈곤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서슬 퍼렇던 유신 말기에 동일방직 노조사건을 돕느라고 모금을 해서 감시를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 일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교수 성명서(일명 교육헌장 사건)에 적극 가담해 서명을 받다 발각된 일과 함께, 선생을 ‘찍힌 교수’로 만들어 전두환 정권에 의한 해직에 이르게 했다.

격변의 80년대에 민중적 여성운동단체들이 결성됨에 따라 선생은 실천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어 1987년 한국 여성민우회의 초대 회장이 됐고 90년부터는 민우회 생활협동조합 이사장이 되어 그토록 염원하던 공동체 운동을 다시 한번 추진하게 된다. 90년 2월에 맞은 교수 정년퇴임은 선생을 여성운동의 완전한 ‘현역’으로 만들었다.

90년대에 들어 선생의 여성의식과 여성운동은 한반도의 통일, 세계평화를 화두로 삼게 된다. 여고시절을 북에 둔 선생은 1985년 『분단시대의 사회학』이란 책을 낸 바 있는데 정년퇴임 직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평화군축운동협의회’를 결성, 회장을 역임하고 1991년 겨울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을 내세운 서울 토론회를 성사시켜 남북여성들이 서울에서 만나는 첫 장을 열었다. 그와 더불어 오랜 동안 여성사의 응달로 남아 있던 정신대 문제를 20세기에 인류가 해결해야 할 숙제로 제시하면서 한국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를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매주 수요일에 일본 대사관 앞에 모이는 ‘수요시위’를 3년 가까이 계속해오는 지구력과 전 세계를 누비며 피해국(필리핀, 중국 등) 여성들끼리의 연대와 일본군에 의한 종군위안부를 전쟁범죄로 입증하기 위한 증거 확보와 세계적인 여론 형성에서 나타난 추진력은 선생을 가리켜 ‘발로 뛰는 사회학자’, ‘못말리는 추진력’, ‘행동파’라고 하는 이유를 너끈히 짐작케 한다 (선생이 공항에서 읽고 있던 『뉴욕타임즈』에도 정신대 관련 기사가 실려 있었다).

50년 지기인 윤정옥 선생

선생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은 어머니와 고모였다. 선생의 어머니는 마산 대지주의 딸이며 그 집안은 일찍이 딸들을 미국과 중국으로 유학보낼 만큼 개화된 가정이었다. 그런 속에서 자란 선생의 어머니는 살림살이보다는 어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에 열성이었다.

“우리집에는 늘 과부나 소박맞은 아주머니, 고아들이 함께 살았어요. 그들을 돌보고 성경을 가르치느라 바쁜 어머니에게 나는 어리광을 부려본 기억이 없어요. 어머니는 해방후 고아원을 세워 사회사업가로 교육자로 바삐 사셨어요.” 이런 기억은 선생의 삶에 공동체 정서를 심어놓았다.

선생의 고모는 간호사로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쫓겨 20대 처녀의 몸으로 미싱 두 대를 들고 할머니로 변장한 채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고 한다. 거기서 독립군 군관학교 생도들에게 군복도 지어 입히고 간호도 하면서 해방전까지 활동을 했다.

1941년 여고를 졸업한 선생이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집에서 결혼을 서두를 무렵, 친척집으로 도망나와 마산시청 공무원으로 취직해서 정신대의 위협과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난 뱃심이나, 1947년 인천항에서 미군함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 유학을 떠난 용기와 모험정신은 그 고모에게서 유전된 것이리라.

여성 취학률과 여성 교육수준이 높아진 오늘날에도 여자 제자는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여전한 가운데 선생이 후배와 제자들에게 애정과 기대를 쏟아붓는 것 또한 어머니와 고모에게서 느낀 여성연대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정대협의 또다른 공동대표인 윤정옥 선생과는 50년 지기 사이다. 여학교 친구로 만나 같은 대학에서 제자 키우기를 하다가 퇴직 후에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드신 것이다. 50년간 우정을 지속하기도 힘들건만 그 우정이 사회활동의 동지로 성장한 것은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며 부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산에서 행사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자던 밤에 선생은 내게 말씀하셨다. 여기 사람들 시간 낭비 안 하게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자고.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서너 명이 찾아오자 마다하지 않았고, 바닷가로 갈숲으로 모시고 다니는 동안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멋진 마음을 숨기지 않으셔서 일행중에 단연 ‘청년’이었다. 대변이라는 바닷가에서 만난 영진이 엄마는 우리 일행의 사진기를 눌러주면서 선생을 가리키며 ‘수녀님’이라고 하는 해프닝을 연출했다. 반백의 단정한 커트머리, 베이지색 코트, 단정한 목도리, 평화로운 눈빛에 활짝 웃는 맑은 모습이 과연 ‘수녀님 분위기’였다.

올 봄에 ‘어머니의 땅’ 진해로

싱싱한 바다회와 구수한 누룽지밥으로 마련된 식탁에 선생은 그 앞으로 몰리는 반찬을 지방 분권화하느라 분주하셨다. 맑은 공기를 마신 것만으로도 좋은 먹거리였다고 하면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숙소에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선생은 신문을 보고 계셨다. 알고보니 벌써 해운대 산책을 하고 들어오신 거였다. 생수 한 병을 사오셔서는 쿨쿨 자고 있는 내 머리맡에, 깨면 마시라고 조심스레 놓아두시기까지 하셨으니….

선생은 매일 아침 생수를 드시고 과식을 피하시며 많이 걷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 다니신다. 등산을 즐기신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마음뿐 아니라 몸도 웬만한 청년 볼 쥐어박는다.

서울행 비행기에 탔을 때는 해가 막 지고 있었다. ‘쉬겠다’고 눈을 붙였던 선생이 갑자기 ‘이봐’ 하시길래 가리키는 곳을 보니 창에 보이는 노을이, 위는 파란 하늘이고 아래로는 노랑, 주홍, 다홍으로 층이 져 입이 딱 벌어졌다.

“자연이란 건 변화무쌍하고 무궁무진해. 도시는 삶을 죽이는 것뿐이야. 아이구, 저 아름다운 거.” 그 말씀에 내 입이 더 벌어졌다.

“선생님, 지금껏 해오신 선생님의 이론과 운동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가족과 지역사회에 기반한 민주공동체의 구현, 그게 나의 오랜 바람이야.”

쌩뚱맞게도 신문에 난 ‘이효재 씨 훈장거부’가 떠올랐다. 여성의 날을 기념한 대통령 훈장이 5공화국 탄생에 적극가담한 반민주적 인사에게도 주어지는 것이라, 훈장의 의미가 훼손되고, 나아가 여성운동의 성격이 왜곡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그리 한 것이었다. 나이 들면 업적을 인정받고 싶고 아랫사람들에게 대접받고 싶어진다고들 하던데….

봄이 되면 선생은 서울을 정리하고 진해로 가신다. 선생의 어머니께서는 해방 이듬해부터 진해에 거처를 정하고 사회사업을 해오셨는데 그 일을 물려받은 조카(선생의 언니 아들)가 사회복지재단을 세운 것을 계기로 ‘어머니의 땅’에 가시는 것이다. 선생은 지역노인복지서비스에 관심이 많다. 틈틈이 여성노동사와 한국가족연구를 체계화하는 ‘숙제’도 스스로 내놓고 계시다. 벌써 그 지역의 대학에 있는 제자들과 노인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 연구자료를 수집할 추진계획이 서 있다. 선생의 바쁜 의욕에 늙음조차 밀려난 게 아닐까.

내가 이 땅에서 만난 가장 큰 여자, 이효재 선생. 그는 우리 2천만 여성들에게 ‘역사’와 ‘사람’을 잊지 말고 살라고 일깨우는 ‘깃발’이다.

오숙희 여성학자·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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