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5년 07-08월 2005-06-01   1248

[인터뷰] ‘생존권’ 보장은 인권의 시작

월드비전 북한사업본부장 오재식 선생

월드비전 국제본부 북한사업본부 대표인 오재식 선생님을 만나 6·15 선언 그 의미와 대북지원사업의 현황, 6·15 이후 북한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직접 들어보았다.

월드비전에서 북한사업을 하고 계시는데 선생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2002년까지 월드비전 한국의 회장을 했고 2003년부터 월드비전 국제본부의 북한사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북한 내에 사무실을 열 수 없으므로 국제본부 안에서 사업을 관할 조정하는데 저는 나이가 들어서 본부에 합류하지 못하고 서울에 사무실을 따로 내고 있지요. 북한에는 15차례 방문했는데 1년에 두 번씩 방문한 것 같습니다. 사업장들이 전국에 흩어져 있어서 강원도, 평양 남·북도 등을 다녔습니다. 우리 기술자들은 더 많은 곳을 다니고 있고요”

남한에도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한 여러 단체들이 있는데요. 월드비전이 실질적으로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 기구가 세계 각처에서 진행해 온 오랜 경험에 의하면 긴급구호 상태는 길어야 3년 갑니다. 우선 후원자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니까요. 또 현지 사람들도 외부지원을 받는데 타성이 붙고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자체 노력이 감소하면 안되지요. 그래서 긴급구호는 중·장기 개발 사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월드비전의 사업방침입니다. 그래서 긴급사태가 생겼을 때부터 중·장기 개발에 대한 구상을 가져야 합니다. 직원들도 그렇게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북측에 지원 사업을 시작한 것이 1995년인데 1998년부터는 농업개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북측의 농업개발 아카데미와 손을 잡고 농업발전 기술개발을 공동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야채생산을, 그 다음에는 감자 증산을 위한 씨감자 개발 사업을, 그리고 최근 2~3년 동안에는 무·배추 등의 종자개발과 사과나무를 시작으로 과수 묘목 증식 등의 일터들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많은 온실 시설을 설치했고 관리와 운영은 북측 동포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처음 개발 사업을 시작하던 98년만해도 아직 식량난이 심각한 때라 시설을 건설하는 자금으로 식량 원조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북측과 남측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농업개발 사업을 그때 시작했던 것은 선구적인 결단이었습니다.

북한 동포들에게 여러 경로의 지원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북한 사회의 빈곤문제가 심각한가요?

북측의 식량난은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냉전체제에서는 사회주의권 안에서 식량을 포함한 여러 생필품들이 잘 유통되었지요. 북한은 공업발전을 택했고 공산품으로 식량과 생필품 등을 구입해서 충당했었는데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로 이런 유통이 멎어버린 것입니다. 남측이 1995~97년 동안의 자연재해로 인한 북측의 식량부족을 계기로 도와준다고 광고해댔는데 북측이 당면한 구조적 문제를 극복할 만큼 지원한 것은 아닙니다. 또 이른바 인도주의 지원이란 것이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지원단체들 서로간의 조정이나 협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혼란스럽고 비효율적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만큼 효과적인 지원은 못됩니다. 이런 상황을 놓고 “이때까지 우리가 도왔는데 아직도 식량이 모자라는가”하는 식의 반응은 온당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계수에 약해서 숫자를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북측이 필요로 하는 식량은 총량으로 약 600만 톤이랍니다. 그런데 년 간 생산량이 400만 톤이 안 됩니다. 그래서 자체 무역으로 사들이는 것이 년 간 50~60만 톤이고 또 다른 방법으로 확보하는 것도 좀 더 있곤 하는데, 좌우간 년 간 부족한 식량이 약 100만 톤가량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숫자들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미리 이야기할께요. 그래서 월드비전은 일직부터 감자생산을 증대시키는 것이 식량난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제안을 했죠. 감자는 고랭지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작물의 농지와 경쟁하지 않고 독자적인 농지확보가 가능하고 또 감자의 영양가치는 다른 작물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했고 또 북측에서 받아들여져서 감자 증산을 위해서 씨감자 생산을 시작한 것입니다. 2000년부터 이일을 했는데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들이 아직도 남았고, 또 기술적인 문제를 극복한 다음 단계는 정부차원에서 연계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제대로 진전이 안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개발 사업에서는 민간단체들과 정부정책간은 연계, 연동, 협력관계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북한 동포들의 영양실조, 생존의 위기 앞에서 북한의 인권 운운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아주 힘든 문제입니다. 나도 좀 조심스럽네요. 나는 법적인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또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습니다.

금년 4월엔가 유엔인권위에서 세번째 북한인권문제를 결의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시민권과 사회권을 중심으로 짜여 졌고 틀과 억양이 상당히 감정적이고 단정적인 면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또 일본이 아주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인권의 기본은 보편성이고 형평성이라고 알고 있는데 북한에 대한 토론에서는 그렇지가 못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는 중국 인권문제를 유엔에 제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성사가 안 되었습니다. 중국의 영향력과 중국과의 이해관계가 각 나라를 선뜻 앞장서게 못했다는 평가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인권문제의 제기는 정치적 압력에 약자를 걸고 선전적 카타르시스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인권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지원과 협력하겠다는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 의도와 절차 그리고 시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납치문제를 가지고 인권문제를 이야기하는 계기와 증거로 삼는 것 같은데 그 문제는 북한정부의 대표가 고이즈미 총리에게 직접 사과했고, 또 재발하지 않을 것이란 약속도 했으며, 당사자들의 문제는 서로 협의해서 해결하자고 합의했죠. 그래서 북측은 제 1단계의 약속으로 다섯 사람을 모국 방문차 보냈던 것인데 국내여론이 나빠지니까 두 정상의 약속을 파기한 쪽은 고이즈미 입니다. 그것을 문제의 출발점으로 써먹는 것은 외교적 관례를 무시한 강자의 억지라고 할 수밖에요. 또 북측의 문제는 식량난을 위시한 생존권 문제입니다. 미국은 식량 50만 톤을 두어 번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도 그랬고요. 미국의 지원은 이제 년 간 10만 톤 이하로 내려갔고 일본은 중단상태입니다. 정치적 타결이 없이는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가장 기본적 인권인 생존권을 정치적 협박의 도구로 삼는 것이지요. 다른 나라라면 모를까 세계 경제와 영향력 1, 2위를 차지하는 두 나라의 작태는 보편적 가치인 생존권을 무시하고 시민권, 사회권을 이야기할 체면이 서지 않지요. 적어도 사람의 생존권의 문제는 이유를 불문하고 정치적인 기싸움의 흥정거리가 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의 6.15 선언 이후에 이북 사회에 어떤 변화가 생겼다고 보시는지요?

6·15 선언은 우리 민족이 바라보기만 하던 민족적과제들을 역사적 시간표에다 담아낸 쾌거였습니다. 우선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자, 통일의 형태는 하나만 고집하지 말고 이때까지 나온 여러 안들을 유연하게 선택해가자, 인도주의적 현안들을 해결하고 적극적 교류를 통해서 신뢰를 쌓자, 그리고 당국간의 대화를 증진시켜가자 등을 남북정상이 만나서 합의하고 서명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첫발을 내디딘 것이죠. 북측에서도 이 선언에 대한 의미부여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또 되도록 그것의 정신을 중심으로 여러 정책들을 만들려는 자세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도 이 선언을 널리 알고 있고 남측을 동포들이 살고 있는 나라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2002년 7월부터 실시하기로 한 시장제도의 실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로화를 공식외화로 정하고 환율조정, 월급의 합리적인 상승조정 등의 법규를 정비한 후에 여러 곳에서 시장제도를 실험적으로 시행했지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배급이 아니라 시장에서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예상외로 큰 호응을 받았지요. 그런데 얼마 안가서 가격의 인플레이션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건 값이 비싸지니까 구매능력은 떨어지고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고 당국도 당황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당국의 적극적인 대처와 홍보, 시민들의 인내와 희망이 근간이 되어서 사태는 어느 정도 진정되어간다고 들었습니다.

개방과 변화에 대한 불안이 시민과 당국에 똑같이 도사리고 있을 것인데 시장제도의 실험은 첫 번째 고비인 것 같습니다. 개방과 변화와 관리는 큰 과제이죠. 북한 당국과 시민들은 이 시련을 이겨내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정책변화는 작년부터 북한 당국이 유엔기구들과 국제NGO 들에게 인도주의 원조보다는 중·장기 개발 사업들을 시작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엔기구들뿐 아니라 각 NGO들도 개발 사업으로 전환을 기획하고 또 실시하고 있지요. 이것은 긴급구호 상태를 뒤로하고 더 적극적으로 중·장기 개발에 대한 구상, 협력, 주도적 역할을 북한 당국이 스스로 맡겠다는 의지인 것 같습니다. 여러 방면과 각층의 이해와 협력이 요청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6·15 선언 5주년을 맞이하는 소감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임해햐 하는지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6·15는 남북사이의 화해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향한 중대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이 허락하신 때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7·4 공동선언, 남북합의서를 거쳐서 올라간 가장 높은 봉우리이죠. 그런데 그 봉우리를 다음 봉우리로 연결하는 연속성, 지속성 같은 것이 아쉽습니다. 희망의 물결이 중단되지 않고 상승기류를 타게 해야만 하죠. 그래야만 우리 민족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터인데 말입니다. 이런 물줄기가 끊기고 기운이 가라앉아서 민족의 열기가 다시 수그러져버린다면 그것은 남북의 민족이 다같이 책임을 져야 할 문제입니다. 민족의 기운이 봉우리에서 다시 골짜기로 내려가지 않게 하는 사회적 인프라, 정치적, 도덕적 인프라는 무엇이라야 하는가를 요즘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 동·서독 수상들이 19번인가 정상회담, 실무 접촉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늘의 때를 우리들의 정치적, 사회적 시간표에 담아낼 수 있는 각별한 각성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최인숙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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