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5년 07-08월 1995-07-01   1315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

“불교가 개인 수행과 사회 참여, 양쪽 일을 다 해야지요”

자주! 개혁!

이 두 단어를 들으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람들은 다르겠지만 나는 19세기 말, 우리나라가 제국주의의 침략을 당할 무렵이 연상된다. 그때 우리 사회의 진보적인 지식인과 우국지사들은 한결같이 자주와 개혁을 민족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21세기를 눈앞에 둔 이 시점에서 자주와 개혁을 과제로 안게 된 곳이 있으니 바로 조계종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 조계종이 오늘날 자주와 개혁을 시대적 사명으로 갖게 된 것은 한국 현대사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물러났던 월주 스님

1980년, 신군부가 불법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일으킨 ’10.27 법난’은 종단중흥의 노력을 막 시작하려던 집행부를 강제로 몰아내었고, 그 이후 불교계의 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고 안으로는 부정과 부패에 젖어 종교단체로서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게 되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소설 제목처럼, 지난 해 4월 조계종 안에서 개혁회의라는 혁명분위기가 돋아나 8개월 간의 산고 끝에 드디어 11월21일 제28대 총무원장을 선출함으로써 새 집행부를 탄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서에 영향을 미쳐온 불교계의 새로운 탄생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관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관심의 초점은 자연스레 집행부의 사령탑, 총무원장에게 모아졌는데 그는 다름 아닌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물러났던 1980년 당시의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었다.

월주 스님을 만나러 가면서, 우리 사회의 큰어른을 뵙는다는 긴장감과 함께 약간의 묘한 설레임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14년만에 빼앗겼던 제자리를 다시 찾은 것이, 마치 전설의 고향이나 불교설화의 주인공을 현실에서 만나는 것 같은 엉뚱한 생각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6월22일 오전 11시, 조계사 경내에 있는 총무원청사 4층의 원장실에서 뵌 월주 스님의 첫인상은 상당히 여성적이었다. 불교가 원래 여성적인 부드러운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월주 스님의 깊고 맑은 눈빛과 단아한 자세는 속세의 남자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요즘 바쁘시지요? 오늘 이렇게 만나뵙고 말씀을 들을 시간도 얻어내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네, 바쁩니다. 회의가 아주 많아요. 오늘도 갑자기 총회가 열렸어요. 이따가 12시에는 누가 또 찾아오기로 해서 만나야되고…”(인터뷰 도중에도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스님들 중 먼 곳에서 온 이들이 인사 여쭈러 간간히 들렸다)

–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아무래도 일이 많으니까 요즘은 그렇지요. 안 그럴 때는 구의동의 영화사에도 많이 있습니다.”

– 이번에 개정된 종헌에도 그렇고 다시 총무원장에 오르기 전까지의 개인적인 활동도 대사회적인 면이 강하십니다. 불교라고 하면 보통 개인적으로 도를 닦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양심세력으로서 속세의 현실문제에 참여하는 것과 갈등을 일으키신 적은 없는지요?

“불교 수행은 그것을 통해서 집착과 애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옳고 그름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구도를 한 결과 자기 역할을 확대하는 데 과감해야지요. 또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근간은 대승불교입니다. 대중에 대한 교화와 구제 역시 승려의 중요 사명입니다.”

– 불교가 참여한다면 우리 사회의 병폐를 고치는 데 큰 힘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데 혹시 현실 사회 참여에 대해서 종단 내에 부정적인 시각은 없습니까?

“불교종단이 원래 좀 보수적인 데다 그게 길들여지지 않은 일입니다. 전통적인 승려상(僧侶象)이나 불교인상(佛敎人象)이 개인적인 구도와 수행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개인 수행과 사회 참여, 양쪽 일을 다 해야지요. 개인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마음으로는 다 사회참여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불교가 오랫동안 관습화, 화석화되었기 때문에 개혁의 효과가 금새 두드러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동체적인 기복신앙으로 눈을 돌리 때

– 불교신자 중에는 특히 할머니와 여성들이 많은데 그들의 성향은 개인적으로 가족의 복을 비는 데 치우쳐 있어 그런 사회 참여 의식을 갖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교가 기복신앙 자체는 문제될 게 아닙니다. 우리 불교가 중생의 고통을 내 것으로 안고 해결하려는 대승적인 자세를 바로 가진다면 좁은 가족 이기주의를 넘어 공동체적인 기복신앙이 될 수 있지요. 새로운 종헌에 불자들의 사회적 역할과 책무를 강조한 것은 그 동안 많은 종단이 이런 소명에 부응할 의식과 여력이 없었고, 비민주적인 사회적 환경도 불교의 올바른 사회 참여에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제 밖으로 눈을 돌리도록 지도하겠습니다.”

– 요즘 우리 사회에는 세대 갈등이 큰데 불교계에서는 어떻습니까?

“나도 젊은 스님네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전통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서로 만나야 창조가 되지 않겠습니까, 내 나이 회갑이지만 젊은 사람들과도 호흡을 같이 하는 부분이 적지는 않다고 봅니다.”

– 불교의 사회 참여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 인권문제, 복지문제, 환경문제, 소비자문제, 분배정의의 문제, 지역사회 기여의 문제, 민족분단의 고통을 해소시키는 문제 등입니다.”

– 그러고 보면 쓰레기문제부터 통일문제까지 연관이 안 되는게 없네요.

“ 그러믄요, 중생들이 고통받는 문제는 무엇이든지 다 해당이 됩니다.”

– 스님께서 재야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온 것도 다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겠군요?

“세어보니 내가 사회활동에 참여해온 각 단체의 명칭이 모두 16개나 되더군요. 경실련 공동대표, 공해추방운동 불교인 모임,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조국평화통일 불교인 협의회장, 10·27 법난 진상규명추진위 대표…”

– 이제 종단일로 바쁘실 텐데 어떻게 그 일들을 병행해나가실 계획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개별적으로 참여해오던 사회할동 영역은 종단 내에서 인재를 발굴하여 내 대신 참여하도록 유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는 종단운영과 개혁의 실무적인 책임자로서 교단의 일에 충실하고 종책 개발에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기관도 만들고 연구도 하고 조직도 해서 발로 뛸 예정입니다. 그래야 종단이 사회의 제도와 중생구제의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겝니다.”

– 아까 환경문제에 대한관심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음식물 쓰레기와 관련해서는 불교의 전통인 발우 공양이 좋은 해결책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발우공양은 자기가 받은 음식은 남김없이 먹고, 자기 그릇은 물을 받아 깨끗이 씻어 그 물까지 먹는 것입니다. 속가까지 이걸 보급시킬 수는 없구요, 욕심내지 않고 적게 먹고, 남기지 않는 정신을 보급하면 자연보호와 자원절약이 저절로 될 겁니다.”

– 한통노조를 연행하느라 공권력이 투입된 후 개신교, 천주교, 불교가 연대하여 항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타종교와의 연대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시니까?

“대화를 통해 잘 해결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에 물리력을 다시 사찰에 들인 것은 정말 잘못한 것입니다. 이번의 연대는 바로 양심의 연대였습니다. 종교가 해야 할 일은 양심의 회복이지요. 자기 종교 이기주의를 버리고 공존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기여해야 합니다.”

올 여름, 남북 불교 지도자들 만나 계획

– 정부로부터 방북 허가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북계획이 있으신지요.

“북한에서 곧 초청이 올 겁니다. 올 여름에 남북 불교 지도자들이 만나 통일기원도 하고, 금강산과 평양에 절을 짓는 일에도 협력할 예정이구요. 북한의 종도는 남쪽의 1,000분의 1도 안 되지만 교회나 성당보다는 많아서 평양을 포함하여 전역에 65군데 절이 있고 승려는 300명, 신도는 1만 명이라고 합니다. 금강산 유점사와 장안사, 묘향산의 보현사가 특히 가보고 싶은데, 우선은 쇠락한 불교를 복원시킨다는 생각으로 가는 것이고, 이번 기회가 작은 창구이지만 민족의 화해와 문화교류, 민족동질성에 기여할 것이라고 봅니다.

– 사문으로 출가하신 후에 가장 힘드셨던 것은 언제였습니까

“6·25 혼란기에 저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생존경쟁이 심한 당시 사회현실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어요. 친구 하나가 출가를 했는데 이타행을 하는 승려 생활이 고상해 보여서 나도 청정한 지혜를 얻고 보살행을 해야되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출가를 했어요. 그런데 막상 출가를 하고보니 겉으로만 보던 것과는 다르더군요. 여러 가지 생각도 들고 마음이 왔다갔다 했어요. 그러더니 한 6년이 지나니까 비로서 이게 나의 길이구나 하는 확신이 서더군요. 종단 내부에 갈등이 있을 때가 또 괴롭지요. 원래 승단이라는 것은 용사(龍蛇)가 혼재하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법대로 탐욕을 버리고 보살행을 하는 것이 결국은 값진 일임을 다시 깨달을 때의 그 환희와 보람으로 견뎌 냅니다.

총무원장의 독점적인 권한이 대폭 축소되어 본사 주지 임명권까지 없어진 것을 오히려 다행스러워하는 총무원 송월주 스님,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차원에서 담담하게 말씀하셨지만, 그 안에서 일관된 원칙과 정제된 힘이 느껴진다.

월주 스님은 원효대사와 지눌국사를 존경하다고 했다. 수행도 많이 했고, 이타행도 많이 한 선사들이기 때문이다. 월주 스님이 요즘 주창하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또한 그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리라.

역사교과서보다도 한 개인의 인생역정 속에서 역사를 더 생생히 느낄 때가 있는 것처럼, 월주 스님이 다시 총무원장의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떠돌았던 14년 세월은 어찌보면 한국불교의 표류기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무원장실을 나오면서 그 입구에 붙어있는 두 장의 스티커, ‘남을 위해 기도합시다’, ‘정책중심 선거/연고주의 배격/자원봉사 참여(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연합)’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오숙희(여성학자이며, 여성관련 책들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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