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6월 2011-06-20   3510

나라살림 흥망사-권력과 고리대금의 부적절한 관계

 

권력과 고리대금의 부적절한 관계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가 고리대금업일 것이다. 지금처럼 정교한 금융시스템이 없던 고대에는 이자가 높을 수밖에 없었는데 생산성이 별로 높지 않았던 대중들에게는 고이율 이자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대표적인 고리대금업자들은 유대인들인데 이들의 경제력은 천부적인 재능이나 교육 때문이 아니라 고리대금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세에는 고리대금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비기독교인인 유대인들이 이런 상업 활동을 독점할 수 있었다. 아니 그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유럽의 권력자들은 통치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핍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이 낸 세금으로 왕정을 유지했다. 『로빈 후드』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가 유대인인 것은 일반인의 적대감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은 로빈 후드 시대에 영국에 사는 유대인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이 영국 일반사회에 얼굴이 보인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상황은 극적인 과장일 뿐이다.

금융자본 뿌리, 고리대금업

실제로 영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이나 프랑스 등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면서 영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수백 년 후의 일이다. 이들은 영국 금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이후에는 정계까지 진출한다. 영국의 총리를 지낸 디즈레일리DISRAELI, 그리고 유럽 최대의 금융자본인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 등이 대표적인데 금융자본의 뿌리가 고리대금업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금융자본은 언제나 고리대의 유혹을 받게 되거나,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요즘 보여 주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원래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스페인이었다. 그런데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오만해지면서 종교를 탄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래서 15만 명이나 되었던 스페인의 유대인은 고리대금업으로 많이 빼앗기기는 했지만, 축적한 자본을 들고 탄압을 피해 이동하게 되는데 이들의 이주 경로에 따라 경제력이 이동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손해를 본 대표적인 나라가 스페인이고 이익을 본 나라는 영국이었다. 그래서 스페인이 몰락한 것이 유대인 탄압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빼앗은 돈들도 운영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죽어버린 돈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1690년에 400명에 불과했지만 1790년에는 2만 6천 명에 달했다.

  기독교와 같은 의미로 이자를 금지했던 이슬람은 아직까지도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대신 출자에 대한 보상을 받는 식의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이슬람 채권인 수쿠크의 유치를 둘러싼 논쟁은 바로 그러한 이슬람의 특성을 간과하거나, 종교적인 이유에서 간과하고 싶었던 세력들의 반발로 인한 것이었다. 새로운 자본의 수혈에 목말라 하던 대기업과 재벌들이 강력히 추진하지 못한 것도, 아직 우리나라 자본이 종교문제 등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아직 그들은 세계적인 대자본이 되기에는, 이념과 종교 등 일국 안에서의 기득권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돈 굴리는 나라, 결국 망한다

중국에서도 사마천의 『사기』에 고리대금업이 언급되는데 3∼4세기경에 체계적인 전당포업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청나라 시대에는 황제가 직접 전당포를 운영하기도 했다. 국영금융기관이었던 셈이다.

  우리도 고려시대부터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고리대금업이 시작되었다. 연리 33% 정도였는데 이자가 원금만큼 늘어나게 되면 더 이상 이자를 받지 않고 원금만 갚도록 하는 ‘자모정식법字母偵息法’을 시행했다.

  조선시대부터는 국가가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한 공채가 성행했다. 처음에는 1할이었다가 후기에 가서 2할로 뛰었다. 하지만 장리長利라고 불리는 고리대금은 50%나 되었다. 왕의 비자금을 담당하는 내수사가 이런 식으로 돈을 불렸다. 그래서 숙종 때에는 그 폐해를 막기 위해 33.3%로 제한했다. 왕실이 이러니 일반인들은 더 심했다. 이자를 70%까지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이식제한령을 수시로 내려 백성들이 지나친 이자 때문에 피해를 입는 것을 막았다.

  공업과 상업을 천시했던 유교국가 조선이 유독 고리채에만 관대했던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정책수립자들인 지배자들 스스로가 고리대금업자였기 때문이었다. 성종 때 왕의 스승인 삼로(三老)에 정인지를 임명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젊은 유생들이 정인지의 장리를 문제 삼아 격렬히 반대하자 한명회를 비롯해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당시 “장리하는 것을 돈을 불리는 것이라 한다면 지금 관리 중에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라는 말에서 상황의 심각함을 읽을 수 있다.

  동서고금의 통치자들은 이런 고리대금의 고통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체제 불안을 방지하기 위해 한편으로 규제하면서도 오히려 적극적으로 고리대금업에 참여했다. 이것은 권력의 모순이면서 본질이다. 물론 합리적인 정부를 기대할 수는 없는 시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재정을 두고 다른 부분에서 권력자들이 돈을 버는 구조를 가졌다는 것은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그 여파로 백성들만 고통스러워지니 문제일 수밖에 없다.

  현재 원성이 자자한 고리대금을 방지하기 위한 대부업법도 조선시대보다도 높은 66% 이자를 허용하고 있을 정도며, 사채 시장에서는 무한대 이자를 받고 있다. 조선시대보다 더한 야만적인 고리가 판치는 21세기 대한민국인 셈이다.

  최근 과거 고리대를 상징하는 사채업 양성화를 위해 설립한 저축은행들이 영업정지를 하는 상황들이 발생했다. 고율 이자를 주는 저축은행은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들의 간접적 고리대금업 창구이다. 과거와 같은 고리대는 아니지만 권력을 이용해 손실도 보지 않고 서민들이 피해를 본 상황을 고려한다면, 조선시대 공직자들의 고리대를 연상시킨다.

  위험한 기업대출보다는 가계대출을 통해 성장해온 저축은행들이 사실상 부자들 특히 권력자들과 고위직원들의 고리대 창구였다는 것은 우리사회가 얼마나,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생산하는 국가 흥하고, 돈을 굴려 살아가는 국가 결국 망한다. 더구나 그 시스템마저 불공정하다면 돈으로도 살아가기 힘든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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