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5월 2011-11-14   1772

문강의 문화강좌-케이크를 먹으면서 가지려고 하기

케이크를 먹으면서 가지려고 하기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이 가끔 쓰는 표현 중에 “케이크를 먹으면서 가지려고도 한다”(to have cake and eat it)는 말이 있다. 가령,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를 염원했던 사람들이 막상 그 자본주의가 생활의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엄청난 경쟁과 고통도 수반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는, 다시 자본주의의 ‘경쟁과 고통’을 비판하는 경우가 그렇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가 주는 최신식 자가용과 샤넬백은 좋지만, 항상적 불안과 치안의 미비, 비인간적 노동환경은 싫다는 것.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순간, 그것은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사람들은 케이크를 먹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불거진 카이스트 문제에 대한 의견들은 전형적으로 그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가령, 카이스트의 서남표 총장이 2006년 이후로 시행했던 ‘개혁’의 성과는 훌륭한 것이 많았지만(스포츠 콤플렉스 준공, 엄청난 발전기금 유치, 교수 간 평가 강화, 세계대학순위에서의 ‘비약’), 그에 반해 영어강의, 징벌적 등록금제와 같은 무리한 개혁 드라이브가 있었고, 그에 대한 교수 및 학생들의 제안을 ‘묵살’하면서 권위적인 학교 경영을 해왔다는 것, 하지만 이제 학생 네 명과 교수 한 명이 자살한 오늘 상황 앞에서 ‘최소한 사과라도’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경영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은 문제이니, 앞으로는 구성원들과의 ‘소통’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이를 다시 요약하면, ‘카이스트를 세계 일류대학으로 만드는 개혁은 좋으나, 민주적인 소통과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것. 물론 여기에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도 절대 빠지는 법이 없다.

 

모순되는 두 가치의 공존

‘세계적인 명문대학’을 만드는 일과 ‘민주적 소통’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잘 ‘조화’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경쟁을 통한 대학의 수월화秀越化와 인간적·민주적 절차라는 것이 어떠한 모순도 없이 한 의견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그 둘은 절대로 같이 갈 수 없는 개념이다. ‘세계적 명문대학’이라는 표현 속에 이미 치열한 경쟁의 수용과 수량화된 가치화가 들어 있는 데 반해,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대학운영’이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참여하는 공동체라는 가치가 들어 있다. 이 둘은 서로를 배격하는 모순적 가치다. 그것은 수직(경쟁)과 수평(민주)이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합치는 셈이다. 다시 말해, 경쟁이냐 평등이냐, 서바이벌이냐 공동체냐라는 서로 다른 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치를 ‘모두 다’ 포괄해야 한다는 말은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케이크를 먹으면서도 케이크를 가지려고 하는 꼴이다.

서남표라고 하는 기표는 정확히 경쟁, 수직, 수월성, 최고, 명문, 서바이벌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총장재직 기간 동안 카이스트라는 대학의 ‘대외적 평가’를 급격히 끌어올렸다면, 그가 바로 자신이 담고 있는 의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민주니, 공동체니, 평등이니, 인생이니 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면 그러한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이러한 가치들은 측정할 수도, 평가할 수도, 순위를 매길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생과 교수의 잇따른 자살은 서남표라는 기표가 가질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그림자다. 만약 그렇다면, 학생과 교수의 자살이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인간의 생명에 대해 겸손한 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서남표라고 하는 그 기표를 없애는 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단’이 없이는 민주, 공동체, 생명, 소통과 같은 모든 좋은 것들은 결코 오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피로 흥건히 젖은 채로 온다고 마르크스는 썼다. 그 피를 소중히 여긴다면, 문제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 뿐이다.

 

모순의 종착지

서남표라는 기표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대타자’다.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실제로 모두가 복종하는 그런 가치다. 이명박, 이건희(삼성), 박용성(중앙대), 서울대, 김앤장, <나는 가수다>, <슈퍼스타K>도 모두 서남표라는 기표와 같은 계열에 있는 하나의 ‘무리’다. “늑대가 한 마리만 있다고 해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들뢰즈/가타리는 말한다(『천개의 고원』). 그 늑대 한 마리는 늑대라는 무리 전체를 표상한다. 한 마리가 곧 두 마리고, 한 마리가 곧 무리 전체다. 만약 한국사회가 경쟁의 불안과 압박 속에서 젊은 나이에 생명을 끊어야 했던 청년을 진정 불쌍하게 여긴다면, 첫 번째 해야 할 것은 바로 그 경쟁의 상징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리고, 당연히, 예상 가능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남표의 개혁에 비판적인 카이스트 교수들마저도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와 케이크를 먹으면서도 케이크를 가져야 한다는 모순어법을 구사한다. 이것이 리버럴-개혁의 영원한 한계이고, 오늘날 한국의 소위 진보정당들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나아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유행하는 ‘소통’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기만적인 판타지인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두 가치 사이에 ‘소통’은 없다. 

 
오늘도 사람들은 경쟁에 치어 목을 매고, 등록금을 못내 휴학을 하고, 문자로 해고통지를 받고, 파업했다고 수천만 원 벌금통지서를 받는다. 열심히 노력하는데, 삶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이 ‘단순한’ 모순을 해결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모순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경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이 살아야 하지 않느냐’, 혹은 ‘경제도 살려야하겠지만, 국민과 소통도 해야하지 않느냐’와 같은 어법들이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같이 ‘결단’을 이야기했던 60년대 구호에 비하면, 이 새로운 구호들은 말 그대로 ‘뱀의 혓바닥’처럼 사람을 홀린다. 이 풍요로움, 이 안락함, 이 1등 자리는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도 소통도 지키고 싶어 하는 이 도저한 모순. 그것은 ‘있는 자’들의 기만적 술책이기도, ‘없는 자’들의 비굴한 타협이기도 하다. 물론, 이 둘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모순’은 유지된다. 이 도저한 모순이 궁극적으로 가 닿을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그 자리는 결코 풍요와 안락과 1등, 행복과 사치와 명문으로 가득한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삶 자체를 흡수해야만 움직이는 이 경쟁의 기차는 우리 안과 밖, 끝없는 타자들과의 전쟁을 거치며 모두를 피폐하게 만든 후에, 더 이상 바퀴를 돌릴 삶 에너지도 남지 않을 때 비로소 멈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차가 멈춘 곳은 그 어떤 생명도 살지 않는, 그 어떠한 케이크도 남지 않은, 황무지일 것이다. 나는 그 황무지를 ‘파국破局’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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