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5월 2011-11-14   1803

어느 날 문득, 영화 한 편-‘가진 것 없는 생명’의 나날들 무산일기

‘가진 것 없는 생명’의 나날들 <무산일기>

 

조광희 변호사

토요일이건만 일찍 잠든 탓에 새벽에 잠이 깬다. 할 일이 많으나 오늘은 아무래도 영화를 보아야겠다. 가장 손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멀티플렉스를 찾아가는 것. 집에서 가장 가까운 멀티플렉스는 고속터미널에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어떤 가상의 이야기로 도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터미널 옆 극장’이라는 진부한 배치는 ‘미술관 옆 동물원’보다 훨씬 당혹스럽다. 당혹감을 억누르며 터미널 옆 극장에 도착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보고싶은 영화인 <무산일기>, <고백>, 그리고 <파수꾼>은 상영작 목록에 없다. 나는 마지 못해 한 작품을 선택하고, 1시간을 기다린 후에 영화를 본다. 대실패다. 나는 ‘가족간에 지지고 볶는  이야기’의 상투성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극장을 나온다. 이대로는 일하러 갈 수 없다. 잃어버린 토요일 아침시간을 다시 보상받아야 한다. 나는 다시 이화여대 안의 극장 ‘모모하우스’를 찾아간다. ‘모모하우스’로 가기 위해 들어선 캠퍼스는 싱그러운 바람과 꽃향기와 햇빛으로 찬연하다. 나는 극장으로 들어가 ‘탈북자’를 다룬 영화라는 <무산일기>의 표를 산다. ‘무산일기’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탈북자는 남한 사회에 스며든 이질적인 존재다. 조선족, 돌아온 재미교포, 이주노동자, 탈북자와 같은 이질적인 존재들은 피부색, 남한에 유입된 이유, 외국에서 살던 곳, 살던 곳에서의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우리 사회에 배치된다, 어떤 이들은 내국인보다 우대받지만 어떤 이들은 사회의 밑바닥에 놓여진다. 그들 개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상관없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2만 명을 헤아리게 된 탈북자들은 과거에 간첩, 귀순자에 대한 이미지와 오버랩되면서 가장 환대받아야 할 사람임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같다. ‘무산일기’가 세상에 태어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감독이 주인공과 같은 이름을 가진 탈북자 출신의 친구를 가졌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삶이 영화 속 ‘승철’의 삶과 어느 정도 포개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남한에서 겪은 삶이 감독의 연출에 녹아들어 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남한 사회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러나 절대로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함경도 ‘무산’ 출신의 탈북자 승철. 그의 벌거벗은 삶을 담담하게 그린 이 영화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리고 미리 파악된 어떤 관념에 맞추어 이야기를 지어내 우리의 감상을 끌어내려 하지도 않는다. 관객들은 벽보따위를 붙이는 주변부의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말수 적은 승철의 동선을 무심히 따라가다가 차츰 먹먹해진다. 산다는 게 이런 것인가. 이 영화는 대한민국이라는 ‘화려한 정글’에서 돈도, 친구도, 능력도, 근성도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승철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온 대한민국은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땅이겠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어떠한 생명도 피어날 수 없는 황무지일 뿐이다.

  비록 이 영화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탈북자들의 희망 없는 고단한 삶이지만, 그것은 탈북자만의 것은 아니다. 승철의 난감한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건은 탈북자라는 신분에서 왔지만, 그가 겪는 삶의 난관은 그 신분에서 직접 발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신분이 만들어낸 조건, 즉, ‘가진 것 없음’에서 온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함경도 무산에서 남한으로 온 탈북자의 일기’라는 뜻으로 읽히지만, 동시에 이 땅 어디에서나 불 수 있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무산자의 일기’라고 읽히기도 한다. 이 영화는 단순히 탈북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에서 자기의 주권을 주장할 수 없는 모든 잊혀진 사람들, ‘그저 소모되는 벌거벗은 생명’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이야기다.

  그렇게 외롭고 힘겨운 승철에게도 그가 마음을 준 존재들이 있다. 하나는 노래방주인이자 교회를 같이 다니는 여신도이고, 다른 하나는 ‘남한 사람도 아니고, 북한 사람도 아닌 자신’처럼 ‘진돗개와 풍산개의 잡종’인 백구다. 그런데 여자는 끝내 그와 소통할 수 없고, 개는 느닷없이 죽어버린다. 승철이 길가에 쓰러져 있는 백구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그가 자신의 시체를 보는 것과 같았다.  

  그 암울한 장면의 여운을 안고 영화관을 나섰을 때에도 교정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과 저 비참함이 공존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지만, 어쩔 수 없이 삶은 희비극이다. 문제는 누구에게는 삶이 주로 희극인데, 누구에게는 주로 비극이라는 사실이다. 찬란한 햇빛아래 벚꽃이 바람에 날리는 이 천국이 ‘벌거벗은 생명들’에게도 천국일리는 없다. 이 무렵이면 많은 매체에서 뜻도 모르는 채 수도 없이 읊조리는 <황무지>의 첫 구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표현은 승철에게 바쳐져야 한다. 생명이지만, 생명력을 발휘할 수 없는 승철에게,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냄으로써 생명의 힘을 일깨워주는 4월만큼 잔인한 것이 또 있을까. 누구나 첫 구절만 아는 그 긴 시의 서두에는 그리스어로 ‘쿠마에의 무녀’ 이야기가 짧게 쓰여 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그 무녀는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죽고 싶어.” 이 사회는 탈북자이던, 비정규직노동자이던, 노숙자이던, 또 어떤 다른 이름을 가졌던, 현실의 정치적 셈법에서 배제된 생명들로 하여금 ‘쿠마에의 무녀’처럼 대답하고 싶게 만든다. 물론 그 생명들에게 이 봄날의 햇볕과 바람과 꽃향기를 나누어주는 것을 이 사회가 언제까지나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는 올 텐데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리고 내가 한가로이 영화를 보러 다니는 휴일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날이 오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 몹시도 분주했으리라는 상상보다 내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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