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8월 2011-08-04   2331

나라살림 흥망사-중국사의 숨은 권력자 ‘환관’

 

중국사의 숨은 권력자 ‘환관’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

 

텔레비전의 개그프로인 <개그콘서트>를 보면 감수성이라는 코너가 있다. 코너의 주요 출연진 중 환관 즉 내시가 있다. 여자목소리에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씨앗이 없다는 놀림을 받고 사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갔을까? 그렇지 않다. 권력은 옆에 있는 사람들도 권력자가 된다.

 

왕권 강할수록 환관 제도 발달

환관은 중국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다. 아프리카와 유럽 등 수많은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광대한 영토를 가졌던 대제국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환관 제도를 두었으며, 특히 왕의 절대 권력이 강했던 곳일수록 환관 제도는 더욱 발달하였다. 이들 국가에서 환관을 두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왕의 여자들 때문이었다. 그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호하면서 동시에 그녀들의 정절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수단이 환관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자신의 남성을 포기하고 궁궐로 들어가 환관 노릇을 자처하겠는가? 특히 학식과 능력을 갖춘 신하들이 환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환관을 빼놓고서 제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중국의 정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만큼 환관집단은 핵심적인 권력포스트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해 사회적 이미지가 안 좋은 것은 신체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들과 권력투쟁을 벌인 집단이 사대부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바로 그 사대부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서술될 리가 없었다.

  환관은 일반적인 남자에 비해 외형상 특이한 면이 여럿 있다. 거세를 당함으로 해서 생기는 또 하나의 외형적인 특징은 살이 많이 찐다는 점이다. 거세한 환관들은 남성 호르몬을 생산하고 배출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영양분이 몸속에 축적되어 비만 증세를 나타내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모든 환관이 다 뚱뚱했던 것은 아니었다. 청조 말기에 찍힌 환관들의 모습을 보면 오히려 몸이 바짝 마른 경우도 많다. 이들은 대개 아주 어린 시절에 거세된 환관일 가능성이 높다. 거세를 아주 어린 시절에 한 사람은 이미 몸의 대사가 거세한 상태에 맞춰서 진행되기 때문에 자신의 원래 체질대로 체형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관은 궁녀처럼 왕과 함께 지내며 왕의 수족으로 살고 왕의 총애를 받길 원하지만, 그들이 왕의 총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권력뿐이다. 따라서 환관은 기본적으로 권력지향형일 수밖에 없다. 모든 환관이 권력만을 추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부귀와 영화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없는 비참한 처지의 그들이었기에 권력 지향적인 성향이 일반적인 남성에 비해 훨씬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권력을 얻는 환관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환관, 중국사 지배한 관료집단 일부

중국 역사에서 환관의 기록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은나라의 갑골문이다. 갑골문에 따르면 은나라의 초기 환관들은 전쟁 포로들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고자를 만드는 형벌인 궁형이 하나라 이전인 요순 시절에 법으로 정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환관이 오제五帝 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관이 중국사에 처음 나타난 시기는 적어도 서기 2500년 이전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수나라 이후 중국 역사는 환관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환관의 역할이 커진다. 황제와 사대부가 권력 갈등을 빚게 되면 황제가 자신의 측근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환관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관을 중국 역사의 단골 조역으로 만든 나라는 유방의 한 왕조였다. 특히 한 무제는 숱한 문신들을 환관으로 만드는 바람에 환관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환관이 황제를 세우고 환관의 딸이 황후가 되는 등 환관의 영향력이 기이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이후로 환관은 중국 황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어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환관 조직이 조정 백관을 지배하는 ‘환관의 치’를 구가하였다.

  <삼국지>의 첫 장면에서 대장군 하진이 궁궐의 환관들을 쓸어버리려고 하다가 오히려 살해당하는데, 이로써 후한의 환관의 기세를 알 수 있다. 유비와 손권을 누르고 천하통일을 이룩한 조조도 환관의 양자였다. 당나라 말기에는 무종에서 소종에 이르기까지 5명의 황제가 환관에 의해 옹립될 정도에 이른다.

  당시의 환관 구자량이라는 자가 휘하의 환관들에게 말한 ‘군주를 조종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천자를 한가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천자가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말아야 한다. 독서를 즐기거나 유가(공부하는사람)들을 가까이하게 해서도 안 된다. 만약에 황제가 역사를 알고 우려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멀어져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가함을 못 참는 우리시대의 권력자들이 생각해볼 말이다.

  환관의 위세가 가장 강한 시기는 명나라 말기이다. 영락제시절에 ‘동창’이라는 비밀경찰기구를 두었으며, 군대의 감찰까지도 맡았다. 말기 만력제 때는 은을 확보하기 위해 조세권까지 사용했다. 특히 선조와 광해군 때에는 우리나라에까지 은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렸다. 사대부들은 이들의 횡포를 방관하였고, 일부 재야의 지식인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당을 조직해 이들에 대항했으나 피비린내 나는 탄압만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청대에 이르러서는 환관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지만 중국역사에서 진행된 환관의 폐해는 ‘비서정치’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면 환관만이 문제였을까? 오히려 환관은 중국사를 지배하는 관료집단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관료집단은 정보와 구조를 지배하기 때문에 전문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적절한 감시와 통제가 없다면 환관정치의 모습은 다른 관료집단에서도 언제든지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또한 황제의 책임도 중요하다. 환관은 황제의 권력향유에 편승한 기생세력이다. 지도자는 판단력도 실력이다. 따라서 현명한 황제는 이들을 비서로만 부리지만 무능한 황제에게 이들은 동업자일 뿐이다.

  오늘날의 관료집단은 무엇인가. 왕 노릇하는 대통령은 5년으로 권력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 진짜 왕들이어야 할 국민의 눈만 가리거나 무시하면 훌륭한 기생세력이 될 가능성이 생기지 않았는가. 결국 어느 정도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좌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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