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7월 2011-07-06   1872

나라살림 흥망사-투명한 회계제도, 천년 도시국가 만들다

투명한 회계제도, 천년 도시국가 만들다

정창수 좋은예산센터 부소장

 

베네치아는  영어로는 ‘베니스’라 불리는 이탈리아 동부의 도시이다. 우리에게는 ‘베니스의 상인’이나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 ‘물의도시’등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122개 섬에서 400개의 다리로 연결된 이곳에 30만 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들은 베니스라고 하면 곤돌라라는 배를 타고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상상을 하면서 이곳을 찾는다. 이곳은 로마시절 한적한 시골이었다가 4세기경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드리아해 주변의 도시민들이 그들을 피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적들이 접근하기 힘든 지형을 가진 이곳으로 피신하여 앞서 살던 어민들과 함께 마을을 만들고 연합체를 형성하여 697년에 1명의 수장을 선출하는 과두공화정을 실시하였다. 그 뒤 8세기 말 베네치아로 불리게 되고 810년 비잔틴 제국에 귀속되지만 이것은 지배라기보다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이후 나폴레옹에게 정복되어 도시국가로서의 주권을 잃게 되는 1797년까지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보유했다. 1천년의 도시국가의 역사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베네치아가 흥성한 시기는 13-16세기이다. 십자군원정에서 동방으로 가는 신항로 개발시기까지와 일치한다. 바로 이 시기가 베네치아 발흥기이며 르네상스의 시기이다. 국제질서가 절대강자 없이 균형을 유지하고 역동적일 때 새로운 강자가 출현할 기회는 많아진다. 내부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향유할 준비가 되어있던 베네치아는 비로소 국제관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정확한 인구조사로 군역과 조세 물려

그런데 왜 당시 수많은 도시국가 중 유독 베네치아가 발흥했을까? 당시 지중해에는 수많은 도시 국가들이 존재했다. 이탈리아 내에도 메디치가가 사실 상 지배하던 피렌체나 더욱 훌륭한 제도를 가지고 있던 제노바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가 두각을 나타낸 이유는 왕정이나 귀족정이나 유력가문의 영향 없이 공화국의 형태로 유지했고, 전쟁을 할 때에도 전적으로 용병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사회 인구를 정확히 조사하고 관리했다. 베네치아의 행정 구조를 보면 70여 개 교구단위에 1500명 정도가 거주하였다. 전체적으로 약 10만 명 정도다. 전체는 6구제로 나뉘었는데 1171년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얼마나 체계적이었는지 전체인명부가 존재해서 전쟁 때에는 즉각 편재되게끔 준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구성원 내부의 신뢰, 국가를 지키고자하는 마음은 공개된 정보와 그것을 통한 행정, 군역을 포함한 조세에 있었다. 1797년 나폴레옹에게 항복할 때 537명 중 512명 찬성으로 공화제를 폐지했고, 민주제로 이행할 때에도 제도와 시스템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베네치아의 선진적인 경제구조

베네치아의 자료는 너무나 정확하다. 1380년 인구조사 자료를 보면 과세대상 귀족이 1,121명 정도였다. 거의 모두가 수긍할 만한 정책이 합의 되는 것은 신뢰할 만한 자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뢰할만한 자료는 공정한 경쟁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고도의 경제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자원의 낭비나 누수를 최대한 줄여준다. 베네치아는 계좌이체, 어음발행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은행가들은 계좌이체를 즉석에서 시행했고, 종의 어음인 체돌레cedole를 발행하기도 하고 고객의 예탁금으로 투자를 하기도 했다. 해상보험도 있어서 무역에서 발생하는 위험까지 보장하였다. ‘거래소’라는 것이 있어서 상품의 가격과 시정부의 공채가격도 결정하였다. 당시 베네치아시는 점차 조세의 의존을 줄이고 공채 의존도를 높여갔다. 그래서 조세도 대자본가들에게만 과세하고 나머지는 면세하게 된 것이다. 마치 현대적인 정부도 어려운 일을 한 셈인데, 핵심적인 조건은 ‘복식부기’제도 시행이다. 시 정부는 복식부기제도로 투명하게 행정을 수행했고, 그 때문에 계급·계층 구조적 부조리는 있을지라도 회계 상 부조리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단식부기는 재정의 평면적 흐름만을 표현할 경우 행정가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하게 되므로 자료나 발표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쉴 새 없이 순환하는 자본과 재정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복식부기는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어음과 공채, 보험 등 복잡한 경제활동을 어떻게 가계부식의 단순한 정리로 유지할 수 있겠는가? 신뢰받는 경제구조는 외부의 자본유입이 원활하게 하고 내부의 자본도 현물의 보유보다는 투자로 방향을 돌리게 되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자본의 순환은 빨라지고 경제활동은 더욱더 고도화되는 긍정적 순환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늘도 있었다. 바로 자본주의 문제였다. 노동자들은 비조직 상태였고 자영업자들은 길드를 조직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브렌트강 주변에서 배로 식수를 나르는 물장수, 거룻배 젓는 사람, 떠돌이 땜장이, 집집마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들이 모두 조합을 가지고 있었고 강력한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금도 내지 않고 생업영역은 독점적 지위를 보장받으니 이들이 노동귀족이 되어, 4가지 감시체계로 사회적 평온을 이룩했다.

 

다시 생각해봐야 할 우리의 경제구조

우리도 이 시기에 송도상인들이 복식부기를 쓰고 어음을 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은 정부 회계제도에 복식부기를 도입하는 문제도 많은 난관에 놓여있다. 일반 상거래에서도 당시 베네치아에서도 자본 순환이 6개월이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결재기간 6개월 이상의 어음이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관행에 어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베네치아가 천년 동안 도시국가를 유지하고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것의 기반은 신뢰할 수 있는 자료, 무엇보다 투명한 회계제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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