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12월 2011-12-05   2315

문강의 문화강좌-멜로드라마 정치

멜로드라마 정치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최근 한국 대중문화 서사의 핵심에 놓인 주제들은 장르별로 다르다. 대중가요는 ‘사랑과 섹스’를, 리얼리티 예능은  ‘생존’을, 공연식 개그는 ‘차이’를 서사의 핵심 요소로 삼고 있다. 이에 비해 TV 드라마에서 가장 지배적인 서사 요소는 ‘계급’이다. 한국사회에서 ‘계급’이라는 사회학 용어는 일종의 금기어에 가까워서 쉽사리 발화되지 않는다. 언론이나 정치, 경제에서도 그럴진대, 대중 전체를 상대로 하는 공중파 드라마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사랑, 삼각관계, 불륜, 복수, 야망 등의 구조에 가려 아무리 표면에서 억압된다고 해도, 계급은 그 모든 구조의 심층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마치 유령처럼 출몰하며 서사를 끌고 간다.  

  계급 간의 관계는 언제나 ‘갈등’에서 시작한다. 이 갈등은 주로 상류계급에 대한 중간계급 혹은 하층계급의 반발로 그려진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역전의 여왕>에서, <신데렐라 언니>에서, <천일의 약속>에서 중간계급이나 하층계급 출신 주인공과 갈등을 빚는 상대역은 언제나 회장, 사장 종합병원장 아들 등 (초)상류계급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이 갈등은 직접적인 생산관계를 둘러싸고 발생하지 않으며, 대개 개인적 정념의 충돌이라는 양상으로 재현된다. 두 계급의 주인공들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심한 차이를 보이며, 이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 주인공들 사이를 갈라놓는 근거로 제시된다. 이 갈등은 사극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노비 출신 똘복은 임금인 세종을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삼으며, 동시에 세종은 똘복을 자신이 편들고자 하는 ‘백성’의 대표로 여긴다. 임금과 노비 간의 이 놀라운 라이벌 관계는 물론 역사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그럴 법 하지도 않다. 하지만 ‘사극’이라는 장르는 실제 역사에 대한 정확한 고증보다는 역사를 빌어 현 시대를 해석하려는 시도라고 하는 게 옳다.  <뿌리 깊은 나무>에 등장하는 임금 대 노비 간의 충돌 역시 다른 현대 드라마의 심층에 놓여 있는 상류계급과 중간/하층계급 간 갈등의 반복이다.

 

착한 지배자를 욕망하는 착한 대중

계급 간의 갈등을 원류로 하는 주인공들의 충돌은, 그러나, 파국으로 향하지 않는다. 왜? 대중이 동일시하는 하층계급 출신 주인공과 맞닥뜨리는 상류계급 출신 주인공은 자신의 높은 지위나 모난 성격과는 달리 ‘심성은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착한 심성은 서사가 진행될수록 흘러나오고, 결국 애초에 극한 갈등을 빚던 두 주인공은 서로의 ‘본모습’을 알고난 후 화해하는 것을 넘어 하나로 결합한다. 제빵사와 사장아들(<내 이름은 김삼순>), 주부사원과 사장아들(<역전의 여왕>), 반항아 입양딸과 죽은 계부 사장(<신데렐라 언니>), 고아인 알츠하이머병 환자와 병원장 아들(<천일의 약속>), 노비와 임금(<뿌리 깊은 나무>)은 이렇게 서로 사랑하거나, 가업을 잇거나, 결혼하거나, 한 팀이 된다. 이 관계에서 주로 하층계급을 ‘여성’이, 상류계급을 ‘남성’이 맡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만 하다. 반면, 몰락하는 이들은 상류계급이든 하층계급이든 공히 ‘심성이 착하지 않은’ 부류다. 신분상승에 혈안이 된 하층계급 출신 인물이나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악랄하게 행동하는 인물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요컨대,  한국 드라마의 계급 간 역학은 ‘착한’ 지배자와 ‘착한’ 민중 사이의 결합 혹은 ‘나쁜’ 지배자와 ‘나쁜’ 민중의 몰락으로 나타난다.

  드라마의 이러한 문화적 계급 역학은 대중의 현실적인 욕망과 분노가 어느 곳을 향하는지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드라마식으로 말하면, 오늘 한국의 (언제나 ‘착한’) 대중이 욕망하는 것은 바로 계급 간 차이를 뛰어넘어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공감하고, 도와주고,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하나가 될 그런 ‘착한’ 지배자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이 노비의 칼에 자신의 목을 들이대며 그를 이해할 때, <천일의 약속>의 병원장 아들이 병원 이사장 딸과의 결혼을 포기하면서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고아 애인과 결혼하려고 할 때, 비로소 이들은 노비와 고아의 마음을 연다. 아니, 이미 갈등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사실 노비와 고아는 임금과 병원장 아들이 그런 결정을 내리길 내내 욕망해 왔던 것이다. 대중이 계급 간의 차이를 부각시키며 자신의 위에 서 있는 지배자를 무너뜨리자고 말하는 이를 ‘과격’하게 여기며 쉽게 지지하지 않는 현상은 이 때문이다. 지위, 능력, 학식, 교양, 돈에서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진정’ 겸손하게 가진 것들을 버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따뜻한 이. 대중은 이런 ‘착한’ 지배자와의 결합을 꿈꾼다.

정치의 멜로드라마화

어쩌면 우리는 이를 ‘정치의 멜로드라마화’라고 이름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념의 과잉을 주된 특징으로 삼는 멜로드라마처럼, 정치 역시 그렇게 변하고 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위로해주고, 동행해주고, 눈물도 흘리고, 인정해주면서 동시에 ‘개념’도 있는 이들이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지도자감으로 거론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팟캐스트 등 정서의 교감이 주가 되는 미디어가 정치의 멜로드라마화를 가속시킨다. ‘우파’니 ‘좌파’니 하는 차가운 용어는 쓰레기 취급을 받고, ‘지랄한다’고 말하는 임금이나 ‘쫄지마 씨발’이라고 웃으며 외치는 방송인이 사랑받는다. 계급 간의 권력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사회적 문제와 그에 따른 구조적 갈등은 과도한 부드러움과 과도한 위로를 동반하는 ‘토크콘서트’와 ‘멘토링’과 ‘트윗질’ 속에서 중화된다. 자신의 멘티들을 자극해야 하는 정치인들은 점점 폭력배가 되거나 혹은 연예인이 되어가고, 대중은 점점 그들을 열심히 ‘팔로우’하거나 ‘청취’하는 방청객이 되어간다.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울’ 권리 대신 아바타 같은 멘토/정치인들에게 ‘말을 걸’ 권리만 요구하는 대중에게 정치란 이제 한 편의 멜로드라마일 뿐이다.

  바야흐로 우리는 정념이 이성을, 토크가 투쟁을, 위로가 폭동을, 이미지가 이데올로기를, 멜로드라마가 정치를 대체한 시대의 문턱에 들어선 셈이다. 탈정치시대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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