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5월 2019-05-02   2926

[통인] 용균이가 세상 바꾸는 작은 불씨 되길 – 김미숙 故김용균 노동자 어머니

“용균이가 세상 바꾸는
작은 불씨 되길”

김미숙 故김용균 노동자 어머니

 

월간 참여사회 2019년 5월호 (통권 265호)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뤄주십시오.” 1970년 11월 근로기준법 준수를 촉구하며 분신한 노동자 전태일은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 이소선에게 거듭 당부한다. 이소선은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기필코 하고 말겠다”며 마지막 약속과 함께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이소선은 지난 2011년 9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살았다.

 

고 김용균 씨(24)는 지난해 12월 10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 운송 작업 중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은 비정규직 노동자다. 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서부발전의 하청업체 한국발전기술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지 3개월여 만의 비극이었다. 쉴 틈 없이 가동되는 컨베이어와 눈발 같은 석탄가루를 매일 같이 마주해야 했던 김 씨는 손전등 없이 휴대전화 불빛으로 설비를 점검했다. 2인 1조로 해야 할 안전 업무를 혼자 하다가 숨졌다. 동료 노동자들은 한국서부발전이 낮은 단가를 제시한 하청에 일을 맡기면서 2인 1조 업무를 돌리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생전 ‘문재인 대통령과 비정규직 100인의 대화’에 참가하기 위해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인증샷을 찍기도 했다. 손팻말에는 ‘노동악법 없애고!’, ‘불법파견책임자 혼내고!’, ‘정규직 전환은 직접고용으로!’라는 문구도 적혔다.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이 그랬듯, 김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는 아들의 유지를 잇고 있다. 시민단체와 노동자들, 사고 유가족들과 연대하며 ‘위험의 외주화’ 철폐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용균이가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죽음을 당해 너무 억울하고 가슴에 큰 불덩이가 생겼다”며 “진상조사만은 제대로 이뤄지도록 대통령이 꼼꼼하게 챙겨달라. 책임자도 처벌할 수 있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어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용균이 동료들이 더 이상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이뤄진 4월 17일 오후에도 그는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열린 ‘산재사망 추모 결의대회’에 참석해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면 개정됐지만 용균이가 들어 있지 않은 반쪽짜리 법안으로 통과됐다. 위험의 외주화 금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도급 승인 대상에는 화력발전소가 포함돼야 하지 않는가”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뷰는 서울시 영등포구에 위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쉼터 공간 ‘꿀잠’에서 진행했다.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강 상태가 궁금하다.

제가 이 일을 겪고 나서 유가족들을 많이 만났다. 그분들이 싸우려면 꼬박 잘 먹어야 한다고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저도 잠깐 끝날 싸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잠도 그전보다 많이 자고 있다. 회복이 조금 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도 청와대 기자회견을 하셨다고. 

산업안전보건법이 통과됐지만 반쪽짜리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2, 3의 용균이를 만들지 않겠다, 산재 사망 반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잘 이행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루 3건 정도 그렇게 기자회견, 집회에 나선다.

 

사회적 연대의 손길도 많지만 일각에선 ‘노동자 혐오’ 등 비난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시선에 원망스럽거나 억울한 마음은 없었나? 

일을 겪고 나서 눈에 띈 건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악성 댓글이었다. 자기 일로 여기지 않으니까, 당해보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유가족이 아니니까 막말하는 거라 생각한다. 어느 부모가 죽은 자식을 상품화하겠는가. 아이가 돌아오면 저와 애 아빠는 죽어도 좋다. 아이만 살아올 수 있다면 우리 목숨은 안 아깝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5월호 (통권 265호)

2018년 12월 22일 광화문에서 열린 고김용균님 추모제 현장 ⓒ참여연대 

 

4개월여간 활동하면서 의지가 된 분들이나 원동력이 있다면?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현장에 직접 오셔서 안아주셨다. 자식 잃은 아픔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황상기(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은 고 황유미 씨 아버지) 어르신, 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사망한 고 이민호 군 아버님, 삼성 LCD 뇌종양 피해자 한혜경 씨 어머니. 그분들이 큰 힘이 돼 주셨다. 진심으로 저를 대한다는 게 느껴졌다.

 

‘현장실습희생자유가족모임’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장실습 사고는 고인 사례가 아닌데 참여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다달이 한 번씩 모이고 있다. 현장실습 희생자들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사회에 나가 사고를 당한 이들인데 용균이 사고와 공통점이 많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아이들이라는 점, 교육기관에서 안전 교육이 실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래서 본인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점, 또 안전하지 않다고 말해도 위에서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 나라에 무언가 요구할 때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가족들과 최대한 연대하려고 한다. 사회 곳곳의 유가족, 그런 사람들을 찾아내 힘을 모을 생각이다.

 

사고 당시 회사 측은 산재를 은폐하고 고인의 탓으로 돌리려 했다. 상황을 설명해 달라. 

하청 이사가 ‘용균이가 착실했지만 하지 말라는 일을 했고 가지 말라는 곳을 갔다. 사고를 당했으니 보험 처리해주겠다’고 했다. 처음 만났는데 그런 말을 해서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자식을 잃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용균이가 일하는 데는 대기실이 있다는데 거기서 이상 신호가 올 때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절대로 못 가게끔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 동료들은 ‘무조건 가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는다’고 상반된 말을 했다.

 

그래서 시민대책위(고 김용균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시민대책위)에 ‘회사 사람들을 내 눈에 안 띄게끔 조치를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도 분해서 하청 이사 옷깃도 몇 번 잡았다. 우리 아들을 죽였으면 내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어야지 왜 내 앞에 나타나 합의 같은 걸 하려고 얼쩡대느냐, 빨리 사라지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회사 측보다 대책위 사람들이 더 낫겠구나 생각하게 된 계기다. 대책위 회의에 처음 참석했을 때는 무슨 말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계속 함께 하다보니 그들이 유족을 먼저 생각하고 유족 말을 따라주는 게 보였다. 차츰 믿음을 갖게 됐고 대책위에 권한을 위임했다. 

 

무엇을 숨기고자 했을까. 

여태까지 12명의 사람들을 죽이면서 계속 그리 해왔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처리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언론에 보도되면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렇다 보니 감출 게 많았을 것이다. 카메라를 통해 본 발전소 내부와 실제 현장은 많이 다르다. 현장을 직접 가봤지만 훨씬 열악하다. 이렇게 험악한 곳에서 우리 아들이 일했다는 사실 자체가…. 애한테 너무 미안했다. 나도 회사 경험을 했지만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이 정도로 열악한 환경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이른바 국가기업이 국가보안시설이라고 내부를 꽁꽁 감췄던 이유가 있었다.

 

현장은 어떠했나? 

사고 이튿날 현장에 갔는데 용균이 사고 흔적이 없더라. 벌써 손을 댔다는 거다. 사고가 나면 물청소를 한다고 했다. 정부 인사나 정치인이 오면 깨끗하게 치워놓은 곳 위주로 방문하게 한다는 것이다. 불시 방문이 아니라 미리 알리고 방문이 이뤄지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나. 용균이 사고 현장뿐 아니다. 너무 분노했다. 믿고 살았던 이 나라가 나를 속였구나. 나만 아니고 우리 서민들을 속였구나. 이런 분노가 치밀었다.

 

지난해 12월 이른바 ‘김용균법’이 통과됐다. ‘위험의 외주화’를 막자는 것인데 평가한다면? 

법안에 용균이 동료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야 하는데, (연료 환경 설비 운전 업무 담당) 노동자들은 적용 대상에서 빠졌다. 법이 통과되면 용균이를 죽인 사람들이 큰 처벌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 원청과 사업주가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위반한 경우 상한형(上限刑)을 높였지만 하한형(下限刑)은 사라졌다. 하한선이 더 중요한 것인데, 영국처럼 기업 처벌을 강화하는 법(일명 ‘기업살인법’)이 있어야 안전하게 일할 수 있다. 기업들이 정말 무서워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사고가 줄어든다.

 

김용균 씨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후속 대책을 마련할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가 지난 4월3일 출범했다. 위원장이 김지형 전 대법관인데, 어떤 기대를 갖고 있나?

김지형 대법관이 지난 2016년 구의역 사고 진상규명위원장을 맡아 역할을 잘하신 걸로 안다. 용균이 일도 약자 편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주실 거라는 기대감이 있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진 뒤 용균이를 죽인 사람들을 강하게 처벌해주길 바란다. 그래야 다른 분들도 용기를 얻고 싸우지 않겠나. 용균이 일이 세상을 바꾸는 작은 불씨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김용균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치 실상을 보셨을 것 같다. 법 개정을 막기 위한 자본의 로비도 상당했을 걸로 예상되는데.

옛날부터 돈이 권력이었고 권력이 돈이었다. 돈에 의해 정치가 움직이고, 기업과 정치인이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실감했다. 속되게 말하면 기업이 정치인 등에 빨대를 꽂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인 입장에서 기업은 ‘자기 정치’를 위한 뒷배다. 이 일을 겪으면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통과 때 열심히 싸웠지만 탄력근로제에 관해선 앞장서서 기업 편에 서는 여당 국회의원들도 봤다.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싶다가도 ‘저 사람은 결국 자기 정치를 하는구나’라고 깨달았다. 정치인들은 정말 못 믿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다. 네가 죽임을 당하면서 나도 죽었다. 너는 비록 사진 속에 있지만 난 네가 원하는 모든 걸 다 해줄 거다. 너는 내 속에서 살아있어.” 김용균 씨 영정 사진을 보며 어머니 김미숙 씨가 되뇌는 말이다. 김 씨는 인터뷰 내내 “부모는 자식을 지키지 못한 것에 자책이 있다. 그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난 죽을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치 자기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그런 ‘투사 어머니’도 아들 김용균 씨 생전 일상을 묻자 입가에 방그레 웃음꽃이 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금세 커진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5월호 (통권 265호)

 

“용균이랑 노래방을 많이 갔어요. 같이 노래도 부르고. 용균이 삼촌이 용균이 노래를 녹음한 게 있는데 요즘은 그거 계속 들어요. 용균이는 가끔 물었어요. 자기 노래 솜씨 어떠냐고.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전문가에게 배우면 실력이 늘지 않을까’라고 했죠. 애가 잘되라고 한 말인데…. 애가 죽고 나니까 잘한다고 이야기해줄 걸. 그게 그렇게 후회가 돼요. 그 말 취소할 테니까 노래 좀 부르라 하고 싶어요. 잘한다고 했다면 내 앞에서 얼마나 많은 노래를 했을까.”

 

용균 씨는 어떤 아들이었나?

딸 같은 아들이었다. 애교 있고 살갑고. 어쩔 땐 딸 같다가 아들 같은 우리 아들. 엄마한테 다가와 물고 배도 만지고, 용균이는 애 아빠와 샤워도 같이 했다. 그런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언제나 마음을 열고 엄마와 이야기하는 착한 아들이었다.

 

회사에 입사한 후에 달라진 모습이 있었나?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다고 했다. 아이가 바빠지면서 어쩌다 전화해 안부를 물으면 힘들다고 해서 ‘힘들면 회사에서 나오면 좋겠다’고 했더니 자기 목표가 한국전력공사 입사라며, 일단 현재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적극적으로 말렸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우리 아들 안 죽었을 텐데. 

 

사고가 있기 며칠 전 고인의 생일(12월 6일)이었다. 마지막 생일이었는데.

생일에 갖고 싶은 건 없다고 했지만 용균이는 반지를 그렇게 갖고 싶어 했다. 글자가 적힌 반지였는데, 갖고 싶냐고 했더니 자기가 월급 타면 그걸로 산다고 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원하는 걸 사보는 것도 재미라고 생각했다. 사고 난 다음 날 애 기숙사 문 앞에 갔더니 자그마한 상자가 있었다. 갖고 싶어 했던 반지가 담긴 상자였다. 하루만, 하루만 더 살았더라면….

 

언제 가장 그립고 아픈가?

처음에는 정신없이 이곳저곳 다니느라, 또 억울하고 분한 게 가득해 용균이를 잃은 아픔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유가 조금 생긴 지금, 아침에 눈 뜨기 전부터 가슴이 아프다. 한참 동안 끙끙거리다가 괜찮아지면 일어나고 그런다. 애를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다. 모든 게 꿈인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내가 죽을 때까지 애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지고 싶고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게 됐다.

 

사회적 관심과 어머니의 투쟁과 연대로 여기까지 왔다.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 또는 시민들에게 당부하고픈 말이 있다면?

유가족을 일반 사람과 분리해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리 힘든 유족도 웃을 수 있다. 다만 그 웃음은 어쩌다 한 번 찾아오는 것이지만. 또 유가족들이 원하는 진상규명에 관심을 부탁드린다.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누구나 직면할 수 있는 것이 안전 문제다. 우리와 같은 아픔을 느끼지 않도록 안전 사회를 촉구하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 바람이 한데 모여 관련법을 통과하는 힘이 됐으면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언론들이 많이 나서줬다. 내 말투가 어눌한데도 내 편에서 내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노력해주셨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시민대책위 분들이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고생하셨다. 편지도 써주시고 직접 찾아와 이야기도 해주셨고 어디서든 연대를 해주셨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제대로 못했다. 그들이, 또 서민들이 ‘이만하면 안전한 사회다’라고 말할 때까지 나도 싸우고 연대하겠다. 

 


글. 김도연 참여사회 편집위원, <미디어오늘> 기자 

사진. 이한나 미디어홍보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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