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4월 2013-04-05   4664

[참여연대史] 깃발의 상상력 – 1인시위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08

깃발의 상상력 – 1인시위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변호사)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호에서는 1인시위라는 새로운 운동 방식을 창안하게 된 계기와 그 사건의 흐름을 짚어봅니다.

 

 

2000년 12월 4일 윤종훈 회계사의 국세청 앞 1인시위

2000년 12월 4일, 참여연대 조세개혁팀 실행위원인 윤종훈 회계사는 국세청 앞 1인시위에 나섰다. 사회 모순과 집시법에 맞선 시민 행동으로서는 사상 최초의 1인시위였다. 

1999년 2월,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이재용 등 몇 사람이 매수하였는데, 그 구입 가격이 시가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참여연대의 눈에 그것은 매매를 가장한 변칙 증여였다. 이에 참여연대 조세개혁팀은 증여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한 요구를 통해 재벌의 재산과 경영권의 불법 승계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조세개혁팀은 우선 국세청에 이재용을 증여세 탈세 혐의로 고발했고, 국세청의 조사 결과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고심하던 끝에 1인시위라는 방법을 강구해냈다. 조세개혁팀이 전력을 기울였던 그 첫 행위 이후 1인 시위는 가장 흔한 형태의 의사 표현 수단이 됐고, 수많은 변종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차병직 변호사

 

 

오른손을 들어 “안녕”하고 인사하듯 살짝 흔들자 바로 곁의 벽에 다양한 색깔의 컴퓨터 아이콘들이 펼쳐졌다. 집게 손가락으로 이메일 아이콘을 가리키기만 했는데 즉시 메일함이 열렸다. 기다리던 연락을 확인하고 왼쪽 손목 위에다 가상의 원을 그렸더니 시계 화면이 나타났다. 이번엔 왼손 손바닥을 펴자 손가락 마디 마다에 휴대폰 번호판이 비쳤다. 손가락으로 번호를 눌러 친구와 통화를 했다.

 

이것은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적어도 MIT미디어랩에서는 그렇다. 위에서 묘사한 장면은 첨단의 이 시대에도 신기할 정도지만, 실제로 미디어랩에서 연구자들이 시연한 내용들이다. 그것도 2, 3년 전에. “기술이 충분히 진보하면 마술과 구별할 수 없다”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란 화려한 수사가 그대로 어울리는 곳이다. 그곳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고, 포기에 대한 책임은 있어도 실패에 대한 책임은 없다. 그들의 무기는 오직 상상력이다. 

 

 

시작은 궁여지책

 

2000년 11월 21일 낮, 안국동 참여연대 2층 사무실에 네 사람이 앉아 팔짱을 끼거나 턱을 괴고 자못 깊은 생각에 빠졌다. 실험에 진전이 없어 새 아이디어를 궁리하는 과학자도, 가난한 시심에 불꽃을 당겨줄 정령 데몬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초조한 시인도 아니었다. 변호사 하승수, 회계사 윤종훈, 시민감시국장 이태호, 조세개혁팀 간사 홍일표, 조세개혁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고민은 삼성 때문이었다.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이재용 등 몇 사람이 매수하였는데, 그 구입 가격이 시가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참여연대의 눈에 그것은 매매를 가장한 변칙 증여였다. 거기에 대해 조세개혁팀은 증여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러한 요구를 통해 재벌의 재산과 경영권의 불법 승계에 제동을 걸고자 했다. 반면 경제민주화위원회의 견해는 좀 달라, 그러한 목적의 BW 발행 행위 자체가 무효라며 이미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증여세만 납부하면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조세개혁팀의 주장에 우려를 표시했다. 수차례 모임을 통해 양쪽의 문제 제기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데에 합의한 뒤, 조세개혁팀은 우선 국세청에 이재용을 증여세 탈세 혐의로 고발하면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2000년 11월 28일 서울YMCA 앞 기자회견

2000년 11월 28일 서울 YMCA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씨 등이 1999년 2월 삼성 SDS 신주인수권부사채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수백억 원대의 증여세를 탈루한 혐의가 있음에도 국세청이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에 항의하기 위한 기자회견이었다.

 

 

고발로 일시적이나마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는 했지만, 그 다음이 막막했다. 국세청의 조사 결과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사안이었으면 애당초 변칙증여라는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탈세 고발에 즈음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다들 사무실에 모여 앉아 고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윤종훈은 단식을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아무도 수긍하지 않았다. 그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시키고 국세청이 움직이도록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세청 앞에서 계속 시위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안이 나왔지만, 그 빌딩 안에 온두라스 대사관이 있어 불가능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외국의 외교 기관 반경 100미터 이내에선 옥외집회와 시위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기업들은 그 조항을 악용해 본사 빌딩 내에 약소 국가의 대사관을 유치하거나 사실상 무상으로 임대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한 마디 했다. “그럼 한 사람이 혼자 시위를 하면 안 되나?” 그 말은 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정황으로 미루어 홍일표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궁여지책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듣는 사람들은 무릎을 쳤다. “거, 괜찮은데!” 다들 법률가인 하승수를 쳐다봤다. 집시법에서 말하는 집회와 시위는 다수인의 행동을 전제한 개념이므로 법의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에 이르렀다. 안국동 미디어랩의 회의는 그것으로 끝났다. 

 

 

추위 속, 79일의 1인시위

 

홍일표는 당장 참여연대 옥상으로 갔다. 주변에서 주워오다시피 한 합판과 각목으로 시위에 사용할 피켓을 제작했다. 며칠 뒤엔 현장을 답사했다. 상층부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종로타워빌딩 앞의 어디쯤에 시위자가 서는 것이 좋을지 살폈다. 드나드는 국세청 공무원과 지나가는 일반 시민이 잘 볼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사진 촬영 때 국세청 간판도 제대로 나오는 위치를 찾아야 했다. 국세청 간판이 푸른색이라는 점을 감안해 거기에 맞추어 피켓의 바탕도 푸른색으로 결정했다.

 

시위자로는 윤종훈이 나섰다. 단식을 만류했으므로 공식 1인시위의 첫 주자의 영예를 그에게 안겨주기로 했다. 보도자료를 만들던 홍일표는 그 독특한 시위를 뭐하고 불러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 끝에 ‘1인 피켓팅 시위’라고 썼다가, 사흘 뒤에는 ‘1인 침묵 시위’라고 했다. ‘1인시위’라는 말은 그 직후에 일반화된 용어인데, 어쩌면 ‘1인 침묵 시위’를 보도하던 언론에서 간략히 1인시위로 정리했는지 모른다. 피켓을 거머쥔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단독자의 고독한 모습을 ‘1인시위’라 부른 사람에게 저작권을 인정할 수 없게 된 사정은 안타깝지만, 공익의 특허라는 명예는 관심을 가졌던 모든 시민들에게 귀속될 것이다.

 

의지가 강했던 만큼 윤종훈은 쇼맨십도 있었다. 첫 1인시위의 디데이는 12월 4일, 강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외투를 걸치지 않고 섰다. 물론 내의는 잘 갖춰 입었겠지만, 퍼렇게 얼어붙은 그의 모습은 더 결연해 보였다. 그렇게 혼자서 2주일 동안 매일 한 시간씩 시위를 했다. 그 사이 이태호와 홍일표는 사태를 점검하며 바삐 움직였다. 3주째부터는 시위자를 교체하여 릴레이로 진행했다. 참여연대 임원들이 먼저 나섰다. 피켓 색깔도 강렬하게 붉은 색으로 바꿨다. 시위 시간도 출근 시간에서 점심시간으로 옮기거나 병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일반인들을 모집했다.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져 많은 사람이 지원했다. 신상을 파악하고 순서를 정하며 그 상황을 특정하는 사연을 만들어 언론사에 알렸다.

 

처음 시작했을 때 그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생소했다. 그래서 조금은 참신해 보였을 수도 있다. 국세청 담당자들은 호기심과 의구심이 반쯤씩 섞인 시선으로 접근했다. 기획에서 현장 연출까지 도맡아 있던 홍일표는 손님까지 맞았다. “이게 뭡니까?” “보시면 알잖습니까.” “언제까지 하실 겁니까?” “증여세 과세할 때까지 해야죠” “과세가 가능하면 하지요.”

 

국세청 조사4국 조사1과장이라면 돈 많은 사람이나 웬만한 기업으로서는 두려움을 감출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홍일표는 적당히 공부한 지식으로 그들과 한겨울의 거리 토론에 뛰어들었다. 그러면서 장하성, 윤종훈 등으로부터 틈틈이 과외를 받아 세련되고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며, 심심하지 않게 세무 공무원들과 과세 가능성에 대한 공방을 했다. 어떻게 보면 그 과정에서 국세청으로서는 과세 근거에 대한 자료 확보와 함께 서서히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리란 예측을 할 수 있다.

 

2001년 302_납세자대회1

2001년 3월 2일 “납세자 주권은 시민이 지킨다!”를 모토로 열린 납세자 대회. 이튿날 납세자의 날 집회에서는 추위와 폭설 속에서 국세청 앞을 지켰던 1인 시위 참가자들의 사진을 전시했다.

 

혹한의 날씨에 시작한 1인시위는 봄을 맞았다. 2001년 4월 16일 오전, 홍일표는 4국 1과장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과세는 언제 하실 겁니까?” “홍 간사님, 지난 주말에 과세 통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날은 윤종훈 이후 79일째 릴레이 1인시위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정성을 쏟은 1인시위가 4개월째를 넘기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막을 내릴 순간이 온 것이다. 그날 순번이었던 택시기사 장홍국 씨는 물론, 5월까지 예약한 대기자들에게 일일이 연락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홍일표의 가슴에 솟구치기 시작한 눈물은 어느새 그의 동공에까지 차올랐다. 

 

 

상상력의 깃대를 세우고

 

홍일표는 그 일이 진행되던 겨울과 봄 사이에 할머니와 아버지를 잃는 두 번의 상을 겪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사4국 1과장은 부의금을 보내기도 했다. 서로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그렇게 정이 들기도 한 것이다. 물론 그 싸움은 무익한 소란이 아니었다. 무엇이 상황의 정의인가에 대한 진지한 문답이었다. 시민과 함께한 그 대응의 결과로 국세청은 나름대로의 정치적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참여연대의 1인시위가 성과를 거두자 바로 반응이 있었다. 몇몇 단체에서 구체적 방법론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그런 순간 참여연대로서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우선 1인시위는 참여연대의 순수한 창조물은 아니었다. 이미 이전부터 그런 형태의 시위는 있었다. 법원이나 검찰청과 같은 공공기관 현관에 앉거나 서서 억울함을 호소하던 사람들을 본 기억이 있었기에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뿐이다. 멀리 조선이나 고려 시대로만 가도 찾아볼 수 있다. 왕궁 앞에 꿇어 앉아 곁에 도끼를 놓고 상소문을 읽어내리던 조헌이나 최익현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된다. 자신의 주장이 옳으면 받아들이고, 그르면 도끼로 목을 쳐 달라는 지부상소야말로 왕권을 감시하고 견제하던 옛 선비의 결연한 1인시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1인시위는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운동의 수단이었다. 요구 사항을 써 들고 가만히 서 있는 행동이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누가 마다하겠는가. 어떤 면에서는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막판에 가서 필사적으로 항의나 한번 해보겠다는 초라한 몸짓에 불과했다. 참여연대가 첫 행동에서 성공한 것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운도 따랐기 때문이다. 매일 관찰하고 다음날을 생각했으며,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게다가 마침 국세청이 건물을 재건축하던 중이라 임시로 삼성 소유의 종로타워빌딩에 입주해 있었다. 한때 그 사실만으로도 삼성과 국세청의 밀착 관계를 의심하는 특혜 시비가 일었다. 그러니 그 앞에서 삼성의 변칙 증여와 상속에 대한 과세 요구를 하며 시위를 할 때 모든 것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 그런 우연한 사건마저 언론과 여론의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이 돼 주었던 것이다. 참여연대의 경우는 1인시위의 거의 유일한 성공 사례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모순과 집시법에 맞선 시민 행동으로서 1인시위는 참여연대의 발명품이다. 조세개혁팀이 전력을 기울였던 그 첫 행위 이후 1인시위는 가장 흔한 형태의 의사 표현 수단이 됐다. 뿐만 아니라 많은 변종도 탄생시켰다. 한 사람만으로는 파워가 부족하다 싶었던지, 여러 명이 20미터 정도의 간격을 띄우고 서기도 했다. 집단의 1인시위대는 스스로 고립된 섬을 자처했으나, 경찰은 공동의 목적으로 집결한 ‘변칙 1인시위’로 간주했다. 그러자 NGO들은 제각각 주장을 달리하는 피켓을 만들어 들고 모이기도 했다. 1인시위를 제지하던 경찰은 고소를 당했고, 국가는 손해배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1인시위 자체는 더 이상 집시법으로 막을 수 없었다. 그러자 한때 경찰청이 나서 1인시위까지 집시법의 규제 대상으로 삼으려는 개정을 시도하다 반발에 막히기도 했다.

 

상상력의 발동으로 시작한 1인시위는 운동에도 사색과 아이디어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쳐 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어디에선가 1인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자기 몸뚱어리를 항의의 깃대로 삼는 단독의 시민운동은 그치지 않는다.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책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미래의 참여연대를 위한 상상력이다.

 

 

차병직

참여연대 창립 멤버. 전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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