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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19년 5월
  • 2019.05.02
  • 1294

여는글

슬픔에 유효기간이 있겠습니까?

 

 

“부활의 아침, 죽음을 넘어 부활하시는 4.3, 4.19, 5.18, 4.16의 선한 민중들의 영혼을 맞이합니다. 부활의 은총이 충만하소서. 샬롬 알레.”

 

부활절 아침에 공부모임의 벗인 신부님이 보내온 메시지입니다. 새삼, 사월은 참 아프고 슬프고 원통한 달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온통 연두색 수목과 산벚꽃들이 점점히 수놓은 신록의 향연에 감탄사를 내뱉고 있는 제가 심하게 부끄러워집니다. 더없이 푸르고 아름다운 사월과 오월의 산하는 깊은 통증으로 신음을 내뿜고 있습니다.

 

사월과 오월의 아픈 날들을 생각해보니, 광주민중항쟁과 세월호 참사를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민주화를 외치던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칼을 휘두르는 현장에서 야만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부처와 악마가 어떻게 갈리는지 보았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땅이 진도와 가까운 까닭에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과 절망을 곁에서 보았습니다. 지옥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묻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지옥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우리 곁의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잘못 길을 들어선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자본과 권력을 탐하는 사람들, 상생과 사랑의 가치를 외면한 사람들이 살상하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거듭 묻습니다. 무엇이 생명에게 이토록 지울 수 없는 아픔과 상처를 주어야만 했던 것일까요? 이념, 권력, 자본이 진달래꽃, 동백꽃을 보며 기뻐하고 웃는 얼굴을 할퀼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일까요?

 

오늘도 이 나라 이 땅의 산하는 푸르고 푸릅니다. 눈이 부시게 푸릅니다. 그런데 내 곁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가슴으로 슬퍼하는 사람들, 이들의 눈에는 푸르고 푸른 산하가 온통 슬픔의 빛입니다. 연민의 가슴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천당과 부처가 어느 먼 곳, 어떤 특출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사람들이 바로 연민과 사랑의 부처가 되고 천국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야만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픔 앞에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문제이고 사람만이 희망임을 봅니다.

 

“이 사람아! 뭐라도 좀 먹소. 자네가 먹어야 힘내서 자석도 찾고 싸우제.” 세월호 참사 이후 진도 사람들이 유가족에게 건넨 말입니다. 1년, 2년, 3년... 자녀들을 기다리며, 엉터리 거짓의 해명과 싸우면서 지쳐가는 유가족들의 곁에서, 이 땅의 평범한 진도의 부처님들이 지그시 유가족들의 손을 잡고 밥을 먹이며 건넨 한마디입니다. 자식을 바다에 남긴 가족들이 말하더군요. 그 어떤 말보다도 그때 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손’을 잡고 건네던 ‘밥’과 애절한 한마디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고요. 그 위로의 힘으로 버티고 견딘 것 같다고요.

 

위로는 이렇게 진심과 열심을 담은 가슴과 손으로 전하는 일이겠습니다. 그러기에 섣부르고 서툰 위로는 조심하고 삼갈 일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세월이 가면 잊히는 법이라고, 더 큰 일을 당하고도 사는 사람도 있다고, 이런 말들은 부디 삼가야 할 입니다. 슬픔에 유효기간이 있겠습니까? 당사자의 아픔이 다른 아픔과 어찌 바꿀 수 있는 아픔이겠습니까? 슬픔과 아픔은 당사자가 감내하는 무게입니다. 위로와 사랑은 오직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사월과 오월의 아픔 한복판에서, 엄숙한 역사 앞에서, 왜곡과 거짓으로 변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화나고 서글프기만 합니다. 부처와 예수는 무지와 탐욕에 제정신 못 차리는 이들에게 더 없는 연민을 보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순결한 슬픔의 힘을 믿습니다. 정직한 통찰을 믿습니다. 용기 있는 말모이의 연대를 믿습니다. 거짓 앞에 맞서 참여하고 연대할 것을 다짐합니다. 슬픔과 연대하고 사랑에 참여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 다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로라고 믿습니다.

 

부활절 메시지를 받은 날, 요한복음 한 말씀을 제 언어로 전하며 슬픔의 치유, 역사의 부활을 소망합니다. ‘진실과 사랑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진실과 사랑을 믿는 사람은 죽어서도 살고, 또 살아서 진실과 사랑을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위로

 


글. 법인스님 참여연대 전 공동대표,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으며, 전남 땅끝 해남 일지암 암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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