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01-02월 2019-12-30   1099

[듣자] 설리와 구하라를 보내며

설리와 구하라를 보내며

 

 

2019년 12월 8일 일요일 저녁 7시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U2(이하 ‘유투’)의 공연이 열렸다. 43년 만의 첫 내한 공연이었던 ‘조슈아 트리 투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공연 후반부 유투가 <Ultraviolet>을 부를 때였다. 보컬 보노는 노래를 부르기 전 “세계 여성들이 히스토리를 허스토리로 만드는 날이 바로 아름다운 날”이라고 말했다. 무대의 가로 61m, 세로 14m 초대형 LED 스크린을 채운 자막 “히스토리History”는 “허스토리Herstory”로 바뀌었다.

 

세상을 이끈 세계 여성들, 그리고 설리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을 때, 스크린에는 세상을 이끈 세계 여성들의 모습이 네 명씩 지나갔다. 아이슬란드의 여성들, 18세기 영국 여성 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미국 게이 해방 운동가 마샤 P. 존슨, 러시아 여성주의 펑크록 집단 푸시 라이엇 뿐만 아니었다. 한국의 여성 중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이 먼저 등장했다. 나혜석, 김정숙, 서지현 검사, 해녀들,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한국 최연소 축구 국제심판 출신 홍은아 교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경기대 교수의 얼굴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수정 교수 옆에 설리의 모습이 함께 등장했다. 그 순간 공연을 보던 많은 이들이 눈물을 터트리거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뉴스에서도 유투 공연에 설리의 모습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설리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도 안 된 때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리의 삶과 죽음이 우리 사회에 던진 충격과 상처가 컸기 때문이었다. 설리가 세상을 떠난 후 구하라마저 세상을 등지면서 충격은 더욱 컸다. 젊은 톱스타 여성 예술인이 두 달도 되지 않아 연달아 죽음을 선택하는 일은 전무후무했다. 어떤 경우 죽음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 있지만, 이들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선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불러야 했다.

 

걸그룹 ‘에프엑스Fx’의 멤버로 시작해 연기자로 활동한 설리는 솔직한 모습으로 자주 화제와 논란이 되었다. 구하라는 전 남자친구 최종범이 가한 폭력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최종범은 집행유예 처분으로 처벌을 면했고, 촬영물 유포 협박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반면 온라인에서는 설리와 구하라를 매도하고 조롱하는 댓글이 끊이질 않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지만, 이들을 대하는 세상의 반응 가운데 상당수는 의견이라고 부를 수 없는 배설이었다. 남성이라면, 남성 대중예술인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일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일방적인 곡해와 비난을 퍼붓는 이들은 수두룩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모욕과 조롱조차 대중예술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견뎌야 한다고 우겼다.

 

참여사회 2020년 1-2월 합본호 (통권 272호)

 

모욕과 폭력은 당연하지 않다

그러나 부당한 모욕과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 조롱당하거나 비난을 받으며 마음이 다치지 않기는 불가능하다. 대중예술인으로 오래 활동했다고 무뎌지지 않고, 무심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대중예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참고 견딜 뿐만 아니라 잘못하지도 않은 일을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김유정, 손나은, 수지, 아이린, 하연수를 비롯한 여성 대중예술인들에게만 집중된 비난은 대부분 일방적이고 편파적이었다.

 

특히 무엇이 문제이고 누가 잘못했는지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논란만 선정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은 공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윤리의식과 죄의식을 마비시키며 부당한 폭력을 확산시켰다. 이것은 논란이 아니라 폭력이라고 선언하고, 사회적 인식과 기준을 만들어가야 할 언론은 조회 수 올리기에 급급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여성 대중예술인들을 향한 불평등한 폭력을 멈추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이 있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여성 대중예술인을 함부로 여기고, 순종적이고 예쁜 인형 역할만 강요하면서 그들을 괴롭히는 이들과 사회적 폭력마저 돈벌이로 이용하는 언론, 그리고 부당한 소비의 메커니즘을 바로잡지 못한 우리 사회가 설리와 구하라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고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곳곳에서 죽어가는 이들이 즐비하다. 하루에 세 명 이상의 노동자가 퇴근하지 못하는 나라. 2018년 서울특별시에서 벌어진 오토바이 사망사고 중 3분의 1이 배달 중이었는데, 20대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곳곳에서 죽음이 일상화된 시대, 죽음의 경중을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다행히 설리와 구하라가 떠난 후 대중예술인의 삶에 대해, 특히 젊은 여성 대중예술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연예기획사에서도 더 많은 대책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러나 언론은 얼마나 달라졌고, 여성에게만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의 인식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여성 대상 폭력을 막고 제재하자는 사회적 합의와 제도는 충분한가. 만약 또다시 누군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나부터 용서할 수 없다. 

 


글.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과 네이버 온스테이지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민중의소리’와 ‘재즈피플’을 비롯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공연과 페스티벌 기획, 연출뿐만 아니라 정책연구 등 음악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양하게 하고 있기도 하다. 『대중음악의 이해』, 『대중음악 히치하이킹 하기』,『음악편애』등을 썼다. 감동받은 음악만큼 감동 주는 글을 쓰려고 궁리 중이다. 취미는 맛있는 ‘빵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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