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01-02월 2019-12-30   4033

[환경] 노예의 시간, 시간의 노예

노예의 시간, 시간의 노예 

 

참여사회 2020년 1-2월 합본호 (통권 272호)

 

시계의 독재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고향’이란 말을 사전은 이렇게 풀이한다. 간결하고 명료하다. 하지만 건조하다. 나는 고향이 공간적 개념보다는 시간적 개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시간을 통해서만 고향은 진정한 고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만 봐도 그렇다. 나는 부산 변두리의 어느 허름한 마을에서 태어나 거기서 초·중·고등학교를 다 다녔다. 서울로 대학 진학하기 전까지 내 어릴 적 기억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곳인 셈이다. 그곳이 지금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재개발 사업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한 탓이다. 하늘 높이 쭉쭉 솟은 직사각형 모양의 아파트만 즐비한 그 삭막한 풍경에서 내 어릴 때 기억이나 사연을 떠올릴 만한 흔적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재개발 사업으로 사라진 것이 마을과 집과 골목길뿐일까? 아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곳에 얽힌 수많은 기억마저도 하나씩 둘씩 지워질 것이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기억을 빚어낸 시간과 역사도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 시간과 역사가 온축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고, 그 길은 오랜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이나 사회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정체성을 이루는 기억과 그 기억이 흐르는 시간의 강물은, 그러므로 한 사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기억과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삶의 뿌리가 뽑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간이 만들어낸 이 삶의 뿌리에 가장 원초적이고도 깊이 맞닿아 있는 것이 고향일 터이다. 특정 장소를 일컫는 고향을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시간 속에서, 시간과 더불어 고향은 과거에 고여 있는 ‘죽은 공간’이 아니라 생동하는 ‘지금 여기’로 거듭난다. 고향이 중요하다는 게 아니다. 고향의 참뜻을 생각해보면 시간의 힘과 소중함을 잘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시간은 모든 존재의 원천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시간이 오늘날 어떻게 되었는가? 시간의 강물은 제 길을 온전히 흘러가고 있는가?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이 그리피스는 『시계 밖의 시간』이라는 흥미진진한 책에서 ‘시계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자본주의 산업문명과 현대인의 삶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당신은 피곤하고 졸려서 잠자리에 드는가, 아니면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니 내일 아침 출근 걱정을 하며 잠자리에 드는가? 당신은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가, 아니면 시계가 회사가 정해놓은 점심시간인 정오를 가리키니 밥을 먹는가? 두 경우에서 후자의 시간이 시계 시간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이 시계 시간의 노예로 살아간다. 시계 시간은 빈틈없이 우리 일상을 에워싼 채 우리 삶을 지배하고 규정한다.

 

이 시계 시간은 인위적으로 제조되고 조작되고 합성된 시간이다. 이 시간 개념은 서구적 근대성의 산물이자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인공적 구성물이다. 건조한 숫자로만 표시되는 이 양적인 시간은 그래서 철저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리니치 표준시로 상징되는 근대의 시간은 시간을 획일화하고 표준화함으로써 시간의 다양성과 고유성을 말살했다. 나아가 ‘시간은 돈이다’라는 물신주의적 속도전의 기치 아래 시간이 선사하는 은총을 고갈시켰다. 시계 시간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속성과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간’을 되찾자

자본주의가 이윤 극대화와 경제성장을 끝없이 추구하려면 노동자를 비롯한 다수 대중의 노동과 생활을 단일한 기준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을 부려먹기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루어준 것이 시계 시간이었다. 산업혁명을 떠올려보라. 산업혁명의 핵심은 기계를 이용하는 공장식 대량생산 시스템의 등장이었다. 공장에서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려면 예측할 수 있고 표준적인 작업 일정이 필요했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노동력을 정확하고 규칙적으로 활용할수록 더 손쉽게 노동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 시간의 기계화, 곧 시계 시간이 필요해진 까닭이다. 이로써 시간은 식민화되었고, 자본가는 시간의 지배자가 되었다. 시계는 기만과 착취를 은폐하거나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루이스 멈퍼드는 이렇게 말했다. “근대의 핵심 기계는 증기기관이 아니라 시계다.” 산업화뿐이겠는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한 세계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단일하고도 패권적인 시계 시간 덕분이었다. 

 

시간이 하나가 되면 세상도 하나가 된다. 이른바 ‘시간의 제국주의’다. 이것의 본질은 폭력성이다. 시간의 다채로움과 풍요로움에 담긴 삶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계 시간이 강요하는 속도는 사람과 사람 사이는 물론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도 파괴한다. 본디 관계란 시간과 더불어 깊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시계 시간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현대인들의 삶이 남루하고 왜소해진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참된 시간은 자연 속에 존재한다. 자연 또한 시간 안에 존재한다. 제이 그리피스는 “일찍이 자연은 가장 거대한 공공의 시계였다. 자연의 리듬은, 협동으로 일하고 자연의 풍경이나 계절에 맞추어 공동으로 경배하고 공동으로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시간 공동체’를 세웠다”라고 말한다. 이런 시간은 수량화될 수 있는 직선의 시간이 아니었다. 다채로운 색깔과 무늬가 가로세로로 어우러진, 자유롭고 울타리가 없는, 자연의 리듬과 생명의 율동이 꿈틀거리는 곡선의 시간이었다. 풍성하고 역동적인 시간, 촉촉하고 비옥한 시간이었다. 생명은 이런 시간과 자연의 결합 속에서 잉태되고 창조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자연과 시간은 ‘자원’이 되었다. 자연이 길들자 시간도 길들었고, 자연이 황폐해지자 시간도 황폐해졌다. 시계 시간의 독재에 맞서 ‘참된 시간’을 되살려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의 시간, 기계의 시간이 아니라 자연의 시간, 생명의 시간이다. 이것이 ‘인간의 시간’이다. 

 


글. 장성익 환경과생명연구소 소장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다.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학술 연구, 출판 기획, 대중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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