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4월 2006-04-01   1591

흙의 삶, 기(氣)가 올라오는 삶

미국 농림부 토양관리국장을 지낸 프랭클린 히람 킹(1848~1911)이 1909년 중국과 한국, 일본을 여행하면서 이들 나라의 유기농법을 눈으로 보고 쓴 답사보고서를 남겼다. 세 나라가 모두 인구밀도가 매우 높은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좁은 땅에서 삶을 지속시켜왔는지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이로부터 세계 어느 나라에나 적용할 수 있는 산업·교육·사회적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가 농업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생산계층이 삶의 모든 부문에서 실천해온 모범적인 생활태도 때문일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땅은 먹을거리와 연료, 옷감을 생산하는데 남김없이 쓰인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은 사람과 가축의 입으로 들어간다. 먹거리나 입을 수 없는 모든 것은 연료로 쓰인다. 사람의 몸과 연료, 옷감에서 나온 배설물과 쓰레기는 모두 땅으로 되돌아간다.”

히람 킹의 시각과 정반대로 오늘의 미국은 화학농업의 대표적인 나라이며, 그 결과물을 전 세계에 강요하다시피 팔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적어도 동아시아 민중은 수천 년 동안 땅을 비옥하게 이끌어온 비결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윤회적 삶의 표상, 흙

우리에게 흙은 무엇일까. 그야말로 마음의 고향이자 추억의 표상이며, 농민문화의 상징이자 회귀본능을 자극하는 어머니의 모태와도 같은 그 무엇이다. 눈만 뜨면 보이는지라 희소가치 제로인 흙. 그 흙도 기기묘묘하니 그 이름 한번 들어보자. 옹기 만들기 좋은 황토, 도자기 만들기 좋은 고령토, 금속활자 만들기 좋은 해사, 농사짓기 좋은 참흙, 토란심기 좋은 모래참흙, 나무심기 좋은 부식토, 기와 만들기 좋은 뻘흙, 장판 마무리 좋은 모래황토, 벽 바르기 좋은 짚여물황토, 부엌 만들기 좋은 점토, 오리 기르기 좋은 시궁흙….

이 가운데 한국인의 정서적 감흥에 가장 잘 부합되는 색깔과 느낌, 효용성 따위를 지니고 있는 흙은 황토다.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노래되는 황톳길은 단순한 시어(詩語)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황토에서 태어나서 황토로 돌아가는 한국인의 삶이 강력하게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혹독한 겨울날이라도 따스한 햇볕만 있다면 붉은 황톳길을 걸으면서 보리밭 내음을 맡는 것만으로도 겨울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선사시대는 물론이고 근래에 이르기까지 우리 건축물의 대부분은 흙집이었다. 흙벽돌을 쌓아올린 흙집으로부터 수수깡이나 대나무를 집어넣어 골조를 만든 흙집, 판자에 흙을 밀어 넣어 다져낸 투막집 형식의 흙집에 이르기까지 온통 흙집에서 살았다. 흙집에서 태어나서 무덤의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흙 문화는 한국인에게는 윤회적 삶을 압축하는 표징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흙을 우습게 여기고 서양식 시멘트 문화에 매몰되어왔다. 근년에 들어와 황토바람이 불면서 황토찜질방, 황토아파트, 황토집, 황토침대 등이 등장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황토바람은 유행으로만 지나칠 바람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무시해오고 업신여겨왔던 황토의 진실을 제대로 평가해야 할 순간이 아닐까.

한반도, 특히 한반도 중부 이남은 황토의 질이 뛰어나다. 황토는 절반 이상의 성분이 석영이다. 각감석, 흑운모, 녹니석, 석류석 같은 중광물로 구성된다. 우리나라 황토는 화강암, 편마암, 규토 등이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거치면서 마사황토로 변하고, 황토 자체에서 점토광물이 생성되어 미세한 점토가 형성된다. 풍부한 광물질을 내포함으로써 황토는 쉽게 약용화할 수 있는 소질을 갖는다.

우수한 주거수단인 구들과 흙집

황토찜질방은 오늘날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아픈 사람들은 황토로 만든 구들에 누워서 장작으로 불을 때어 찜질을 하는 생활풍습이 보편적이었다. 이를 산업화시켰을 뿐이다. 바닥을 잘 들여다보면 미세한 구멍으로 불기운이 보이고 연기도 송송 올라온다. 흙의 숨구멍을 통해 불기운의 뛰어난 기가 올라와서 건강을 도와주는 것이다. 황토는 구들을 만났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구들은 가장 원초적인 문화유산이면서도 희소성이 없기에 ‘화끈한’ 주목거리에서 벗어난다. 이 점 황토와 마찬가지이다. 황토의 구들은 두말할 것 없이 접촉문화다. 신체와 바닥이 닿는 문화다. 그래서 몸이 안 좋으면 구들에 ‘지진다’고 하였다. 구들에서 올라오는 황토의 기(氣)가 신체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현대 건축물들은 황토의 기를 빼앗긴 것이다. 오죽하면 황토아파트가 인기를 끌었을까. 황토찜질방의 돌풍도 바로 황토에서 뿜어 나오는 기의 활력에 대한 기대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황토의 생태학적 중요성은 일찍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효율성의 신화에 종속되어 황토를 실생활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황토로 빚은 옹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파트 살림에 거치적거린다고 폐기하였다. 황토집이 좋지만 비싼 땅의 효율성을 살릴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런 식으로 황토는 일부에서만 쓰일 뿐, 도시의 삶에서는 거부되고 있다. 그러나 산성비가 내리고 생태가 오염될수록 황토의 강렬한 기가 내뿜는 생태적 힘은 더욱 필요할 것이다. 사실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 흙집을 짓고 사는 이들이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중동이나 중국의 일부지역에는 아예 흙집만이 존재한다. 흙 건축이 충분히 과학적이라는 증거다.

생활문화의 토대가 된 흙

흙은 단순한 주거문화에서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흙은 도자기나 옹기로 상징되는 고품격 예술의 모태이기도 하다.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에 우리나라 전역에서 만들어 쓴 질그릇으로 다양하게 그려진 그 기하학적 무늬는 미술사적으로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선사문화의 연계성 및 시원을 밝혀 주는 주요 상징이기도 하다.

현대사회는 질그릇을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초기의 질그릇을 일상생활에 쓰기는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빗살무늬’만큼은 오늘날 문화산업으로 전승·발전시킬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청자, 백자, 분청사기, 청화백자 옹기를 비롯한 무수한 그릇들에 관해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들 그릇들은 흙이 빚어낸 보석이기도 하거니와 산업·심미적 가치를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흙의 재발견에 미래가 달려있다

사람들이 흔히 잊고 사는 흙이 있다. 갯벌이 그것이다. 밀물과 썰물이 만나 만들어낸 조간대(潮間帶), 즉 경계에 걸쳐 있어 바다도 아니고 땅도 아닌 그곳 갯벌의 흙 속에는 무수한 생물체가 살아가고 있다. 인간들은 그 갯벌을 ‘쓸모 없는 땅’ 혹은 흙으로 간주하고 ‘죽음의 흙’인 돌멩이 따위를 퍼부어 넣어 인간에게 요긴한 땅으로 변신시키고자 한다. 이른바 대규모간척이 그것인바, 작금의 새만금이 대표격이다.

수천 년 동안 농민들이 유기농업으로 살아있는 흙을 지켜오고, 구들장과 황토로 생명의 흙을 보듬어 왔지만, 이제 황토는 시멘트덩이로, 갯벌의 유연한 생명 공간은 죽음의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하찮아 보이는 흙이 그 얼마나 위대하고 자랑스럽고 생명으로 가득한 것인가를 깨닫는 생각의 전환, 그 전환 속에 인류의 미래가 담겨있다.

이기복 한국민속연구소 연구원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