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1년 09월 2021-09-01   578

[여는글] 기탄잘리를 읽는 가을

여는글

기탄잘리를 읽는 가을

 

 

어느덧 가을이다. 밝고 맑은 기운이 내리니 청산은 의연히 푸르고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사람의 마음도 한결 가볍고 여유가 있다.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텃밭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니 구름이 마치 백학과도 같다. 잡초를 뽑아내고 싹이 막 움튼 채소를 심는다. 이 애들은 시간 속에서 햇볕과 바람과 물의 생명을 받아 생장하리라. 

 

흙 기운을 받아 내 몸은 한결 개운하고 마음은 더욱 한가하다. 이런 날은 반일 경작하고 반일 독서하면 황금비율의 일상이 된다. 모처럼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솟는다. 평생을 연모하고 있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기탄잘리》가 눈에 들어 들어온다. 192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 예이츠는 이 시집에 이런 찬사를 헌정하였다. “나는 이 번역 원고를 여러 날 동안 가지고 다니면서 기차 안에서도 읽고, 이층 버스의 위쪽 자리에서도 읽었으며, 식당에서도 읽었다. 또 내가 얼마나 감동하고 있는지 낯선 이가 눈치챌까 봐 두려워 가끔 그 원고를 덮어야 했다.” 

 

타고르의 시는 문명이 만든 2차 언어가 거의 없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어들로 이뤄진 문장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러나 행간의 의미와 감동은 무엇보다 울림이 크다. 그의 시는 고요하면서도 천둥과 같은 울림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7, 8, 12번의 시를 좋아한다.

 

  나의 노래는 모든 장식을 떼어 냈습니다. 나의 노래는 자랑할 만한 옷과 치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장신구는 우리의 하나 됨을 방해합니다. 그것들은 당신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장신구 소리가 당신의 속삭임을 지워 버릴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시인의 자만심은 당신 앞에 서면 부끄러워 모습을 감춥니다. 오, 최고의 시인이여, 당신의 발아래 나는 앉습니다. 나의 일생이 다만 소박하고 곧은 것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음악으로 가득 채우는 갈대 피리와 같이. 

 

시는, 본디 질문이다. 시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서로가 좋아야 하는 사이를 가로 막는 내 삶의 장신구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이 단순한 질문에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어쩌면 평생에 걸쳐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심보선 시인은 “시여, 너는 내게 단 한 번 물었는데 나는 네게 영원히 답하고 있구나” 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왕자의 옷으로 치장하고 보석 목걸이를 목에 건 아이는 어떤 놀이를 해도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모든 발걸음마다 옷이 방해가 됩니다. 

  옷이 해질까, 흙먼지로 더럽혀질까 두려워 아이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움직이는 것조차 겁을 냅니다.

  어머니, 화려한 옷과 장식에 둘러싸여 건강한 대지의 흙에서 멀어진다면, 그리하여 평범한 인간 삶의 거대한 축제 마당에 입장할 자격을 잃게 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놀이는, 본디 기쁨이다. 기쁘지 않으면 놀이가 아니다. 일상이 기쁘지 않으면 삶이 아니다. 흙을 밟는 놀이는 전신에 온전한 기쁨을 준다. 그런데 놀이를 밀어내는 방해물이 곳곳에서 문명이란 이름의 옷을 입고 그럴듯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다. 그럴듯한 것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 말한다. 보라고.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을, 입고 싶은 옷들을, 그 옷에 달고 있는 장신구를, 더 달고 싶은 장신구를. 그 옷과 장신구들의 이름을 낱낱이 불러내는 일에서 나의 자유와 우리들의 평범한 축제는 문이 열릴 것이다. 

 

우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하나됨을 방해하고, 사이를 방해하고, 속삭임을 방해하고, 놀이를 방해하고, 자유로운 몸짓을 방해하는 온갖 치장들의 이름을. 만약 모른다면, 우리는 생각하며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구속이 구속인 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고백이다.

 

  내 여행의 시간은 길고, 또 그 길은 멉니다.

  (…)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 길을 돌아가야 하며, 가장 단순한 곡조에 이르기 위해 가장 복잡한 시련을 거쳐야만 합니다. 

 

우리는 ‘소박하고 곧은 길’이 복된 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직진으로, 빨리, 쉽게 길을 가고자 하여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어김없이 가을이 내게로 왔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한가하다. 그러니 가을에는 시도 좀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보자. 

 

book

 

➊ 인도의 시인이자 철학자. 1913년 아시아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➋ 이 글에 언급된 시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류시화 역, 《기탄잘리》, 무소의뿔, 2017″에서 발췌·인용함 

 


글. 법인 스님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16세에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으며 현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에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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