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1년 07-08월 2021-06-30   1128

[역사] 아마추어무선사 HL4HSJ의 죽음

아마추어무선사 HL4HSJ의 죽음

 

 

지구 전체가 갑자기 정전 된다면, 충전된 배터리를 장착한 무선라디오가 필요하다. 만약 세상 소식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싶다면 역시 충전된 배터리를 장착한 무전기에 더해 아마추어 무선통신사 자격증을 취득해 콜사인call sign명을 받아 놓으면 좋다. 수많은 데이터 송신탑이 세워져 있는 공간을 초월해 운이 좋다면 남극광을 관찰하고 있는 어느 여행자와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고, 자신만의 콜사인 카드를 만들어 서로 바꿔 간직할 수도 있다. 오늘은 자신이 여기 존재한다고 세상을 향해 지치지 않고 타전하던 콜사인 ‘HL4HSJ’의 삶을 기억하려 한다.

 

긴 머리에 화장을 한 특이한 남자 선생

 

콜사인 ‘HL4HSJ’의 생전 마지막 직업은 보험설계사였지만, 정작 그가 되찾고 싶었던 직업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대학 시절 플롯을 전공한 그는 시창視唱 때마다 자신이 가진 특유의 록 보컬로 주위를 상큼하게 만들던 예비교사였다. 서른여섯 해의 삶 중 여섯 해에 걸쳐 창원과 제주에서 교사로 재직했는데, 음악이 예술로 한정되지 않고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전해져야 진정한 교육이 될 수 있다는 교육관을 가진 교사였다. 

 

그는 나풀나풀한 플레어스커트를 좋아하던 선생님이었다. ‘긴 머리에 화장을 한 특이한 남자 선생’으로 동료 교사와 학생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제주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던 중 교무부장은 그에게 학부모 민원을 근거로 화장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공무원은 품위유지 의무가 있으며, 남자는 남자답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를 덧붙였다. 그는 이 부당한 요구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다. 당시 TV대선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동성애에 반대하느냐고 물었는데 당선 유력 후보가 자신의 존재에 반대한다는 말을 목격한 그는 다음 날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혔다. 

 

월간참여사회 2021년 7-8월호 (통권 287호)

故김기홍의 생전 모습 출처 녹색당 

 

사랑의 기원과 제3의 성

 

막아야 할 것은 화장과 복장이 아니라 그의 해직이었을 텐데, 사회는 그의 해직을 막지 못했다. 음악 교사 김기홍은 사람의 성별을 남성과 여성, 둘로만 나누는 세상이 품지 못한 사람이었다. 또한 다수의 세상 사람들과 달리 모든 성별을 사랑할 수 있는 바이섹슈얼Bisexual이었고, 상대방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독점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폴리아모리Polyamory의 삶을 받아들였다. 다만 사랑은 한 사람과 나누기에도 많은 공과 시간이 드는 ‘피곤한 일’이기에, 복수의 애인을 갖는 대신 자신의 애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몸에 칼을 대는 것을 싫어해서 수술은 선택하지 않은 채 크로스 드레싱에서 호르몬 투여로 이어진 트렌스젠더였다. 커밍아웃 이후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정체화했다. ‘정체화’라는 단어는 그가 즐겨 쓰던 말이지만 사전에 없는 말로, 

국립국어원이 기관으로서 가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고 여겨 자신만의 어휘를 고수했다. 

 

그는 영화와 뮤지컬로 유명한 <헤드윅>의 압도적 명곡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이 흐르는 장면이 연상되는 삶을 살았다. 기간제 교사 계약이 해지된 김기홍은 2017년 첫 번째 제주퀴어문화축제를 조직했다.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안다는 제주의 이웃 문화 속에서 제주대학교에 퀴어 커뮤니티가 생기고, 제주퀴어청소년 모임 ‘가람슬기’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그는 제주 지역 녹색당 후보로도 출마했다. 선거운동에서 지역 이름과 날짜만 있는 ‘제주 4·3항쟁’에 이 사회가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이름을 붙여 기억할 것을 요구했고, ‘잠들지 않는 남도’를 짱짱한 샤우팅 보컬로 완창해냈다. 자신에게 입법권이 생긴다면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고, 공무원과 교사가 자유롭게 정당에 가입할 수 있게 할 것이며, 교원노조법이 아닌 일반 노조법에 근거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한 후, 당적을 유지한 채 학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정치를 한다고 무대에 설 때마다 이야기했다.

 

월간참여사회 2021년 7-8월호 (통권 287호) 

영화 <헤드윅> 중에서 ‘사랑의 기원’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권리가 아니다

 

그는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포함해 동료와 애인 등 주변의 세 사람이 목숨을 끊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들이 죽어갈 때마다 평범히 살아가기 위해 살아내자고, 살아내는 것이 성소수자들의 투쟁이라고 절규했다. 지치지 않고 살아내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말을 찾아내고 나누려 했던 김기홍은 결국 지난 2월 24일 “삶도, 겪는 혐오도, 나를 향한 미움도, 맥락 따위 사라진 채 없다시피 왜곡된 말도 … 계속 고립되어 있어요.”라는 유서를 마지막으로 더 넓은 세상을 찾아 떠났다. 

 

그는 죽음을 선택하기 일주일 전 “퀴어 축제를 보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발언에 페이스북에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시민이다. 시민. 보이지 않는 시민, 보고 싶지 않은 시민을 분리하는 것 그 자체가 주권자에 대한 모욕이다.”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권리일 수는 없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듯이, 혐오는 사람을 죽인다. 안 볼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소매치기를 권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며, 혐오할 자유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살인할 자유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무지한 이들의 편견과 상관없이 아마추어무선사 HL4HSJ가 타전한 무선 신호는 여전히 이 지구 안을 돌아다닐 것이다.

 

 

➊ 영화에는 <사랑의 기원>이 흐르는 장면에서 원래 하나였던 제3의 성 ‘남여성’이 제우스의 시기로 벼락을 맞아 둘로 나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는데, 플라톤 『향연 : 사랑에 관하여』 중에서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다른 반쪽을 갈망하게 되었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를 재현한 것이다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을 연출했다.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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