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7년 11월 2017-11-02   1406

[특집] 청소년, 그들은 누구인가?

특집4_소년이 온다

청소년,
그들은 누구인가?

글.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교육대학원 교수

 

 

청소년기에 대한 법의 연령규정은 제각각이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까닭은 분명하다. 청소년의 권리보다는 보호와 의무, 또는 처벌대상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당장에 선거권 연령 문제만 봐도 이러한 사정은 명확해진다. 학생인권조례가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도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청소년이 미성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무, 처벌 상황이 벌어지면 성년의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꾸준히 등장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논리와 관점이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당사자인 청소년의 목소리는 이 과정에서 실종된다. 목소리를 잃은 세대이다.

 

과중한 학업, 그리고 때로 언론에 등장하는 일탈사건에 한해서 이들의 모습은 사회적 주시 대상이 될 뿐이다. 이들의 꿈, 갈망, 권리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질서 안에서 묵살되거나 변형을 강요당한다. 대학생이 된다고 해서 이러한 사정이 전격적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대학생은 마치 청소년 후기에 해당하는 것처럼 취급된다. ‘착한 양’ 기르기의 사회적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태도는 그렇게 오래 된 것이 아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청소년은 그냥 ‘애들’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낭만, 문학, 열정이 인정되었다. 때로의 일탈도 사회적으로 수용했고 적당히 넘어가주면서 청소년들의 이른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격려되기도 했다. 그보다 앞선 60년대는 4.19혁명의 한 주체로 존중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청소년은 더더욱 ‘애들’이 아니었다. 청소년기에 시를 쓰고 철학책을 읽고 문단에 등단하기도 하는 일은 이 세대 청소년들의 갈망이기도 했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 등장하는 C중학교(학제상으로는 지금의 고등학교)는 문학, 철학, 사상이 무협지처럼 펼쳐진 공간이었다. 

 

“무슨 소리야? 우린 벌써 늙은이가 되고 말았는데”

1990년대 우리사회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빨려 들어가면서 청소년은 애 취급 받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적 연령의 변화가 있긴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지배에 복종한 교육의 현실이다. 돌아보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전쟁은 그전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청소년기의 소년과 소녀들은 세계문학을 읽고, 문학의 밤을 열었으며 미술전시회, 음악공연을 했다. 물론 지금도 하곤 있지만 이건 대체로 이른바 스펙쌓기의 일환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에 충실한 일꾼을 기르라는 요구와 압박은 교육의 황폐화를 결과했다. “공부는 안하고 왜 책을 읽고 있니?”라는 말은 이제 그다지 낯선 부모들의 질타가 아니다. 

 

청소년기는 그 시기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청소년의 권리에 대한 인식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접는 훈련에 충실한 자가 성공한다는 원리는 지배적인 교육철학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청소년의 꿈을 교육으로 접목시키는 노력은 애초부터 헛발질이 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만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교사의 독단으로 열아홉살 청소년들이 전선에 투입된 상황에서 시작된다. 이들은 그 교사가 보내온 편지에서 ‘제군들은 강철같은 청춘’이라고 부추기자 비웃는다. “무슨 소리야? 우린 벌써 늙은이가 되고 말았는데.” 이들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격을 포기’하는 자신의 변화에 비애를 느낀다. 우리의 교육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청소년들을 교육이라는 전쟁터에 몰아놓고 꿈을 잃어버린 늙은이로 만들어내고 인격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그래 놓고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말처럼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처럼 여긴다. 

 

바로 그런 압박과 강요 속에서 아이들은 인격 포기당한 채 자기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간다. 때로 그것은 폭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누리고 싶은 쪽으로 가기도 하고, 때로 그것은 오랜 침묵 속에서 훗날 괴물로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성세대로 성장해간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결과만 비난하고 그렇게 만들어간 과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악의 꽃’이 피는 정원을 만들어놓고, 진정 아름다운 꽃들은 다 뽑아버리는 교육, 제도, 법이 있는 상황에서 어떤 화원을 꿈꾸는 것일까?

 

 

서부전선이상없다

레마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1차세계대전 중 자원입대한 열아홉살 학생들이 겪는 전쟁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멋진 신세계’를 빼앗긴 청소년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주인공은 사랑을 갈망하면서 다리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희생시킨다. 여기서 다리가 생기는 사건은 그녀의 사랑이 생물학적 성숙과 사회적 발언의 권리를 얻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혀는 잘려 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삶이 그토록 갈망하고 꿈꾸는 권리에 대한 발언권을 봉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이런 말을 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혀는 교육의 현장에서 잘려나간다. 동화 속의 인어공주는 땅을 밟고 갈 때마다 발바닥에서 통증을 느낀다. 바로 그렇게 청소년들도 통증을 느끼며 세상을 걸어간다. 그 고통을 제대로 듣고 귀 기울여 주는 세상은 이미 아니다. 그런 세상에 대해 사랑과 희망을 느낀다면 그게 바로 정신이 나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적의의 씨앗을 뿌리는 교육은 강철같이 버티고 있다. 모두 너의 미래를 위해서야 라는 구호를 내세워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런 적의와 불만, 그리고 비판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수면제와 진정제를 함께 섞은 약을 타 먹인다. 셰익스피어의 책은 읽을 수 없고, 고전이 진열되어 있어야 할 서가는 비어 있다.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우리 교육 현장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멋진 신세계’를 약속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들의 꿈을 잔인하게 배반하고, 이들 가운데 아주 소수에게만, 그것도 본래 특권을 가진 이들에게만 신분과 계급의 사다리에 올라가도록 허락해준다. 청소년들이 이를 모르고 있을까? 단연 아니다. 

 

청소년들을 병들게 하는 사회를 유지하면서 청소년 문제 운운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는 행위이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기만이며,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어가는 프로젝트가 누구의 제동도 없이 관철되어가는 음모다. 그렇지 않아도 ‘멋진 신세계’는 태어나면서도부터 신분과 계급이 갈라지는 배양과정, 습성훈련과정을 보여준다. 우리의 청소년들도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공장에 투척되어 ‘물건’으로 만들어지는 중이다. 이들도 자라나면 그런 일을 계속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길러진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늙은이들을 거리에 버릴 것이며,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짓밟을 것이며, 폭력에 무감각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러는 어느 날, 가장 처참한 희생자는 바로 기성세대 자신인 것을 뒤늦게 깨달을 것이다. 아무런 조처도 취할 수 없게 된 무능력한 존재로서. 이건 자살이 종착역인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더는 희망이 없으므로. 

 

지금 늦지 않은 때이다. 청소년은 그 자체로 존엄한 미래의 권리주체다. 여기서 시작되는 논의가 아닌 그 어떤 것도 청소년의 삶을 지켜낼 수 없고, 우리 자신의 삶도 지켜낼 수 없다. 

 

 

 

특집. 소년이 온다 2017_11월호 월간 참여사회 

1. ‘요즘 것들’에 관한 오해와 진실

2. 소년법 개정 필요도 가능성도 없다

3. 모두의 참정권

4. 청소년, 그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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