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12월 2010-12-01   3634

그사람 그 후-배우 김중기, 판문점 향했던 발길 레드카펫을 밟다

판문점 향했던 발길 레드카펫을 밟다

배우 김중기


강지나 <참여사회> 편집위원  사진 김은진 작가

동명의 주인공으로, 자신과 닮은 삶을 소재로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내민 배우 김중기.  얼굴은 조금 알려져 있지만, 매주 토요일 아침, TV 여행 프로그램의 내레이터를 하면서, 목소리만큼은 대중에게 매우 친숙한 배우다. 그 독특한 목소리 주인공이 22년 전 통일의 염원을 담아 온몸에 태극기를 감고 백록담의 흙을 손에 쥔 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쳤던 남북청년학생회담의 남측 대표였다는 사실이 얼핏 낯설게 느껴졌다. 직접 만나본 김중기는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한 이미지, “사실은 착하고 부드럽습니다”

영화배우로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학생운동 후일담 형식으로 주목 받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김응수 감독)와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의 삶을 그린 <선택>(홍기선 감독),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몽실언니>(이지상 감독),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화제였던 <이태원살인사건>(홍기선 감독)등이 눈에 띈다. 유독 강한 이미지의 캐릭터가 많다. 그에게는 운명 같은 걸까?

  “배우는 이미지가 중요한데, 개인적인 전력도, 지금까지 찍은 영화도 그렇다 보니 대중적인 이미지가 강한 캐릭터로 각인되어 있는 거 같다. 감독들도 나를 캐스팅할 때 강한 이미지를 원하는 편이다. 개성 강한 역이 연기할 것도 연구할 것도 많으니까 어떤 점에서는 쉽고 편한 면이 있다. 내가 워낙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왔기 때문에 마냥 부드럽거나 젠틀한 캐릭터는 잘 하지 못한다. 뭔가 꼬여있거나 내면이 강하거나 약간 이중적인 배역이 나와 어울린다. 그래도 지금은 선한 역도 잘 할 수 있을 거 같고 연기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감독님이나 사람들이 보기에 내 캐릭터를 강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다.”

  첫 출발이 순수 독립영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주인공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으면서 세상에 알려져서인지 유독 부산국제영화제에 자주 초청되는 배우이기도 하다. 올해 촬영을 끝낸 <이방인들>(2011년 개봉예정)도 부산국제영화제 장편제작지원을 받은 저예산 영화다. 영화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레드카펫을 세 번이나 밟은 셈이다.

운동권 출신 아닌 온전한 배우로 설 수 있었던 <선택>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가장 주목 받은 영화가 바로 <선택>이다.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이 뽑은 최고의 영화에 선정되었고, 실존인물보다 더 김선명다운 그의 연기에 찬사가 쏟아졌다. 운동권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 다니는 그에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룬 영화가 부담스럽기도 했을 텐데 오히려 그런 부담에서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었단다.

  “첫 영화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인데, 내가 ‘운동’이라는 전력이 없었다면 주인공을 하기 어려웠을 거다. 영화 속 주인공이 내 이름과 같은 ‘김중기’이고, 학생운동하다 도피유학 비슷하게 온 인물이니까 개인사도 비슷하다. 과거에는 스스로 자유롭지 못해 사람들도 자주 만나지 않았고, 복잡한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고, 어찌 보면 연기를 선택한 것도 그런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스스로 맘이 편해졌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도 내가 마음을 잘 다스리면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최선을 다 할 것은 다하고, 포기할 것은 포기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 전력이 배우인생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연기력의 문제일 것이다. 관객들이 나에게 운동권출신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연기를 잘한다면 나를 다시 봐줄 거다. <선택>을 찍으면서 그런 통과의례를 치른 것 같다.”

  김중기가 학생운동의 정점에 있었던 1988년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의 여파로 자주민주통일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던 시기였다. 학생들은 분단되고 왜곡된 남한 현실에서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겉만 화려한 88올림픽 단독개최에 불편한 심정을 갖고 있었다. 총학생회장 후보 유세에서 김일성대 학생들과의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하면서 그는 “조국통일의 지평을 통일조국의 동량이 될 우리 청년학생들이 먼저 열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외쳤다. 그리고 8·15 행사 때 광목천으로 백여 명의 선봉대 학생들과 서로 몸을 묶은 채 수천 명의 시위 군중들을 이끌고 판문점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 그는 체포되었다.

  문득 그 때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 통일 정세는 그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궁금했다.

  “북한이 변화해야 할 점이 많은 국가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네가 먼저 굽히고 들어오라는 식으로 현 정부가 미리 틀을 정해놓고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은 남북관계를 더 힘들게 한다. 북한은 민족내부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하니까 그 틀 안에서 북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최소한 인도적인 지원은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연극·영화가 주는 위로와 감동이 인생 2막 이끌어

촛불의 내심 온도는 외부보다 낮고 태풍의 눈은 오히려 고요하기만 하다. 치열한 청년기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해서 발산해온 그에게는 고요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출소 후 그는 전에는 거의 보지 않았던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 위안과 감동을 많이 받았고 그것이 제2의 인생, 연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 연기를 하겠다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싸늘했다. 전력뿐만 아니라 외모나 타고난 기질이 배우라는 고정된 이미지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연기보다는 연출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많았다.  

  “연기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도 처음으로 접하는 작품을 연출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머리도 비우고 몸도 비우고 싶어서 이 판에 들어왔는데 고생을 더 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 죽어도 연출은 안하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은 연기한지 15년 정도 지나고 나니 기회가 되고 좋은 작품이 있다면 연극연출은 한번 해보고 싶기도 하다(웃음).”

  영화배우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도 대학로 연극판에서 연기를 처음 시작했다. 지금도 그는 연극과 영화를 자유롭게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올해에도 <B언소>, <오늘 나는 개를 낳았다>, 희곡낭독 공연 등 다양한 연극 무대에 섰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서는 강한 이미지를 선호하시는 반면 오히려 연극 쪽에서는 나를 부드러운 이미지로 본다.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는 연애 이야기 같은 유한 배역을 많이 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요즘은 연극과 영화의 경계가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예전에 했던 연극적 발성이나 액션을 많이들 안 좋아하니까 오히려 연극이 영화처럼 일상적이고 무겁지 않은 소재가 많아지면서 연극다운 맛을 잃어가고 있다. 주제가 강하다해도 블랙코미디나 소프트한 풍자 형식으로 풀어내는 게 필요한데, 그런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들이 거의 없다.”

  그는 연극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실험적인 작품에 많이 출연했다. 이지상 감독과 했던 <둘 하나 섹스>와 <몽실언니>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귀농해서 살고 있는 이지상 감독과 그 마을 사람들을 배우와 스텝으로 활용한 <몽실언니>는 그에게도 새로운 체험이었다.

  “<몽실언니> 찍으며 깨달은 점도 있었다. 귀농해서 사시는 그곳 분들은 소박하고 타인에 대한 마음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하고, 큰 욕심 내지 않고 사는 분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생활과 삶의 방식에 있어서 정말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란 느낌이었다. 정치적 진보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인 기존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데, 그 분들은 현재 시스템에서 밖으로 나간 삶을 지향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살 자신은 없지만…….(웃음)”

가장 잘한 선택도, 잘못한 선택도 ‘연기’

송강호는 작품의 폭이 다양하지만 봉준호 감독 영화에 자주 출연한다. 이병헌은 김지운 감독과 여러 번 호흡을 맞췄고, 김상경이란 배우가 빠진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상상이 안 된다. 각자의 취향과 세계관에 따라 유독 인연이 깊은 감독과 배우가 있는데, 김중기에게는 이윤기 감독과 홍기선 감독이 그런 인연이다.  

  “<아주 특별한 선물>의 이윤기 감독은 곧 개봉할 작품까지 하면 5편을 같이 했는데 서로 미안한 감정이 있다. 영화가 흥행이 안 되니까….(웃음) 이윤기 감독은 정서적으로 나와 통하는 부분이 많다. 밑바닥 정서나 내부 상처도 있고 비주류적인 감성도 있다. <선택>의 홍기선 감독은 정서적인 세대는 나와 좀 다르지만, 존경한다. 그분은 영화와 자신의 생활이 같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 그래서인지 홍기선 감독 영화는 어떤 것이라도 같이 하고 싶다. <이태원 살인사건>도 흥행 요소를 더하면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걸 본인도 잘 알고 있지만 정공법으로 실화 그대로 풀어내려고 했던 어떤 고집이 있었다.”

  연기 폭을 넓히려면 의도적으로라도 다른 감독이나 다른 느낌의 배역에 도전해야 하지 않을까. 익숙한 물에 오래 있으면 정체되는 법이니.

  “(함께 작업해왔던 감독들을 만나면) 편한데 어쩌겠나?(웃음) 맞다. 나도 바꿔야 된다. 그분들도 지겨워하고…….(웃음)

  요즘은 다른 분들을 많이 만나려 한다. 예전에는 영화에서 주인공도 하고 내 능력만은 아니지만 지명도도 있고 해서 오디션 같은 걸 안 보려고 했다. 이제는 좀 변화를 시도하려고 한다.

  나도 관객수 200만이 넘은 영화에서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배우가 좀 돼야하지 않겠나?(웃음) 영화 쪽이 아니라도 다른 일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다시 바쁘게 살고 싶다. 전에는 자주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 맑고 담백하면서도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도 제대로 만나고 싶다.”

  김중기는 최근 이윤기 감독의 영화 <사랑, 그 쓸쓸함>(가제)의 촬영을 마쳤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이야기인데, 극 중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로 임수정, 현빈, 김지수 등과 호흡을 맞췄다. 빠르면 올 겨울,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장편제작지원을 받은 <이방인들>은 부산 변두리를 배경으로 부모세대의 사건을 해결하려는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김중기에게 또 하나의 특별한 방송은 TV 여행프로 <걸어서 세계속으로>이다. 작년에 예고 없이 종영됐다가 올 초 다시 재방영된 우여곡절이 많은 프로인데, 내레이터 김중기에 대한 관심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뜨겁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KBS에서도 주목받고 있고 내게도 정이 많이 가는 프로이다. 다큐로서는 드물게 배경음악이나 내레이션에 대한 시청자 의견이 인터넷 게시판에 많이 올라 온다. 내가 연기할 때는 이 정도로 관심이 없었는데…. 내레이터에 대한 다양한 평이 올라오다보니 종종 상처도 받는다(웃음). 그것도 관심이니까 내가 언제 또 이런 관심을 받아보겠나 싶어서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가장 잘한 선택과 그렇지 않은 선택이 무엇인지 물었다.

  “가장 잘 한 건… 와이프를 만난 것? 힘들어도 어쨌든 계속 같이 살아주고 있으니까.(웃음) 잘한 선택… 아무래도 연기를 선택한 것이지 싶다. 힘들긴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연기 폭도 넓어지고 깨달음도 있어서 즐겁다. 대학때 전공이 철학이고, 고등학교 때 국문학을 공부할까 철학을 할까 고민한 것처럼 아마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여러 인물을 연기해야 하고 다양한 경험을 표현해야 하는 배우의 길을 선택한 내게는 축복받은 직업이다. 가장 잘못한 선택도 연기이다. 잘 맞지도 않고 타고난 자질이 있지도 않은데 왜 연기를 선택했을까 하는 후회도 가끔은 한다.”

  하지만 우연히 들어선 인생의 제 2막을 제대로 가야하지 않겠냐는 그는 분명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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